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김애란]]
<달려라 아비> <나는 편의점에 간다> <하루의 축>
<달려라, 아비>
-김애란 作-
***동우***
2015.09.29. 04:55
은비님이 사랑하는 작가, 김애란(金愛蘭).
1980년생이니 내 딸보다 훨씬 젊구나.
김애란을 검색합니다.
<“출판계와 저널리즘에 이르는 오늘날 문단의 불문율 중 하나는 ‘김애란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진보적 리얼리스트들에서부터 전위적 모더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젠 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계간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최근 문학현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을 준 신인작가로(…) 박민규와 김애란을 꼽을 수 있다”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계간 ‘창비’ 2006년 봄호)>
소설가 김애란에 대한 상찬(賞讚)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2005년에는 김애란이 창작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순원문학상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몇몇 심사위원이 “규정을 바꾸라”며 반기를 들고 나서기도 했답니다.
김애란은 단편 몇 편만으로도 검증이 끝난 작가라는 게 당시 의견이었다고 하는군요.
이처럼 극찬을 받는 작가 김애란을 나는 근년(近年)에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애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하고, 제1회 대산대학생문학상 소설부문 당선(2003년)을 거쳐, 2005년 11월 단편 ‘달려라, 아비’로 역대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출간한 그녀의 첫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는 한 달 만에 판매부수 1만 부를 넘기면서 문단은 물론, 새로운 소설에 목마른 독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렇다고 오로지 칭찬 일색만은 아니지만.
<“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개그적 재능이다. 자기 삶을 통일시켜줄 규범이 없는 세대니까, 개그처럼 즉흥과 되풀이가 많은 것이다”> -평론가 유종호-
<“상황 속에서 어떤 말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말 한마디를 표현하기 위해 상황을 만든다. 장면만 제시하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다”> -소설가 이청준-
<어찌되었거나 그녀의 출현은 ‘한국 소설의 샛별’이라는 평가가 늘 뒤따르고 있다. 질질 끄는 문체와 화려한 수식어, 한 말 또 하고 또 하기를 거듭하는, 지극히 관념적인 기존의 여성 작가들 문장에 질린 독자들에게 김애란의 짧은 호흡, 수미상응의 작법, 군더더기 없는 경쾌한 문장, 세상을 미워하지 않는 쿨한 문장은 신선함과 함께 우리 문단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여 놓았다....>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김애란 작품에서 찾는 ‘소설에의 희망’은 중성(中性)성과 우리 시대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다. 우선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주어지는 특별한 상황은 없으며, 때문에 슬프거나 노엽거나 좌절하거나 그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소설의 명랑성을 만드는 원천이라는 평가다. 이 점이 기존 여성 작가들과의 구별점이기도 하다.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여성보다는 인간에 주력하고자 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그녀는 많은 작품에서 아버지를 등장시키는데, 봉건사회와 분단시대, 그리고 산업화라는 시대의 질곡 속에서 우리 문학에 등장하는 아버지와는 전혀 딴판이다. ‘달동네 맨 꼭대기에서 오줌 마려운 듯 벌게진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가다 연탄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장발 휘날리며 콘돔을 사러’ 가는 남자가 김애란 소설 속 ‘아비’의 초상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우리 손자 세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던 차에 그 세대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 반가웠다. 김애란 소설에서 ‘아비’들은 전통적 아버지에 비하면 아버지 같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의 소설에서 젊은이들은 ‘아비’에게 버림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아비’를 버렸다고 자부하니, 새롭고 재미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손정수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최근 격주간 ‘기획회의’ 195호에서 “발단부터 결말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이 하나의 줄기로 매끈하게 꿰어져 있는 전통적인 단편소설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답지 못한 것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지만 바로 이 점이야말로 김애란의 소설이 기존의 낯익은 소설들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뚜렷한 토대”라고 평한다....>
<한편 김애란은 “지각이 없는 작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글을 쓸 때 나한테 필요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뿐”이라며 “젊으니까 뭔가 다르고 새롭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부러 ‘비스듬히’ 보지 않고 ‘오래, 빤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고 자신의 소설관을 나타냈다...>
윗글들.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개그적 재능... 자기 삶을 통일시켜줄 규범이 없는 세대니까, 개그처럼 즉흥과 되풀이가 많은 것 따위.
