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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16)

대일본 제국을 위하여 내 이 한 목숨 사꾸라 꽃잎처럼 흩어져서 조극의 심장으로 떨어진 충혼들을 위로하고 기리는 탑이, 어찌 경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몇걸음 떨어져 이만큼에, 살아서 오늘을 누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들을 위하여, 얼마든지 즐길 수 있도록 수만 평에 이르는 위락의 공간 턴세대공원을 베풀어 넣었으니, 여기도 조국인가, 굳이 일본 내지에서만 살려 할 것 조금도 없는 마음이 들도록, 만주 낙토 건설에 몸 바치고 심신이 쇠삭해질까 배려하여 공원 아래, 기념관 광장 바짝 위쪽에다 신식 수영장을 새로 지었을 뿐 아니라, 그 옆에다가는 축구, 배구, 농구를 비롯하여 달 리기, 체조 등의 각종 운동을 양껏 할 수 있는 국제운동장도 만들었다. 그러나 야구장은 따로 있었다. 이 아마또 광장과 기념..

혼불 5권 (15)

서탑의 높이는 구십 척, 웅대하고 화려하게 하늘을 찌르고, 둘레는 칠십 척, 부둥켜 안고 울려 해도 너무 넓었다. 조선에서는 본 적이 없는 형태의 풍요로운 관능이 차 오른 둥그런 몸통, 그 한가운데 타원형의 녹청색 조각 장식이 된 문이, 주금장식 된데다 ㅈ은 자주 속문에 겹치어 요염히 드러나고, 그것을 받친 석단의 네 모서리에 갈기 날리며 눈 부릅뜬 거대한 해태, 둥글둥글 한 켜씩 좁히며 쌓아올려 비애롭도록 장엄하게 뾰족이 솟구친 꼭대기의 정교 화려한 첨탑들은 라마교 양식이라는데, 하늘을 두른 탑의 어깨에는 풀이 나 있었다. 강모는 해가 질 때면 이 탑이 보이는 서창 앞에 내내 머물러 광대무변의 도시 너머 평원으로 지는 해와, 그 붉은 해를 등진 채 가슴으로 어듬을 받아들이며 한없이 큰 고적과 슬픔의 ..

혼불 5권 (14)

"거기 가면은요, 버들처럼 흐느적 흐느저억 늘어져 감기면서 걷는 사람들이 마않지요." 버들거리. 어여쁜 이름이 아닐가.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 너는 누구의 버들인가, 라는. 그러니까 버들이 애인이죠, 여인이에요," 기모노 입은 버들여인들이 살고 있는 골목은 우묵하고 좁고 깊었다. "조선 사람들은 여기러 다닙니다." "일본인 전용이라면서요?" "그래도 조선 사람은 갈 수 있어요. 이등 국민이라고 해서 중국인보다는 대접이 좀 나으니까. 하지만 중국인들은 발도 못 들여놔요. "일등 국민은 일본 사람입니까?" "중국인들조차도 자기네는 삼등 국민이라고 자칭하지 않습니까? 너희 조선 사람이 우리보다 낫다는 게지요." 다른 데는 몰라도 봉천에서만큼은 그 등급이 분명하여, 신분증처럼 찍혀 있다고..

혼불 5권 (13)

그렇지만 서울에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그는, 동광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덕분인지, 아니면 팔도에서 온 조선인 말고도 일본인과 중국인, 백계 러시아인들이 섞여 사는 국제 도시의 상인답게 말씨를 다듬어서인지, 평소에는 별로 심한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다만 억양만큼은 평안도식이엇다. "1910년에 합방이 되고, 1911년 봄, 우리 아버지가 봉턴으로 오셧디요. 그러나까 봉천 근교였는데, 친척 일가분이 먼저 여기로 와서 농토를 많이 일궈 가지고 아버질 부른 거예요. 아버지는 목수였습니다. 그때 땅에 나무 뿌리가 수백 년씩 얼키설키 억세게 뒤엉켜서 보습을 대면, 묵어 자빠졌던 땅이니, 황무지니껜요, 나무 뿌리에 걸려 그만 보습이 뚝뚝 부러져 나갔어요. 참, 대단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들고, 개간을 하면서,..

혼불 5권 (12)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죽기 마련인 조선 인민, 노동자, 농민들은, 발바닥이 찍어지게 걸어가다 죽더라도 신천지가 있다니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어찌어찌 목숨 붙어 여기까지 왔으면, 본증적으로 손톱 발톱 써래 삼아, 돌 고르고 나무뿌리 캐내면서 개간하기 마련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 개척단." "요새 부쩍 더 하는 것 같습디다." "만주 선전?" "예" "정국이 불안해서 그렇겠지. 빛이 부시면 그림자 짙은 법 아니냐. 일본 내부에서라고 왜 소요가 없겠어? 사람 생각은 같은데. 그걸 무마하고 안도감을 주려는 수단 방편으로 이처럼 화려한 소도구, 신도시 봉천.신경을 번쩍번쩍 세우는 거라. 과시도 할 겸. 저희들이 침투 점령한 만주 지역을 군대만으로 다 버틸 수는 없으니까. 이 넓은 땅에 배치할..

