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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9권(14)

거미줄에 걸리었던 나비가 거미줄에서 떨어져서 청산으로 날아가는 듯, 조롱에 갇히었던 새가 조롱을 벗어나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듯 단천령이 눈뜨고 꾸는 꿈에 나비 되에 너푼너푼 날고 새가 되어 훨훨 날다가 나귀가 넓은 도랑을 건너뛸 때 하마 떨어질 뻔하고 꿈이 깨어졌다. 댕갈댕갈 지껄이는 계집들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적굴에서부터 동행하는 송도 기생 둘이 말들을 옆으로 타고 뒤에 따라오는데, 지껄이는 것은 자기 이야긴 듯 양반 율객이란 말이 귓결에 들리었다. 율객 소리가 귀에는 거치나 마음에 까지는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그보다 더한 소리를 한대도 시들스러웠다. 단천령 눈에 좌우 산천이 처음 대하는 것같이 새로워서 산보고 좋아하고 물 보고 좋하하며 송도부중까지 들어왔다. 송도를 지나면 점심참이 없 으나 해가 ..

임꺽정 9권 (13)

이런 불호광경이 나지 않두룩 조심하십시오. 저녁 전에 잠깐 뵙구 말씀을 해 드리 려구 한 것이 틈이 없어 못 갔습니다.” 서림이의 소곤소곤 지껄이는 말이 단천 령 귀에는 우뢰같이 울리었다. 단천령이 송구한 마음을 억지로 진정하고 한참 생각하고 있다가 “여러 사람이 모두 피리를 듣구 싶어하우?” 하고 물었다. “ 그러먼요. 피리를 들으려구 밖에 졸개들두 많이 모였습니다.” “여러 사람 낙망 안 되게 한 곡조 불어볼까. 그러구 이왕 불 바엔 청하기를 기다릴 것두 없지.” “지금 부시렵니까?” “가야고가 끝나거든.” “가야고는 그만 두라지요. 피리 가 어디 있습니까?” “내 창의를 이리 가져오라시우. 소매에 피리가 들었소.” 단천령이 서림이 꾀에 떨어져서 한 곡조 불려고 마음을 먹고 창의 소매에서 학 경골 피..

임꺽정 9권 (12)

서림이가 단천령에게로 가까이 나와 앉아서 이런 말 저런 말 붙이다가 “우 리 청석골 자랑을 좀 들어보실랍니까?” 하고 말한 뒤 꺽정이와 길막봉이가 호 도와 잣을 엄지 식지 두 손가락으로 깨기 내기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이봉학이와 배돌석이가 을묘년에 전공 세운 것을 이야기하고 박유복이가 원통하게 죽은 아 버지의 원수 갚은 것을 이야기하고 황천왕동이가 여색에 근엄한 덕으로 김산이 칼에 죽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여 단천령의 귀를 흠씬 소승기어 놓고 곽오주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곽오주가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 때 주인의 아들이 과부 하나를 첩 삼으려고 데려왔다가 연이 없어 같이 살지 못하고 곽오주를 내준 것 과 그 과부가 곽오주의 아들 하나를 나 놓고 산후발이로 죽어서 곽오주가 갓난 애를 안고 동네로 돌아다니며 ..

임꺽정 9권 (11)

“옳지, 우리 선생님이 출가할 때 삭발해 드린 중이 그저 살았군.” “대장의 선생 님이 분신술도 할 줄 아시구 호풍환우두 할 줄 아셨소?” “난 모르우. 난 못봤 으니까.”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은 구경 잡술꾼인데 조정암 선생 같은 성인 군자가 잡술꾼을 친구루 사귀셨을 리가 없을 듯해서 나두 그런 말은 곧이듣지 않았소.” “우리 선생님이 잡술은 아셨는지 모르지만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무 엇에구 막힐 데가 없으셨소. 그러구 앞일을 잘 아셨소.” “대장두 앞일을 잘 아 시우?” “내가 앞일을 잘 알면 도둑눔이 됐겠소?” 꺽정이가 껄껄 웃은 다음에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내게 하신 유서가 있는데 그 유서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으니 한번 보실라우?” 하고 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더라두 한..

임꺽정 9권 (10)

이날 청석골 두령 중의 황천왕동이가 탑고개를 나오게 되었는데 한온이가 심 심한데 같이 가겠다고 꺽정이에게 말하고 황천왕동이를 따라나왔었다. 홀아비로 지내던 탑고개 주막 주인이 도망꾼이 젊은 계집 하나를 갓 얻었는데 얼굴이 해반주그레하다고 하여 한온이는 주막 계집을 구경하려고 따라나온 것이 었다. 황천왕동이와 한온이가 주막방에 들어앉아서 계집을 데리고 희영수도 하 고 술도 먹었다. 해가 승석때가 다 되었을 때 두목 하나가 방 밖에 와서 "해가 다 져 갑니다. 들어가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품하여 황천왕동이가 두목더러 "다 들 게 있느냐?" 하고 물으니 "네 다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 두목이 대답하였다. "아무리나 고만 들어가자. 오늘 하루는 아주 빈탕이로구나." 하고 황천왕동이가 먼저 방 밖에 나서서 방..