<상황 속에서 어떤 말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말 한마디를 표현하기 위해 상황을 만든다. 장면만 제시하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같은 소설...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김애란 작품에서 찾는 ‘소설에의 희망’은 중성(中性)성과 우리 시대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조명... 우선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주어지는 특별한 상황은 없으며, 때문에 슬프거나 노엽거나 좌절하거나 그 처리과정도 중성적... 이 중성성이 소설의 명랑성을 만드는 원천이라는 평가...이 점이 기존 여성 작가들과의 구별점...우리 손자 세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던 차에 그 세대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 반가웠다... 김애란 소설에서 ‘아비’들은 전통적 아버지에 비하면 아버지 같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의 소설에서 젊은이들은 ‘아비’에게 버림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아비’를 버렸다고 자부하니, 새롭고 재미있다...>는 류(類)의 평가들...
내 느낀바 김애란의 소설은.
개그적이지 않았고 말 한마디를 표현하기 위해 상황을 만들지 않았고 중성적이지 않고 아비를 버렸다고 자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을 모르는 몸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반지하 방에서 혼자 낳았다. 여름날이었고,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 빳빳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윗도리만 입은 채 방 안에서 버둥거리던 어머니는 잡을손이 없어 가위를 쥐었다. 창밖으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는 가위로 방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는 가위로 자기 숨을 끊는 대신 내 탯줄을 잘라주었다.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나는, 갑자기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적 속에서 귀가 먹는 줄 알았다.
태어나 처음 본 빛은 딱 창문 크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우리들 바깥에 존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느끼건대, 소설의 서두를 여는, 함축적 의식(意識)의 알레고리에는 중성이 아니라 짙은 여성성이 있었습니다.
최초의 존재 인식에 대한 25살(달려라 아비 발표시점)짜리 여자.
씨앗보다 작은 자궁.
태내(胎內)의 양수 속으로부터 안(內)은 확장됩니다.
막 세상 밖으로 나온 소설 속 ‘나’, 갑자기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적 속에서 귀가 먹는 줄 알았습니다.
반 지하(地下) 방,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은 딱 창문만한 크기에서 들어옵니다.
행인의 다리가 보인다. 밖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재하는 아버지.
어머니로 부터 농담처럼 인식하게 될 뿐인 아버지.
그 아버지는 나약하고 볼품없는, 가부장적 권위와 위엄같은건 애시당초 찾아볼수 없는 아버지입니다.
반지하방의 혈거동족으로 어머니는 언제나 곁에 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추상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달리는 것은 어쩌면 정자(精子)가 타고난 유전적 숙명입니다.
그에 반하여 난자(卵子)의 숙명은 안(內)이고 받음이고 다소곳이고 기다림이지요.
존재가 인식하는 여성 또한 낯설지만 숙명적인 것입니다.
아아, 그런가요?
아득한 옛날, 원시 수프(primeval soup)위를 둥둥 떠다닐 적의 단백질에 자웅(雌雄)의 구분이 있었을까요.
자신의 성(性,gender)은 태어나는 순간 의식하는걸까요.
의식에 여성이 깃들기 전에도 여자인가요. 신체에 갇힌 의식이 존재의 원형질인가요.
<그때 아버지가 어디 계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어딘가에 계셨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너무 늦게 오거나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펄떡이는 심장을 맞댄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 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나는 외로워졌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고, 햇빛은 헤어진 애인이 보내온 예의 바른 편지처럼 여전히 저쪽 방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예의 바름, 그것은 태어나 내가 세상에 대해 느낀 최초의 불쾌(不快)였다. 나는 주머니가 없어 주먹을 쥐었다.>
아비를 버렸다니 전혀.
