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체홉]]
<아뉴타> <농사꾼> <입맞춤>
<아뉴타>
-체홉 作-
***동우***
2015.06.29. 04:19
체홉이 남긴 작품들은 거의 천여편에 이른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읽어보았을까)
그 많은 작품중 한편의 태작(怠作)도 없다니 체홉은 얼마나 놀라운 작가인가.
수백의 인간상을 작품으로 구현한, 인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체홉.
체홉처럼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구현해내는 작가는 정말 흔치 않다.
가난한 의과대학생과 살고있는 순종적인 여인, 아뉴타 (Anyuta)
이미 다섯사람의 대학생들과 동거하며 뒷바라지하다가 버림받았고, 지금 의대생에게도 으레 버림받을줄 알고 있다.
모델로 빌려달라면 빌려지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보잘것 없고 하찮은 아뉴타의 삶의 모습.
[아뉴타가 화가의 집에서 돌아왔다. 그녀가 외투를 벗고 있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여보! 내 할 말이 있으니 그리 좀 앉아요. 우리 인제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 같소. 나는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단 말이오.
화가에게서 돌아온 아뉴타는 몹시 피곤하였다. 오랫동안 알몸둥이가 되어 서 있어서 그런지, 얼굴이 더욱 빠지고 턱이 한결 뽀죽해진 것 같았다. 아뉴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입술만 가늘게 떨 뿐이었다.
「어서 대답해 봐요. 우리는 어차피 헤어져야 할 사이가 아니오?」하고 학생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얌전하고 영리한 여자니까,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겠지…?」
아뉴타는 말없이 다시 외투를 걸치고 바늘이며 실 같은 것을 주워 모아 바느질 감을 종이에 쌌다. 그리고 들창가에 설탕 네 덩어리가 들어 있는 봉지를 보자, 테이블 위 책 옆에 갖다 놓았다.
「이 설탕은 당신 거예요….」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사나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아니, 울긴 왜…?」 클로치코프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말하였다.
「왜 그래, 응?… 내 원… 우린 어차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순 없잖아?」
아뉴타는 자기 보따리를 싸들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그에게 돌아섰다. 그는 아뉴타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한 주일만이라도 더 있게 할까? 그래, 조금만 더 두자. 한주일 후에 내 보내도록 하지.>
그는 자기의 약한 마음을 탓하면서 무뚝뚝하게 말하였다.
「그런데 왜 우두커니 서 있는 거요? 가려면 가고, 가기 싫으면 외투라도 벗고…굳이 가라는 건 아니야. 있을라면 그냥 있어요!」
아뉴타는 말없이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가만히 코를 풀고 긴 한숨을 쉬고 나서 들창가의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아, 아뉴타의 저 모습에는 아름다운 서정(抒情)이 있다.
그 서정이 있으므로 나는 더욱 아뉴타가 슬프고 가엾다
독특한 평범성(말이 되나?)으로 하나의 인간상을 부각하면서도 체홉은 요란을 떨지 않는다.
간결한 문체와 사실적 묘사와 심플한 서사로 시종 잔잔한 톤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러면서 존재의 허무라던가 인생의 비극성이나 생활의 비속함 같은 것으로 마음을 적시게 하여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리고 드라마를 꾸미는 천재적인 체홉의 솜씨.
소설의 종결구조를 보라.
어떤 극적전환의 역동성없이 짙은 여운을 남기면서 마무리짓는.
[학생은 책을 집어들고 다시 방안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하였다.
<왼쪽 폐는 세 부분으로 나뉘져 있다……>
그는 다시 암송을 하기 시작하였다.
<상엽(上葉)은 흉곽 내면에서 다섯째의 늑골에 걸쳐 있고……>
복도에서는 누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리, 차 마시러 와!」]
스타니슬랍스키. 모스크바 예술극단.
또한 연극사(演劇史)의 에포크 포인트이기도 하였던 체홉.
체홉에게는 그 어떤 경향성(傾向性)도 없다.
혹자(或者)로부터는 무사상(無思想)이라고 비판을 받는 모양이지만 그래서 나는 체홉이 좋다.