임꺽정 9권 (9)

“누가 기별 않는다나 아이년을 보내자꾸나. ” “아주 보내고 방으로 들어갑시다.” 초향이의 우김 대로 계집아이년을 단천령 하처에 보내고 비로소 모녀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단천령이 기별하러 간 아이년과 같이 왔다. 초향이가 단천령을 보고 부사와 문답한 말을 저저히 다 옮기고 끝으로 “사또께서 수이 한번 만나보입자고 말씀을 여쭈라십디다. ” 하고 말하였다. “부사가 나를 찾아나온다든가 나더러 관가루 들어오라든가? ” “그런 말씀 저런 말씀 없이 그저 만나 보입자고만 말씀하십디다. ” “자네가 잡혀 갇히구 못 나오게 되었 더면 부사를 찾아봤을는지두 모르지만 인제는 부사를 찾아볼 일이 없네. ” 옆 에서 듣던 초향이의 어미가 입을 실쭉하고 “영변부사를 찾아보면 종반 지체가 떨어지시우? ” 하고 말참례하여 단천..

임꺽정 9권 (8)

태천현감은 새로 도임하여 절도사에게 현신하러 온 길이요, 운산군수는 군오에 관한 중요한 일을 절도사에게 취품하러 온 길인데 우연히 한때 와서 모이게 된 것이 었다. 영변부사가 운산군수와 태천현감을 위하여 운주루에서 자그마하게 잔치를 하는데 주식은 전주국에서 진배하고 기악은 전례서에서 지휘하였다. 운산군수가 기악을 듣다가 “초향이의 가야고는 사또께서 두구 혼자만 들으십니까? ” 하고 웃음의 말로 초향이의 가야금 듣기를 청하여 부사가 행수 기생을 불러서 “초향 이는 어째 안 왔느냐. 그년 또 병탈이냐? ” 하고 물었다. 행수 기생은 초향이를 못 잡아먹어 뭄살하는 계집이라 “그년이 어떤 서울 양반을 따라서 향산으로 유 산하러 가는데 말미도 받지 않고 갔답니다. ” 고 초향이의 뒤를 발기집어 내었 다. “무엇이..

임꺽정 9권 (7)

초향이가 처음에 향산 구경 올 것을 작정할 때 저의 삼종조가 향산 중으로 당 호가 수월당인데, 수월당 노장스님이라고 하면 향산 안에서 모를 리 없다고 하 더니 단천령이 보현사에서 젊은 중 하나에게 물어본즉 과연 잘 알아서 그 노장 이 십여 년전에는 큰절 주지로 있었으나 지금은 큰절의 번뇨한 것을 피하여 내 원암에 가서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향산에 들어오던 이튿날 단천령이 초향이와 같이 내원암에 와서 그 노장을 만나보니 나이 근 팔십 된 늙은이가 근력이 정정 하여 기거동작이 젊은 사람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초향이는 내원암에 머물러 두고 단천령은 그 노장의 상좌 둘에서 큰 상좌를 지로승삼아 데리고 고적 구경 을 나섰다. 쓰러져 가는 암자와 다 쓰러진 암자가 도처에 눈에 뜨이어서 단천령 이 상좌중더러 “암..

임꺽정 9권 (6)

“약주 대접할라느냐?” “약주는 가서 받아오지만 안주를 어떻게 하느냐?” 하고 공론하는 말을 단천령이 방에서 듣고 “여보게 초향이, 술을 줄 라거든 안주는 푸새김치라두 좋으니 따루 장만하지 말게.” 하고 말하였다. 초향 이가 단천령 옆에 와 붙어앉아서 공연히 소리내서 웃기도 하고 정답게 가만가만 이야기도 하는 중에 초향이의 어미가 술상을 차려 들여보냈는데 술은 소주요, 안주는 배추 겉절이와 마늘장아찌뿐이었다. 단천령이 소주를 즐기지 아니하나 권에 못 이겨서 두어 잔 마신 뒤에 초향이더러 “자네두 한잔 먹게.” 하고 초 향이 손에 든 주전자를 달라고 하니 “저는 술을 접구도 못합니다.” 하고 초향 이는 주전자를 내놓지 아니하였다. “술이란 운에 먹는 음식인데 나 혼자 무슨 맛인가. 나두 고만 먹겠네.” “..

임꺽정 9권 (5)

단천령이 훌륭한 창의를 벗고 꾀죄죄한 두루마기를 입고 통량갓과 탕건과 망건을 벗고 탈망한 헌 제량갓만 쓰니 의복이 날개란 말이 빈말이 아니어서 청수한 얼굴까지 갑자기 틀려 보이었다. 단천령이 구지레하게 차리고 하인도 안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데 주인은 속으로 ‘저 양반이 어디 가서 암행어사질을 할라나.’ 하고 생각하였다. 단천령이 하처에서 나설 때 햇발 이 다 빠지지 않았었는데, 동문안 초향이의 집을 물어서 찾아오는 동안에 벌써 땅거미 다 되어서 저녁 연기 잠긴 속에 달빛이 나기 시작하였다. 싸리문 밖에서 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안방에는 불이 켜 있으나, 불 있는 안방과 불 없는 건넌 방이 다같이 조용하여 마치 사람 없는 집과 같았다. 주인을 서너 번이나 연거푸 부른 뒤에 ”순아, 밖에 누가 오셨나 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