이 소설, 내게는 짙은 부망(父望)이 읽힙니다.
아비 부재(不在)로 인한 남성성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 페니스 동경이 전해집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셨는지'(‘있었는지’가 아니라) 기억나지 않지만 항상 어딘가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김애란에게서 여성의 생물학적 구조, 자궁에 대한 자의식은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신체에 갇힌 의식의 해방을 욕구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성에 대한 모독감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공허가 있습니다.
상처도 만져집니다.
내 느끼건대 ‘달려라, 아비’는 어쩌면 편모슬하의 슬픔이고 혹은 자기연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고 역시 아버지에 대한 연민입니다.
달리는 정자 일반에 대한, 어쩌면 숫컷의 자본사회 속에서의 역할에 대한...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 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내 딸에게 나, 아비는 어떤 이미지일까.
내 여동생에게 부재하였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소설, 그런걸 생각게 합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김애란 作-
***동우***
2015.06.19 09:27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차창(車窓) 안의 나는 정상속도일터인데 창밖의 풍경은 가속(加速)붙은 파노라마입니다.
창 밖으로 기원을 알수없는 전설처럼, 시치미를 떼고 앉은 남편의 애첩처럼, 통조림 속 봉인된 시간처럼, 새끈한 것들이 휙휙 지나갑니다.
피시방 게임방 비디오방.(이런 곳 내가 들러본 곳 몇군데나 될려나.)
간혹 여일(如一)한 것들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 낯선 것들입니다.
흑백 모니터에 DOS 명령어를 자판으로 쳐넣던게 고작 20년도 되지 않은것 같은데 이제 손바닥 안에서 그 몇만배의 요지경을 가지고 노는 세상이니.
심야에 어쩌다 이용하는(대체로 비싸더군요) 편의점도 내게는 대체로 낯선 곳입니다.
듣자니 편의점은 진화를 거듭하여 이제 식사 세납 택배등 그야말로 도시민 일상의 편의를 거의 커버한다지요.
도시의 변방을 비비적거리는 젊은이들의 정서를 내 잘 알수는 없지만, 때로 그들의 외로움이 킁킁 맡아집니다.
스스로 Personal Space를 만들어 거기 잠수한채 필사적으로 타인과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려는 오다쿠..
히키코모리적 늙은 의식(意識)도 이렇게 Window를 열어 숨을 쉬어야 하거늘, 그들의 젊은 골방의 환기는 늙은이에 비할바 없이 절실할듯 싶습니다.
그리고 디지털세상, 숨어살기는 가당치도 않아요.
남에게 조금도 읽히지 않을 자신(自信), 아무도 없을겁니다.
들락날락 인터넷, 곳곳에서 엿보는 카메라, 단말기에 긁어대는 카드.. 하루에도 몇백번 세상에다 자신을 까발려 보여주고 있는 세상인데.
더불어 아무리 눈막고 귀막고 있더라도 부지불식간 다른 사람의 숨겨진 정보를 알게도 되지요.
어쩌면 그것이 소통과 관계의 한 방법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애란은 디지털적 간격의 유지는 피차 베푸는 거대한 관대(寬大)라고 중얼거립니다.
슬픈 표정으로.
편의점에서 일상의 모든 것이 충족되어 결핍이 없습니다.
그 결핍 없는 곳에서 목 놓아 우는 자는 인간의 결핍을 우는 자이겠지요.
청년이 복권을 훔치는 장면은 숨겨진 카메라에 찍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도둑청년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여고생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수그리고 쓰러진 여학생의 뒤집어져 올라간 치마를 다소곳이 내려주었습니다.
섹스의 밀착이 아니더라도 체취가 맡아지는 인간끼리의 간격.
추운날 고슴도치들은 서로 몸을 붙인채 한군데 모여 있었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서로의 몸을 찔러댔습니다.
앗 따거 하면서 화들짝 서로 떨어집니다.
추워서 서로 몸을 붙이면 따겁고 떨어지면 추웠습니다.
