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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26)

8. 인연의 늪  신라 성골 진평대왕은 기골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어 그 키가 십일 척이나 되었다. 그래서 곤룡포를 지으려고 비단을 펼쳐 놓으면 방안이 마치 넘실거리는 붉은 바다 같았다. 그리고 늠름한 가슴과 우뚝 솟은 두 어깨에 발톱이 다섯 개 달린 황룡의 꿈틀거리는 무늬를 금실로 수놓은 용포를 입은 그의 위용은 흡사 붉은 구름 속의 산악 같았다. 하루는 왕이 창건한 내제석궁 천주사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그 힘에 돌계단 두 개가 한꺼번에 부서졌다. 이에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날에 오는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를 본 사람들은 왕의 힘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 찬탄하며 깊이 흠모하고 우러르니.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

혼불 5권 (25)

어뜬 놈은 책상다리 점잖허게 개고 앉아서 발부닥 씰어 감서 공자왈 맹자왈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노래를 부름서. 글이요, 정신이요. 허능 거이여? 시방. 양반은 즈그 문짜로 글 읽어야 살고. 정신 갖춰야 살겄지마는 상놈은 상놈대로 젓사라고 외어야 사능 것을 살자고 지르는 소리를 패대기쳐? 여그가 어딘디? 그래. 여그가 어디냐. 여그가 어디여? 사람 사는 시상이다. 사람 사는 시상에 사램이 사람끼리 이렇게 서로 틀리게 살어야니. 이게 무신 옳은 시상이냐. 뒤집어야제. 양반은 글 읽어서 머에다 쓰고, 그 좋은 정신은 시렁에다 뫼셔서 무신 생각을 허능고? 상놈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암서. 왜 그렁 것을 몰라? 무단히 공부라고 헛짓하고 있능 거이제. 춘복이는 그 이야기 속의 샌님을 새우젓 장수처럼 방죽에 ..

혼불 5권 (24)

"달 봤다아." 춘복이는 거멍굴 동산의 꼭대기 바위 날망에 올라 두 다리를 장승마냥 뻗치고 선 채로 두 팔을 공중으로 번쩍 치켜 올리며 부르짖었다. 그 소리는 사나운 산짐승이 달을 보고 잡아먹을 듯이 응그리며 무서운 용틀임으로 으르렁거리는 것같이 들렸다. 아니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오래 참고 참아 온 울음을 한 목에 터뜨리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달 봤다아야." 비명에 가까운 춘복이의 고함소리가 동산을 뒤흔들며 공중에 울릴 때 함께 올라온 거멍굴 사람들은 달을 향해 넙죽이 큰절을 올렸다. 소원을 비는 것이다. 해가 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할랑거리며 고리배미로 앞서 간 옹구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백정 택주네 붙이들과 당골 백단이네 푸네기, 그리고 공배네 내외, 평순네들이 우줄우줄 뒤섞인 거멍굴..

혼불 5권 (23)

서둘러 평순이를 앞세우며 사립문을 나섰다. "감나무에 까치밥 냉게 놨는디? 왜 또 밥을 주어?" 작년 가실에 감 딸직에 한 개 냉게 놨잖이여? 꼭대기에." "너는 어저께 밥 먹으면 오늘은 안 먹냐?" 안 그래도 명절이라 다른 날보다 나물 반찬도 많고 찰밥도 먹어 흥겨운데. 달맞이를 한다고 제 어미랑 동산에 가는 것이 어린 마음에 못내 좋은지 강종강종 모둠발로 옆걸음을 치던 평순이가 또 묻는다. "근디 왜 개는 밥을 안 준대? 아까 택주 아재네 놀로 가서 봉게로 누렝이가 굶어 갖꼬는 픽 씨러져서 기운이 하나도 없데?" "개는 그렁 거이여. 보름날 개 밥 주먼 여름에 파리가 말도 못허게 꾄디야. 개가 삐삐 말르고. 긍게 아조 ㄱ기는 거이여. 그러먼 갠찮당만. 아. 말도 있잖냐 왜. 개 보름 쇠디끼 헌다고. ..

혼불 5권 (22)

별로 볼 만한 풍치가 없고, 거기 올라가 달맞이를 함직한 동산도 없는, 해빠닥한 마원의 형형한 지형에서 어찌 꿈같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숲 머리 뒤로, 속이 시리게 차고 맑은 보름달이 떠오르는 풍광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달이 뜨면 비오리는 늘 주막 앞에 평상으로 나와 앉아 혼자서 소리를 하였다, 그저 배우다 만 소리라 명창은 못되지만, 달이 밝아 잠 안 오는 밤이면, 그 소리가 길고도 깊게 적송의 둥치와 머리를 휘러 감고 마을 안 갈피로 파고들어, 공연한 사람을 뒤척이게 하는 소리였다. 어아아 꿈 속에서 보던 님을 산이 없다고 일렀건마안 오매불망 그린 사람 꿈이 아니면 어리 보리 천리 만리이이 그린 니임아아 꿈이라고 생각 말고 자주 자주 보여 주면 너와 일생을 지..