내게는 체홉이야말로 인생의 오의를 파악하고 있는 대사상가다.
체홉이 내게 속삭인다.
삶이 아무리 비극적이라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살아지는 것이라고.
***eunbee***
2015.06.30 20:10
이 소설 너무 슬퍼요, 동우님.
체홉을 좋아하는 큰 딸아이도, 읽고 눈물 쬐끔,
들러 본 꼬비에뚜님 댁은 방대한 도서관, 입이 쩍 벌어질 정도,,.
***동우***
2015.07.01 05:10
체홉의 희곡을 좋아하신다는 큰 따님.
확 친밀한 느낌입니다.
아뉴타에서도 체홉적인 드라마의 맛.
무슨 반전의 복선이나 극적전환의 장치없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체홉.
일상사의 색감 그대로 아뉴타의 비극을 잔잔한 여운으로 스미게 하는 체홉.
의대생은 다시 암기에 몰두하고, 복도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치는 흔한 생활소음.
'그레고리, 차 마시러 와'
아뉴타를 향한 연민은 일상사에 그저 녹아버린채 더욱 가엾습니다.
나도 죽기전 꼬비에뚜님 방의 글을 다 섭렵할수는 없을겁니다.
도서관의 방대한 서가라 생각하고 한권씩 끄집어 내 책갈피 넘겨보고 그중 입맛대로 골라서 읽을 뿐이지요.
코뜨다쥐르, 남불의 푸른물...
수영하는 은비님이나 그려볼랍니다.ㅎ
<농사꾼>
-체홉 作-
***동우***
2015.06.29. 05:35
체홉의 '농사꾼'
'농사꾼(1897년 발표)'은 '골짜기(1899년 발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체홉의 농민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골짜기'(기 포스팅하였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소설이로군요.
체홉은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그들의 도피적이고 자포적이고 반항적인 면모를 여러 인물을 통하여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체홉은 역시 요란을 떨지 않는군요. (내 친구 표현대로 징징거리지 않습니다)
체홉은 이야기에다 주의 주장을 엮어서 징징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체홉은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적 방향성을 도출하여 주먹 불끈 쥐는 진보주의자의 추상성을 무엇보다 불편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체홉이야말로 진정한 리얼리스트였지요.
그런데 러시아 '피의 일요일'의 현장은 이 소설의 현장에서 불과 8년 후의 현장이었습니다.
체홉의 '농사꾼'은 전혀 붉지 않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낫'을 봅니다.
옛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깃발, 노동자의 심볼 '망치'와 교차된 농민의 심볼인 그 '낫'을 말입니다.
마르크스의 역사의 변증은 어긋 나...
미처 산업화에 이르지 못한 농민이 주축인 러시아 사회, 부르주아지 혁명의 단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하였던 러시아 혁명의 어떤 당위를 봅니다.
농민을 바라보는 체홉의 시선은 그윽하고 따스하지만, 그가 묘파하는 농민의 현장은 여늬 혁명가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체홉에게 어떤 직관적 예견이 있었을런지..
체홉의 농사꾼.
前後,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5.07.02. 05:32
계절이 물든 자연은 찬란하지만 농사꾼들의 삶은 비참하다.
<푸른 나무들이 새벽이슬을 번쩍이며 물속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날씨는 온화하고 기분은 상쾌하다.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이냐! 이 사람들의 삶 역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그 가난만 없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무서운 가난만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잠깐만이라도 마음을 돌려 어제 하루 본 일만 생각해도... 온누리에 가득찬 행복의 환상은 순식간에 깨져 버리는 것이다.>
붕괴된 농촌으로부터 도망가 빌붙은 도회의 삶, 따라지 인생일망정 도회의 맛은 달콤하였다.
<"단 한 번만이라도 모스크바를 보고 싶어! 꿈에라도 모스크바를 한 번 보고 싶어!">
보드카는 가난에 찌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도피처, 그러나 술만 마시면 남편은 마누라를 끔찍하게 두드려 패고 한 집안 식구들도 먹는 입을 두려워 하여 서로간 악만 남았고 아귀다툼은 일상사가 되었다.