그러다 서로를 찌르지 않으면서 추위를 견딜수 있는 최소한의 간격을 찾아 냈습니다.
딱 그만큼의 간격.
<하루의 축>
-김애란 作-
***동우***
2015.09.21. 05:11
하루의 축
김애란, 이 작가의 재능이 가볍다거나 감각적인 것으로만 운위(云謂)하려 하지 말라.
이 소설을 읽어보면, 그녀의 역량을 결코 폄훼할 수 없을 것이다.
30대 초반의 작가가 늙은 여인의 하루를 이리도 정치(精緻)하게 묘파(描破)하고 있는 內攻인데...
작가는 자신이 만든 인물에 빙의된 무당이다.
얼마나 곰삭도록 작가는 주인공 기옥이라는 인물을 품고 있었을까.
인천국제공항 청소노동자 기옥씨의 연휴의 아침.
메마른 형광등 아래로 한꺼번에 드러나는 기옥씨의 남루와 수치.
늙은 내게도 몹시나 스산하다.
<창밖에서 익숙한 기계음이 났다. 용역업체의 오토바이가 한겨울 사냥 나온 개처럼 가쁜 입김을 내뿜으며 가르랑거리는 소리였다. 기옥 씨는 커튼을 걷고 방 안을 환기시켰다. 골목에서 한 노인이 오토바이 뒤 칸에 쓰레기봉투를 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음식물종량제 쓰레기봉투에서 새어 나온 구정물 냄새가 청량한 새벽 공기를 타고 기옥 씨네 집까지 들어왔다. 간밤, 잠을 설친 도시가 찌뿌둥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내는 구취(口臭)였다.>
내일은 추석명절.
도회의 끄트머리에 빌붙어 명절을 맞는 오십줄 여인의 심사.
내게 몹시 절절하다.
<자신이 이 세상의 풍습에 속하고, 풍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서였다. 기옥 씨에게는 요즘 그런 게 필요했다. 때가 되면 중년들이 절로 찾게 되는 글루코사민이나 감마놀레산, 혹은 오메가3처럼… 몸이 먼저 알아채 몸이 나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설에는 떡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 줘야 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잘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인사하듯 말이다. 기옥 씨는 그걸 '말'이 아닌 '감'으로 알았다. 그래서 오늘 상가와 주택가를 돌며 대출 전단지를 돌리는 대신, 방을 닦고 장을 보고 떡쌀을 불린 거였다. 기옥 씨는 해마다 해오던 걸 올해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웃에 음식 냄새를 풍기고 싶었다.>
영종도 허허벌판에 외따로 핀 현대문명의 꽃, 인천국제공항.
멀리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구조물인가.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靜的)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해운대 신도시에 즐비한 마천루를 원경(遠景)으로 보면서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을 나도 느낀다.
부언하여.
수상한 불안감 또한...
인천국제공항의 시스템은 거창하고 완벽할 것이다.
비행기의 이착륙, 보안, 편의, 안전, 위락까지.. 한치의 오차없는 거대한 매커니즘에 의하여 돌아가야 할 것이다.
거기에 딱딱 들어맞도록 수많은 부품(사람, 장치)들은 헉헉거리며 그 역동적인 시스템에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5만장의 유리로 뒤덮인 터미널, 연휴를 맞아 45만 명에 이르는 사람의 해외 나들이, 청소노동자가 700명이라니...>
때로 씨발씨발 하면서.
시스템의 거대한 축에 비하면 기옥씨의 저 남루한 일상의 축은 얼마나 가녀린 것인지.
축(shaft)의 RPM(회전수)은 일정치도 않고 노상 삐걱거려 언제 그 가냘픈 동작을 멈출는지.
머리 한복판에 운동장 같은 원형 탈모를 들켰으니 이제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기옥씨 하루의 축은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온 먼지같은 파편(破片)이다.
전에 정치인 손학규는 '저녁있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저녁있는 삶.
생각건대 그것은 하루가 필사적이지 않아도 좋을 양태의 삶을 말함일 것이다.