혼불 5권 (11)

3 서탑거리  한없이 넓고 푸는 녹색의 지평선, 새로운 대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저는, 아직 불확실한 발길을 한 걸음씩 옮겨 디디었습니다. 기대와 설렘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저 여명의 하는 높이 휘날리어 펄럭이는 일장기와 온 마을에 메아리치는 종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들먹이게 하지요. 우리 개척단 전원이 경건하게 희망에 가득 찬 아침 기도를 올리는 순간에도, 미래를 약속하고 예고하는 심장의 고동은 용솟음치는 맥박으로 뛰고 있습니다. 신천지를 이룩하자는 의기에 불타 우리는, 이 아름다운 낙토 이상 마을에서 단련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격려하는 시찰단과 봉사반의 발걸음도 아주 작고 붐빕니다. 마을 남쪽에는 우리 촌장의 이름을 따서 미나미 기소야마라고 이름 붙인 산봉우리 235고지가 위대한 모습으로..

혼불 5권 (10)

대보름날 저녁에는 그야말로 한 판 걸게 풍물을 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동산 기슭에 달집을 만들어 세우려고 대나무밭이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주인한테 때를 얻느라고 바빴다. "보름날 이렇게 해 놓으면 낙과를 막는다." 며, 찰밥을 한 덩어리 뭉쳐서 뒤안의 감나무 가지에 얹어 놓은 기응이 달마중을 한다고, 해가 지기 전에 일찌거니 저녁을 먹고는 뒷짐을 진채 뒷동산으로 가고 "자네, 다리 밟으러 안 가는가?" 하는 수천댁의 부름에 오류골댁도 따라 나선 집에는, 강실이 혼자 남아 집을 보았던 것이다. "왜, 너는 안 가냐?" 수천댁이 강실이를 돌아보고 물었을 때, 오류골댁은 "집에 그냥 있겄다고 허느만요." 하고, 강실이 대신 대답하였다. "호기사 과년헌 처자가 조심스럽기는 허지. 그래도 ..

혼불 5권 (9)

그러다가 그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순간이었던 것도 같고, 얼만큼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던 것도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그네는 꿈 속에선 자갈 많은 고샅을 귀 가까이 밟고 오는 발소리였다. 그것도 매안에서는 쉽게 듣기 어려운 구두 소리가 분명하였다. 저벅, 저벅, 저벅. 그 소리는 막 오류골댁 사립문을 들어서면서 달빛 교교한 마당을 지나, 강실이가 누워 있는 방문앞 댓돌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퉁. 가슴이 내려앉은 소리가 제 귀에도 커다랗게 울린 강실이는 미처 그만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장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지문에는 아까보다 더 새하얀 달빛이 드리워져 오히려 귀시의 옷처럼 섬뜩해 보였다. 누구인가, 라고 생각한 겨를도 없이 그네는, 내려앉은 가슴이 저 밑바닥에서 무겁게 뛰는 소리..

혼불 5권 (8)

촉촉하게 피어나는 꽃잎도, 향훈도, 우거진 잎사귀도, 꽃보다 더 곱다는 단풍도 이미 흔적 없이 사라진 대지의 깡마른 한토에, 나무들은 제 몸을 덮고 있던 이파리를 다 떨구어 육탈하고 오로지 형해로만 남는 겨울. 겨울은 사물이 살을 버리고 뼈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그래서 제 형상을 갖지 않는 물마저도, 흐르고 흐르던 그 살을 허옇게 뒤집어 뼈다귀 드러내며 얼어붙는다. 그뿐인가, 바람 또한 경의 뼈를 날카롭게 세워 회초리로 허공을 가르며 후려치니, 날새의 자취도 그치고, 사람도 다니지 않으며, 짐승 또한 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는 혹독한 추위 속에, 사위를 둘러보아 그 무슨 위안이나 온기 한 점 얻을 길 없는 삼동.헐벗은 잿빛으로 앙상한 골격을 뻗치고 있는 낙목한천에, 겨울 달은 얼음처럼 떠오른다. 그래..

혼불 5권 (7)

2.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무엇 하러 달은 저리 밝을까. 섬뜩하도록 푸른 서슬이 마당 가득 차갑게깔인 달빛을 밟고 선 채로, 아까부터 망연히 천공을 올려다보던 강실이는, 두 손을 모두어 잡으며 한숨을 삼킨다. 함께 삼킨 달빛이 어두운 가슴에 시리게 얹힌다. 싸아 끼치는 한기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그네의 여읜 목과 손등, 그리고 바람조차 얼어붙어 옷고름 하나 흔들리지 않는 희 저고리와 흰 치마 위에 달빛은 스미듯이 내려앉아 그대로 서걱서걱 성에로 언다. 그 성에의 인이 교교하게 파랗다. 마치 숨도 살도 없는 흰 그림자처럼 서 있는 강실이의 머릿단에 달빛이 검푸르게 미끄러지며, 그네의 등뒤에 차가운 그림자로 눕는다. 달빛이 너무나 투명하고 푸르러, 그림자는 그만큰 짙고 검다. 먹빛이다. 사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