<할매는 앞가슴을 다 풀어헤친 채 쇳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건 모두 네 놈 잘못이야! 네놈은 집에 보내는 편지마다 '스라비얀스키 파자르 호텔'에서 매달 50 루블씩 받는다고 떠벌리지 않았더냐? 그런데 집에는 그렇게 조금밖에 돈을 보내지 않았더냐? 겨우 풀칠도 못할 몇 푼 말이야! 그러더니 뭐하려고 이 똥구녘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구석에 돌아왔어? 처자식까지 줄줄이 데리고 말이야! 네 녀석이 죽는 날에는 도대체 무슨 돈으로 장사를 치르란 말이냐?">
마르크스의 지적은 옳았을까, 오리가나 사샤에게 종교는 일종의 아편이었다.
<사샤는 하늘을 쳐다보며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말했다. " 하늘을 쳐다보렴. 눈을 깜박이지 말고 말이야. 천사가 보이지 않니?">
보잘것없는 재산을 홀라당 태워버리는 불은 어쩌면 농민들에게는 자포(自抛)하는 절망적 기쁨이었는지도 모른다.
<불이 난 것이 마치 좋은 농담거리라도 되는 모양이다. 오히려 이렇게 불이 빨리 꺼진 것이 아쉬운 심정인지도 모른다.>
할배는 그 옛날 농노(農奴)시절을 그리워 한다.
<"나리님 밑에서 머슴살이 할 때가 훨씬 지내기가 좋았지." 실을 감으면서 할배가 중얼거렸다. "일을 하고 나서는 먹고 자기만 하면 됐단 말이여. 그런 상팔자가 어디 있겠남, 그래. 점심을 먹고 나서는 스튜와 카샤를 먹고, 저녁에도 스튜하고 카샤가 나온단 말이여! 아, 오이 절임이나 배추 그 따위 것은 배가 불러서 먹지를 못했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그때는 사람들이 법도를 딱딱 지켰단 말이지. 다들 제 분수들을 잘 알고 있었단 말이여!">
1861년, 알렉산드로 2세의 농노해방령(農奴解放令)은 허구였던 것이다.
가진 것 없는 농노들은 다시 지주의 소작인이 되거나 도시로 가서 노동품을 팔지 않으면 생존할수가 없었다.
이들이 혁명의 기층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사납고, 정직하지 않으며, 지저분한데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도 않고 늘 싸우기만 한다. 그 이유는 뭘까? 서로 존경할 줄을 모르고 두려워하고,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술집을 만들어 농사꾼들을 주정꾼으로 만든 사람이 누군가? 바로 농사꾼이다. 마을의 조합이나 학교나 교회의 돈을 축내고 술로 바꿔서 마셔버리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농사꾼이다. 이웃집의 물건을 훔치고 불을 지르고 보드카 한 병 때문에 법원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바로 농사꾼이다.>
체홉의 농사꾼.
저 무렵 러시아 농촌의 현실을 체홉은 정치(精緻)한 필치로 스케치하였다.
그러나 체홉이 혁명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사(人間事)의 어두움을 인간을 통하여 들여다보려는 체홉의 그윽한 눈길을 나는 느낀다.
‘골짜기’에서도 나는 짙은 체홉을 느꼈다.
["이 애는 하루종일 고통을 겪었어요." 리파가 말했다. "조그만 눈으로 저를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안했어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아아, 예수님, 마리아님! 저는 슬퍼서 내내 방바닥에 쓰러져 있기만 했어요. 아무리 해도 이 애 머리 맡에 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네, 할아버지, 이렇게 조그만 애가 죽기 전에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나요? 어른들이라면 남녀 불문하고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고통을 겪는다지만, 이런 죄없는 애는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나요? 네, 왜 그럴까요?" "그걸 누가 아나!" 노인은 대답했다. "그걸 누가 아나!" 노인은 대답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30분쯤 타고 갔다. "세상만사 그 이유를 다 알 수야 없지... 왜라든가 어째서라든가 하는 그 이유를 말이야." 노인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새댁의 슬픔 같은 건 대단치 않아요. 사람의 일생은 기니까... 앞으로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거야.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구. 우리를 낳아준 러시아는 무척 큰 나라니까!" -체홉 '골짜기'-]
<입맞춤>
-체홉 作-
***동우***
2015.07.02. 05:30
체홉의 '입맞춤'
열등의식에 잠겨있는 한 소심한 사나이
느닷없이 경험한 낯선 여인과의 입맞춤.