부실한 축에 기대어 필사적으로 하후 하루를 떼워나가는 그런 삶 말고, 견고한 축에 근거한 하루를 가진 자의 삶을 말이다.
일주일 후면 한가위 명절.
축이 없는 삶은 또한 고향없는 백성들의 삶이다.
생각사록, 고향이란 하나의 근거는 얼마나 튼실한 구실의 축(軸)인가.
고향잃어 갈 곳 없는 사람들.
갈 곳을 가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의 노동자들이 어쩌면 부럽지 않으랴.
저 거대한 공항의 풍경과 축(軸)이 부실한 개별의 실존.
극대비의 저 간극이 자아내는 이 소설의 정조(情調)가 내게 몹시 아리다.
기옥씨 무에 그리 대단한 것 바라는가.
아주 자그마한 안정, 좀 더 튼실한 하루의 축.
그것 뿐이거늘.
공항청소부자리 쫓겨나지 않고, 명절날 음식 냄새 좀 풍기고, 감옥의 아들 엄마가 오려주는 재미있는 신문기사 즐거운 척하여 주고, '엄마, 사식 좀' 이라는 외마디 한글자 말미에 '엄마. 사랑해' 한글자 덧붙여 주는 그것.. 머리카락도 더 빠지지 않으련만...
그래도 기옥씨는 오늘을 기도한다.
그래, 좀 슬프고 괴로울지라도 이런 것들이 불행이 아니기를.
그저 일상의 작은 불편거리에 지나지 않기를.
아, 소소한 안녕이여.
소소한 안녕, 기옥씨가 꿈꾸는 것은 그것 뿐이다.
하루의 축(軸)
묻노니, 그대의 하루의 축은 얼마나 견실(堅實)한가.
-독서 리뷰-
[[김애란]]
<종이 물고기> <두근두근 내 인생>
<종이 물고기>
-김애란 作-
***동우***
2015.09.17 05:05
김애란의 '종이 물고기'
종이 물고기는 ‘포스트잇’을 빗댄 하나의 메타포일테지요.
작가에게 있어 자신의 작품을 객체로 하는.
자본이나 가업(家業)으로 과학이나 기술로 작가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결정했다.>
작가는 기질적으로 숙명적인 존재입니다.
작가 김애란은 자신의 문학에 대한 숙명적 동인(動因)과 방법론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포스트잇'에다 글쓰기.
기발하고 영리하고 은유적입니다.
원고지 글쓰기.
좁다란 칸칸에다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 가두는, 하드웨어의 강한 접착성.
그러나 컴퓨터 글쓰기.
노련한 손놀림으로 자판 다다다닥 두드려 문장을 조합하다 기분에 안들면 주욱 드래그하여 휘리릭 날려버리는, 휘발성 강한 가벼움.
약한 접착력으로 붙였다가 손쉽게 제거할수 있는 포스트잇(3M 社의 세계적인 히트상품이라지요.)은 이를테면 원고지와 모니터의 중간쯤이랄까요.
천착과 방기, 집착과 포기.
주인공은 벽면(壁面)이라는 폴더(디렉토리)에다가 종이쪽지라는 파일들을 한장한장씩 붙여나갑니다.
전후좌우 천장으로 나뉘어진 폴더에다가, 자아(自我)거나 기억이거나 얻어읽거나 얻어배운 역사나 지식이거나 감각하는 세상이거나 떠오르는 아이디어거나 우러나오는 사유라거나 주어들은 풍월이거나의 파편들을 랜덤하게 조각조각 붙이는 것입니다.
물고기의 표피를 감싸고 있는 비늘처럼.
뼈대와 근육과 살갗과 비늘의 생체구조학적 유기성(有機的)은 모르겠으나 포스트잇 끼리는 어떤 유기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저희들 간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가깝거나 멀거나..
그러나 어느 것은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가쁘게, 팔딱팔딱 뛰어 물고기를 헤업치게 하는 것입니다.
포스트잇은 노트가 아닙니다.
