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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54)

그리고 그 비석의 뒷면에 적혀 있는 그리운 문자들은 "공으로부터 거슬러 올라 사 대에서 세 분의 정승의 났으니 공은 본디 겸허한데가 또 가문이 융성한 때문에 그 마음은 더욱 벼슬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아경(참판의 별칭)의 열에서 의직을 원하여 절라부백(전라관찰사)이 되었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돌아와 향리에서 여생을 보낸 지 십여 년이 되었다. 금상(임금)이 자헌의 품계를 특별히 더하여 형조판서를 제수하자 공은 받지 않고 상소하여 사양하니, 비답한 말씀이 특별히 많았고 공을 부르는 전지가 잇달아 고향으로 내려왔다.는 말씀을 적고 있다. 청빈하고 용모가 아름다워 보는 이에게 감화를 주며, 그 행실이 단정하고 학문이 높았던 그 선조의 한평생 살아온 흔적이, 한 집안은 물론이요, 향리와 나라에 빛..

혼불 5권 (53)

살아서는 유명이 달라 명부의 그림자를 좇아갈 수 없었으나, 이제 죽어 가벼운 혼백이 되었는데도 바로 가서 만나지는 못하고, 아직도 더 기다릴 일 남아서, 가슴에 맺힌 애를 다 삭히고 썩이어 온전히 씻어 내고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사람. 이승에서 만났던 단 사흘의 인연으로 한세상을 다하여, 오직 그가 남긴 시간을 살고, 죽어서도 한 삼 년은 더 기다려야 갈 수 있는 이 사람의 그 무엇이 그토록 컸던 것일까. 청암부인은 이승을 벗어 놓고 저승으로 가면서, 이 어린 신랑 준의가 써서 보낸 달필의 혼서지를 신발로 만들어 신고 갔다.  時維孟春(시유맹춘) 尊體百福(존체백복) 僕之長子俊儀(복지장자준의) 年旣長成(연기장성) 未有沆麗伏蒙(미유항려복몽) 尊玆(존자) 許以(허이) 令愛(영애) 항室(항실) 玆有先人之禮..

혼불 5권 (52)

"핫다, 자네 참 무선 사람이네." "누구는 용해 빠져 갖꼬." "헤기는 나쁠 거이사 없겄제. 혼백 되야 합방을 해도 음양이 만났잉게 내우 합장헌 거이나 머 달를 것도 없고, 생각허기 나름일 거이여." "그렇당게요. 나는 재미가 나 죽겄소. 응골지게 그런 자리가 날라고 그렇게 애가 말르게 지달렀등게비여." "어차피 도적질?" 만동이는 백단이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여. 어차피 의지헐 빽다구 못 타고난 설움으로 한세상 스산허게 살다 간 인생이 원통해서, 좌청룡 우백호, 실허고 아늑헌 무릎 빽다구 속으로 들으가 자리잡고 싶었던 것이닝게, 헐라먼 큰 도적질허제, 기왕. 아조 그 음기끄장. 그러서요, 아부지 거그서 좋은 아들 하나 낳으시오. 실허고 좋은 놈으로, 양반 중의 양반이요, 천골 중의 천골인, 두 유골이..

혼불 5권 (51)

물론 누구네 집으로 굿을 하러 가거나, 어디서 문복하러 오는 사람들한테서도 사람들 소식은 가랑니야 서캐야 들을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비오리네 주막에 떨어지는 소식이 제일 빨랐다. 그리고 제일 정확했다. 그것은 여러 갈래 여러 골의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을 한자리에서 모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백단이는 고리배미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을 때도 유난스럽지 않을 만큼 비오리네 주막에 들러 비오리와 그 어미를 만나는 척하면서 요령껏 소문을 흡수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백단이보다는 만동이가 주막에는 이무러워. 틈만나면 그는 마치 일없이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러 온 것처럼 혼연스럽게 평상에 앉아 있곤 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생김새 곱상하고 자세에 태깔이 있어 반드롬..

혼불 5권 (50)

일부러 그렇게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리오. 여름 지나 가을 오면 서리 내리고 상로지사, 아비의 무덤에 찬 서리 시리게 덮이는 그 냉기가 흙 속으로 뻗치어 스미듯, 제 뼛속으로 끼치는 서슬은 만동이의 무릎을 더욱 여위게 하고 떨리게 하였다. 쑥대강이 같던 봉분의 잡초들이 누렇게 말라 시들어지며 하루아침에 짚북더미로 쓰러지다가 그나마 얼어붙어 저절로 죽어 버리는 겨울. 엄동설한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추위에 이빨이 부딪치는 것처럼 딱. 딱. 마주치게 시린 두 무릎을 베고. 이 허하고 하찮은 무릎을 베고. 어린 아들은 이토록 달고 깊게 자고 있는가. 아무 근심도 없이 모든 것을 아비에게 맡기고. 아부지도 이 귀남이맹이로 우주와 천지의 어린애로 돌아가서. 비..