혼불 5권 (21)

그들은 매안의 원뜸으로도 왔다. 내방한 사람이 남자라면 사랑에, 여자라면 안채에 가방을 열어 놓고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쌀과 바꿀 수 있는지를 간곡히 물었다. 방물장수도 아닌 그들이 초면의 집을 방문하여, 쌀 있는 사람이 욕심을 낸 만한 물건을 내놓고, 오직 쌀을 얻고자 할 때, 대소가의 다른 집에서도 혹 벼르던 것이 있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흰 쌀을 감추어 들고 종갓집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쌀 있는 사람들은 진귀한 것을 싸게 살 수 있었다. 때로는 섬사람들도 찾아왔다. 끼니거리 양식이 없어서 김이나 톳, 머자반 같은 해초류를 둥덩산같이 머리에다 하나씩 이고 마을로 들어온 그들은 쌀 한 되만 떠 주면, 그 한 보따리를 다 주고 갔다. 미역은 귀한 것이라 얻기가 어려워 아이를 낳고도 김으로 국을 끓여 먹..

혼불 5권 (20)

5. 수상한 세월  시절은 하루가 다르게 수상하여 아무도 내일 일은 미리 짐작할 수가 없고 집집마다 떡쌀은커녕 싸라기조차 제 대로 남아 있지 않은데다가, 땅을 파고 몰래 묻어 놓은 제기마저 놋그릇이라고 공출을 해가 버린 뒤 끝에, 설날 차례인들 변변히 올릴 수 있었으리. 우스운 말로 놀부는 부모 제사 때를 당해도 음식 장만을 따로 하지 아니하고, 즐비한 빈 접시에 돈을 대신 올리면서 "이것은 떡이요." "이것은 전이요." "이것은 또 무엇이올시다." 하고는, 건성으로 절만 몇 번 한 뒤에 번개같이 철상을 하는데, 돈은 도로 다 쏟아 내왔다 하니, 그 식대로라면, 아무리 마음을 간절해도 없어서 못 올리는 제물 대신 검은 먹으로 주.과.포.혜 글자 적어, 조상의 신명이 부디 가여운 자손의 정성이라도 흠향하여..

혼불 5권 (19)

"옛날에, 아조 옛날에 말이다. 두 사램이 있었는디 하나는 기생이고 하나는 소실이었드란다. 이 세상의 난 온갖 생물 삼라만상이 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어서 서로 만나 짝을 이루고 살라고 나왔는디. 그 중에 사람은, 음이라면 여자고, 양이라먼 남자 아니냐, 들한의 핀 꽃들이나, 때가 되면 저절로 즈그들끼리 짝을 짓는 짐생들허고는 달러서, 사람은 암만 때가 되야도 절차 거치고 순서 밟어야 음이 양을 만나고 양이 음을 만나는 것이라. 그 순서 절차 챙기기가 용이치 않은 사람은 과연 넘들보단 복잡헌 세상을 살 수 배끼는 없는 벱이거등. 너도 인자 나이 먹고 세상 물정 알게 되먼 이 말이 무신 말인지를 알어듣는 날이 올 것이다. 사람이 음양이 만날 때, 버젓하게 육례를 갖추고 덩실히니 정실부인 되는 여자가 태반이..

혼불 5권 (18)

그러니까 서탑거리가 조선 사람 삶의 둥지나면, 서탑소학교는 조선사람 정신의 둥지였다고나 할까. "그것이 알본 경찰의 눈에는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테지요." 김씨의 말에 강태가 대꾸했다. "대강 말씀을 알아들었으니 언제라도 필요하시면 연락하십시오, 그러고, 저희들은 지금 좀 가 봐야 할 것이 있어서 이만." 하, 그러신 것을 염치없이. 김씨는 멀금하게 커가지고 나온 강태가 큰길을 휘몰아 때리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몇 걸음 걷다가, 김씨를 가리켜 짤막하게 평했다. 강모는 의외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다는 아닐 겁니다. 속에는 깡치가 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겠냐?여기가 어디라고 달랑 들고 마누라에 자식들에 주렁주렁 매달고 온 아버지. 꼴 안 봐도 뻔하지, 그 밑에서 이 만큼이나 살게 되기까지 무슨 ..

혼불 5권 (17)

4 조그만 둥지  "만주 벌판 다 돌아다녀야 이렇게 조선 사람 모뎌 사는 데 없다."고 주인 김씨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봉천의 '서탑거리'는, 도시의 서쪽 모서리 하늘에 걸린 철교 텐쳐 하늘다리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시칸방까지 광목필을 풀어 던진 것처럼 하얗게 벋은 시부대로 일직선 길 양쪽 언저리 일대를 둥그렇게 가리키는 말이다. 묘한 일이었지만 이 서탑거리의 시작과 끝. 그러나까 광목필의 이쪽과 저쪽 끝자리에는 똑같이 시장과 유곽이 있었다. 거리가 시작되는 하늘다리 바로 야래, 노도구 파출소와 일본 경비대석조 건물이 양버티고 선 옆구리 골목은 일본인 전용 유곽 야나네마찌, 버들거리였고, 버들거리 입구에는 신시장이 있었는데, 동쪽으로 뻗친 도로를 따라 한 오 리 남짓, 이 킬로미터쯤 내닫다가 주춤 머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