공책장 위에 나열된 앞과 뒤의 문장이 맥락을 이루듯 하는게 아닙니다.
벽면에는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조각글들이 각자 하나의 파일로서 붙어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포스트잇은 디지털 파일로 존재하는 추상성의 소프트웨어가 아닙니다.
종이에 씌여진 글자, 하드웨어적으로 존재하는 엄연한 실체입니다.
그 이질적인 것들은 서로 충돌하고 서로 혼화하고 서로 화해합니다.(이런걸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해도 되는겐지)
때로 스파크가 일어나고 때로 수프가 되고 때로 비빔밥도 됩니다.
그 충돌과 조화를 우연성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포스트잇마다 작가의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모두 진실입니다. 거짓도 위악도 위장도 한숨도 농담도 변명도.
모두 진실한 작가와 세상의 고통과 투쟁과 치유와 욕망과 배설과 절망 입니다.
포스트잇이 비늘이 된 물고기는 날렵합니다.
그 날렵함 속에 있을건 다 있습니다.
나처럼 구닥다리 폼잡기의 무거움이 없습니다만, 인간의 실존에 노청(老靑)의 다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노털들, 사유가 무거운척 해봐야 무얼 하나 이룬 것이, 무어 한줌 도통한게 있습디까? 어디.
젊은 김애란은 늙은 내게 새로운 글쓰기의 전범을 한수 가르쳐 줍니다그려.
***eunbee***
2015.09.18 23:46
김애란 님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처음 읽나 보아요. 기억에 없으니 처음 읽는 것.ㅎ
아침에 그 산뜻한 소설을 읽었어요. 나도 25시 와 세븐일레븐은 가끔 이용한답니다.
그리고 어제 읽은 <종이 물고기> 생뚱맞게도 영화 <그랑 불루>에서 푸른 물이 천정까지 철렁철렁 넘치는 착각에 빠졌던 한 순간의 아찔했던 기억과 오버랩 되는 걸 느꼈지요.
온통 벽과 천정까지 포스트잇이 나부끼는 광경을 나는 또 그렇게...
밤길 걷다가 오늘도 은행나무 아래 나무둥치를 중심으로 제법 되는 은행알이 떨어진 것을 보는 순간
또... 김애란의 단편적인 문장이 기록된 포스트잇이 나풀대는 방을 떠올렸구요.
가을 어느날 노오랗게 은행잎 나부끼면 다시 생각날 거예요. 결국은 낙엽처럼 무너져 내린 포스트잇의 그 방
그 노오란 이파리들을..(포스트잇의 색깔이 노랗다고 했던가요? 어제 읽엇으니 벌써 잊었고, 그 단어를 찾기엔 나는 너무나도 늘뱅이에 게으름뱅이거든요. ㅠㅠ 내 머릿속의 포스트잇 색깔은 노오랗거든요.ㅎ)
김애란의 소설, 참 매력적이지요?
그리고 동우님의 글들은 언제나, 항상, 늘~ 작가의 소설만큼, 어떤것은 작가보다 더 더 더 멋져요.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에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정말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김애란 님의 소설,
참 매력있어요.
동우님,
가을밤이 깊어가네요.
감기 뚝!!하시고, 코~ 편한 잠 되세요.
***동우***
2015.09.19 06:39
은비님.
끊기전 담배 사러나 가끔 갔을까, 난 편의점을 별로 이용하지 않아요. (어쩌다 늦은 밤 맥주 사러나 들를까..)
좀 비싸기도 하려니와 우리집 바로 앞에 마트가 있으니.
종이물고기에 그랑블루가 오버랩 되는 은비님은 역시.
바로 그 생뚱맞은 상상의 결합이 이 소설 또 하나의 알레고리일듯 합니다.
내 이미지도 그래요, 포스트잇의 主色은 노란색...
벽과 천장에 비늘처럼 붙어 나부끼는 노란 포스트잇...
은행잎의 노란 이파리들...
가을...
감기는 소강..