체홉이 묘사하는 배경과 심리의 사실성..
나 역시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찌질이인지라 그 심리에 공감하는바 없지 않습니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함께 읽어요.
***동우***
2015.07.03. 05:41
키가 작고 등이 굽었으며 안경을 쓰고 삵괭이 같은 수염을 단 랴보비치 대위.
외모도 그러하지만 성격도 소심하고 마음 속에는 열등의식이 가득하다.
고급스러운 저택과 고상한 품위의 사람들의 분위기 앞에 서면 그는 그저 두렵고 어디로든 숨고만 싶다.
처음으로 청중 앞에 선 연사처럼 눈 앞의 것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하나 배웠다. 이런 상태를 생리학자들은 '정신적 실명'이라고 부르는구나)
<일생동안 단 한번도 춤을 춰보지 못했고 품위있는 여인의 허리를 껴안아본 적도 없었다. 그는 남자들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알지도 못하는 여인들의 허리를 가까이에서 안고 그 고운 손을 자기 어깨 위에 올리도록 하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동료들의 대담함과 당당함을 부러워하면서 마음 속으로 비참해하던 때도 있었다. 자기가 소심하다는 것, 등이 구부정하고 별 볼일 없는 위인이라는 것, 허리가 길고 살쾡이 구렛나룻이 있다는 생각이 몹시 기분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모든 것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춤추는 사람이나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부럽지는 않고 그저 약간 서글퍼질 뿐이었다.>
랴보비치 대위의 살아오는 동안 축적된 자포적(自抛的)인 주눅.
그런 그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두운 방에서 자신의 연인으로 오인한 어떤 여인으로부터 기습적으로 키스를 당한 것이다.
<그의 뺨에 따뜻한 뺨이 맞닿았고 그 순간 입맞춤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곧 그 여자는 작은 비명 소리와 함께 혐오감으로 -랴보비치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뒤로 펄쩍 물러섰다. 그 역시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옆 방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의 내부에서는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방금 전에 부드럽고 향기로운 팔이 감쌌던 목에는 기름칠이라도 된 듯 느껴졌고 미지의 여인이 입을 맞춘 왼쪽 뺨 언저리에는 박하수같이 가볍고 상쾌한 기운이 어렸는데 그 자리를 만지작거릴수록 그 상쾌함은 더욱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떤 새롭고 이상한 느낌으로 가득찼고 그 느낌은 점점 더 커지기만했다. 춤추고 이야기하고 정원으로 뛰어나가 큰 소리로 웃고 싶었다. 자기가 등이 구부정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 살쾡이 같은 구렛나룻과 특징없는 외모 같은 것은 모두 완전히 잊어버렸다. 폰 라베크 부인이 옆을 스쳐갈 때 그가 얼마나 상냥하게 활짝 웃어 보였는지 부인이 멈춰 서서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볼 정도였다. "저택이 무척 마음에 드는군요!"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본래 집이 자기 아버지 소유였다고 설명하고 부모님은 생존해 계시는지 얼마 동안이나 복무를 하는지, 왜 그렇게 야위었는지 등등을 물었다. 대답을 들은 부인은 저 쪽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그는 대화가 끝났어도 더욱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훌륭한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입맞춤을 베풀어준 여인은 누구였을까.
그는 미지의 여인의 모습을 이모저모로 조합하여 본다.
그리고 황홀함에 잠긴다.