혼불 5권 (49)

지달르시라고 간곡히 작별을 하고는, 자기가 공부했던 그 절을 찾어 또 질을 떠났단다. 여러 날을 걸려서 가고 가다가 어느 만큼에 다다라 잔등이를 넘는디, 아차, 여그가 바로 거그여, 그 동네. 어린 머이매한테 도시락 얻어먹고 즈그 아부지 묏자리 하나 써준 곳. 그 순간에 정신이 펀뜻 들었제. "그 아는 시방 잘 되얐능가 어쩠능가. 묘소나 한 번 들러 봐야겄다." 그런디 아 거그를 찾어가서 봉게 이놈의 묘소가 쑥대밭이 되야 부렀네. 풀이 엉크러져 우거져 부렀어. 봉분도 무너지고, 누가 언제 사람이 왔다 간 자취도 안 뵈이는, 임자 없는 무덤이 분명허드란 말이여. "참으로 괴이헌 일이로다. 내가 그때 공부헌 원리대로 자리를 잡었는디 이럴 리가 있능가. 설령 다소 빗나갔다 허드라도 이 지경에 이르다니. 이럴 ..

혼불 5권 (48)

"익어야제. 익어서 저절로 꼭지가 빠져야제. 설익은 재주에 코 깨지느 법이니라." 그런디도 야가 한 번 먹은 맘이라 들떠서 주저앉들 못허고 기어이 질을 떠났드란다. 금강산으로 들어갈 적에는 여나무 살 소년이었는디, 그새 구 년이나 세월이 흘러서 인자 의젓한 총객이 되야 갖꼬, 큰시님 밑에서 멩당 풍수 공부를 헌 사램이라 생김새도 점잖허니 보기 좋게 갖춰져서,절에서 떠날 때는 차림새 갠찮었는디, 강원도서 전라도 땅이라는 게 험허고 멍게로 걸어걸어 고향 찾어가는 질이 쉽들 안히여, 어쩌겄냐. 천리 질을 가는디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수중에 가진 돈도 없응께, 비렁비렁 빌어먹음서 밤에는 한뎃잠을 자고 낮에는 찌그러진 동냥치 다 된 꼴로 질을 걸었드란다. 그러다 하루는 어뜬 잔등이를 넘을라고 기진맥진 배가 고파..

혼불 5권 (47)

"아무나 죽어 갖꼬 멩당을 간당가?" "아 긍게 죽어도 심있는 양반 죽기를 지달를랑게 쉽들 안헝 거 아니요오. 송사리사 냇갈에 가먼 짝 깔렸지마는." "휘유우." "한숨 쉬지 마씨요. 부정타게 맘을 질게 묵어야제 그렇게 한숨으로 토막을 치면 쓰간디. 신명이 돌아보먼 방정맞다 그러시겄소." "저어그 대산면 한울리 이딘가는 시암 속에도 멩당이 있다고 허드마는. 그게 있을라면 그렁게도 있는 거인디." "헤기는." "아 그 왜 새비 자리 쓴 이얘기도 안 있소?" "그것도 그리여." 내외 마주앉아 한숨 섞어 하는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귀남이가, 꼭 만동이 어렸을 때 아비 홍술이를 올려다보고 묻던 모습으로 "새비 자리가 머이당가?" 고개를 반짝 치켜들며 물었다. "그렁 거이 있어." "있다고만 말고오." "이얘기..

혼불 5권 (46)

12. 아아, 무엇 하러 달은 저리 밝은가  어찌하랴. 쉬흔에 낳은 아들 만동이를 장가들여 다시 그 아들을 본 홍술이 일흔도 훨씬 넘은 머리털을 허이옇게 눕히고 숨이 진 지 벌써 여러 해. 삼 년 지나 사 년 지나 어느덧 세월로 흐르는데, 아직까지 마땅한 곳에 그 유골을 옮겨 드리지 못한 만동이는, 아비의 한도 한이지만, 제 한세상 앞에 놓인 천골의 천함과,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또 다시 할아비와 아비가 그러했듯이 무부의 길을 터덕터덕 걸어가야 할 어린 놈의 허깨비 같은 생애가 뼛골에 맺혀서도, 부디 어서 아비의 뼈다귀를 질척하고 검은 어둠 속에서 건져내 고실고실한 양지녘의 해 바른 흙 속에다 안장하고 싶은 안타까움에 늘 가슴이 찝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좀체로 쉽게 오지 않았다. 겨울 가고 ..

혼불 5권 (45)

당골네는 무부와는 달랐다. 무당은 물론 더 말할 것도 없이 천하디 천한 팔천 중에 하나여서, 그 신분으로만 보면 짐승 잡는 백정이나 한가지지만, 그러나 백정과도 다르고 또 함께 사는 서방인 무부와도 좀 다른 것은, 무업의 주를 맡고 있는 사람이 당골네 무당인지라, 그들은 만일에 용하다고 이름이 나면, 궁중에서도 부르고, 권세 높은 재상가나 돈 많은 장자의 집에서도 부르니. 때로는 덩을 타고, 때로는 다소곳이 따르는 대갓집 시비를 앞세워 거느리고 태깔 내어 걷는 품은, 얼핏 한다 하는 사대부의 부인 못지않아 보이기도 하였다. 그만한 곳에 드나드는 당골네라면 복채도 상당하여. 보패도 화려하고 비단 명주 피륙도 색색깔이라, 솜씨 좋은 집에 삯을 주어 맡기면 날아가는 바느질은 꿰맨 자국 흔적도 없게 지어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