어제 술먹어 좀 눌러 주었는데, 언제 부시시 일어날지는...ㅎ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作-
***동우***
2015.09.25 04:39
김애란의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4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난 아직 못보았는데 이 소설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을겁니다.
송혜교, 강동원 주연의.
내일부터 추석연휴,
1회분을 좀 길게 끊었습니다만 연휴기간중 잘 씌어진 장편소설 한권 읽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함께 읽어요.
***동우***
2015.09.26 05:21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
늙은 모습으로 태어나 거꾸로 나이를 먹는 '벤자민 버튼'(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 있는가 하면 어른들의 추악한 세계를 혐오하여 3살로부터 성장을 멈추어버린 '오스카'(양철북)라는 애늙은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천성 조로증'은 현실에 존재하는 희귀병이라지요.
여든살 몸의 열일곱 소년, 늙은아이 아름이.
그의 부모 한대수와 최미라.
시간의 슬픔.
관계의 두근거림.
존재가 누군가의 슬픔이 된다는건 사랑이랍니다.
내일은 추석 명절.
벗님들. 모두 해피 한가위.
***동우***
2015.09.27 04:52
한가위 명절입니다.
오늘 밤, 하늘에는 수퍼 문이 뜬다지요.
검색.
달이 지구와 상거한 거리가 약 38만 킬로미터랍니다.
지구 주위를 아주 적은 곡률의 타원형으로 공전하는 달이 오늘 밤 가장 근지점에 위치하여 평소보다 약 2만3천 킬로미터 정도 가까이 위치한다는군요.
한반도에서 파리까지가 대략 1만 킬로미터라니까, 수퍼문일때에는 그 35배 정도의 거리.
달은 생각보다 먼곳에 있지 않군요. (宇宙 운운 하기에는 말입니다)
암스트롱 이후 계수나무와 토끼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달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샤먼의 별입니다.
생각건대, 우연성의 존재이므로 우리는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뉘 마음이나 오늘 수퍼문을 우러러 기원할테지요.
존재함에, 관계함에 어떤 필연의 팔자성(八字性.ㅎ)이 있을런지 알수 없으므로.
관계를 아름답게, 목숨을 청결하게 하여 줍시사...
이 소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한대수.
그 이름 아름답군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최미라
그 이름 아름답군요
벗들이여, 모쪼록 둥글고 둥근 한가위 명절 쇠소서.
***동우***
2015.09.28 04:26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소설적으로는 그다지 견고해 뵈지 않지만 따뜻한 소설입니다.
생명은, 관계는, 늘 설레입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빨리 자라 어른이 되고 싶나요? 다시 젊어지고 싶나요?
두근두근 두근두근
텅 빈 노화(老化)더라도 허황한 바람(望)이더라도, 목숨의 하루하루는 두근두근.
길지 않은 인생, 언제나 두근두근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자식을 낳는 것이라네요.
일흔살 모습의 아들이 서른넷 젊은 부모에게 말합니다
"가끔 궁금했어요. 엄마랑 아빠랑.. 내가 병들어서 무서운 게 아니라, 그런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봐 두려우시진 않았을까?"
나잇값 어설픈 젊은 아빠가 늙은 자식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거 흔치 않은 일이니까...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라."
어린 왕자가 묻습니다.
길들인다는게 뭐지?
여우가 대답합니다.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거야.
관계는 길이 든다는 것.
장미꽃이 소중한 것은 그 꽃이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지어야 하는 거야.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어린 왕자->
생명은 스스로의 탄생의지(誕生意志)로 이 세상에 태어난게 아닙니다.
어느 암컷과 수컷의 욕(慾)과 망(望)으로 발아(發芽)된, 난자와 정자의 지극히 우연적인 결합의 산물입니다.
그건 전혀 경험이나 기억의 영역 밖 입니다.
그리고 삶 속의 무릇 관계 또한 무슨 필연이 있어 맺어졌겠어요?
그건 전혀 시공적(時空的) 우연의 소산입니다.
그러나 관계는 관계에게 묻습니다.
누구세요? 당신은 나의 누구십니까?
관계는 관계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이름이고 싶습니다.
어미 아비 새끼들, 그리고 관계 관계들이여.
슬픔이며 기쁨이며 사랑이며 아픔들이여.
그대들 언제나 나의 두근두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활짝 만개한 보름달 둥실 떴습디다.
무얼 비셨나요들?
***eunbee***
2015.09.29 07:05
'두근두근 내 인생'
기대만땅 처음 읽기 시작해서, 조금은 김빠지게, 끝을 읽었어요.
그러나 김애란 작가의 상상력과 그것을 구축해내는 문장력은 매력덩어리예요.
그러한 상상을 할지라도 필력이 받혀주지 못해 글을 쓸 수 없어 소설가가 못될거잖아요.
동우님 덕분에 김애란을 보다 더 깊게 읽게 되어 고맙습니다.
동우님의 덧글이 그러하게 도와준답니다.
달려라, 동우
하루도 빠트림없이 올려주시는 그 꾸준함은
여러 의미에서 존경스럽습니다.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동우님을 닮고 싶고, 존경의 염을 보내고 싶답니다.
감기가 와도, 또는 사노라면 이런저런 걸림돌도 있게 마련이련만...
많은 의미를 내포한 나의 응원 "달려라, 동우!!" ㅎㅎㅎ
파리의 수퍼문은 하늘 바라기를 좋아하는 은비에게 신비로운 즐거움이었나 봅니다.
'엄마,어엄마아~, 달이 정지표지만큼 커~'라면서, 도로 표지판처럼 커다란 달을 바라보며
즐거운 외침을 하더랍니다.
한가위날 달빛은 어찌 그리도 뽀얗게 맑던지요.
연전 파리의 어느 의상 부띠끄 여인의 말이 떠올랐더랍니다.
'보름날 달빛에 흰 빨래를 널어두면 하얗게 바래지지요.
그러니 색깔있는 원피스는 달빛에 널어두지 마세요.'
뽀얀 달빛이 내려앉으면 봉평장으로 가는 허생원과 동이가 늘 생각나요.ㅎ
한가위
너무도 쓸쓸해서 슬픔이 스미는 명절의 적막
내 한가위는 그랬답니다.
***동우***
2015.09.30 05:05
리딩북 여러분 읽어주시지만 '달려라, 동우'라고 말씀 해주시는 분은 은비님 밖에 없답니다. (마음속 말씀들이야 묵언으로 듣는 바이지만. ㅎ)
그런데 은비님.
무슨 존경까지씩이나.
그건 한참 과하셨습니다그려.
리딩북은 아주 많이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루한 내 일상의 지엽들에다, 하루의 새벽에 백신을 주사하는.
효험은 미약할지라도 그 순간은 스스로의 고무(鼓舞)이며 진작(振作)이기도 하지요.
리딩북 읽어주시는 님들을 의식하는 기쁨 또한 적지 아니한 것.
예전 故 장영희 님이 매일 새벽마다 시 한편 들려주면서 이런 글을 썼더군요.
문학의 숲에서 시를 읽고 하루를 너끈히 보낼 그대여
이제는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울지 말기를
어떻게 살지 하며 묵은 울음을 참던 친구여
이제는 문학의 숲에서 시의 세례를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기를
감히 이런 시늉도 해가면서... ㅎㅎ
은비님 한가위의 쓸쓸함.
멀리 있는 외동손주가 몹시 그리우셨을것.
말씀하셨던가요?
명절은 아기들 까르르하는 웃음소리라는...(이 비슷한..)
은비님보다 내게 낳은 명절 있다면 다만 두 아이 웃음소리뿐...
슈퍼문
부띠끄 파리지엔느는 시인.
달빛에 뽀얗게 빛이 바래는 무색옷 빨래라 ...
그런데 은비님, 정말 그렇지 않나요? (광학적으로 가능한게 아닐까가하는.. 맹구 소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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