<랴보비치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우등을 하고서 상상 속에서 번득이는 모습들을 한데 모아 온전한 형상을 만들어보려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곧 잠이 들고 말았는데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누군가 자기를 껴안아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것, 무언가 이상하고 바보스럽긴 해도 엄청나게 기쁘고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꿈 속에서조차 떠나지 않았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목의 기름기나 입술 근처의 박하 향은 이미 사라졌지만 기쁨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슴 속에서 출렁거렸다. 그는 막 떠오른 햇빛에 금빛으로 물든 창틀을 환희에 차서 바라보고...>
자신감이 무럭무럭 일어난다.
사나이가 여인의 사랑을 얻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야.
나라고 다른 건 없어..
<내가 지금 상상하는 것들,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모든 것들은 실제로는 매우 평범한 일이야.' 랴보비치는 장군의 마차 뒤에서 일어나는 구름같은 먼지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평범하고 모두가 다 경험하는 거야.... 이를테면 저 장군만해도 한 때 사랑을 했고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지. 바흐테르 대위도 저렇게 보기 싫은 목덜미를 하고 허리도 없지만 역시 결혼을 했고 사랑도 받는단 말야... 살리마노프도 거칠고 난폭하기 짝이 없지만 역시 연애를 해서 결혼했지 않아.. 나라고 다른건 없어. 조만간 모든 사람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거야....'자기도 평범한 사람이며 평범한 삶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기쁘게 하고 용기를 주었다. 그는 그녀와 자기가 원하는 행복을 대담하게 그려보았고 자기가 상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에 빠져 버렸다.
냉철함을 잃고 이성은 혼미해지고 파토스는 기승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기만하는 내면의 소리.
그건 오로지 옥시토신이 작용하여 내지르는 환각적 낙관주의의 소리이리라.
틀림없이 그 미지의 여인을 만나서 사랑을 이루게 되리라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입맞춤의 추억이 깃든 그 저택으로 갈수있는 기회를.
그리고 기회는 왔다.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까? 무슨 말을 할까? 미지의 여인은 입맞춤 사건을 잊지는 않았을까? .. 저녁 무렵 지평선에는 낯익은 교회와 하얀 석조 창고들이 나타났다. 랴보비치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면서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있는 장교의 말도 들리지 않았고 다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 멀리서 반짝이는 강, 저택의 지붕, 지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비둘기들에 에워싸인 비둘기집 등을 게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초대는 지연되고 있었다.
그는 장군의 저택부근을 배회한다.
얼굴도 이름도 알수없는 여인, 뉜가의 매개가 없으면 맡아질수 없는 라일락 향기.
우연하게 코끝을 스쳐 지나갔던 잠시잠간의 황홀한 향기.
그 향기에 과연 무슨 필연이 있었던가.
랴보비치는 문득 깨닫는다.
한순간의 우연에 그리도 황홀하게 들떠 있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물살이 빨랐다. 목욕탕 말뚝 근처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불그레한 달이 왼쪽 강변 쪽에서 물에 비쳤다. 작은 물결은 쉴새 없이 달을 늘렸다가 일그러뜨렸다가 조각조각내기도 하였다. 마치 그 달을 가져가 버리고 싶다는 듯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얼마나 바보 같은가!'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랴보비치는 생각했다. '모든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게 된 이 때에야 입맞춤 사건, 불안감, 막연한 희망과 실망이 분명해졌다. 장군 댁에서 말 탄 사람이 오지 않은 일도, 우연히 다른 사람 대신에 그에게 입을 맞추었던 그 여인을 다시는 못 보리라는 것도 이제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여인을 만난다면 이상한 일이 될 것이었다. 물은 알 수 없는 곳으로 까닭도 모른 채 흘러갔다. 지난 5월에도 그렇게 흘러갔다. 지난 5월의 그 물은 큰 강으로 가서 강에서 바다로, 그 다음에는 증발하여 비로 바뀌었다가 어쩌면 바로 그 물이 지금 다시 랴보비치의 눈앞을 흘러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엇을 위해? 어째서? 그리고 모든 세상, 모든 인생살이가 랴보비치에게는 이해할 수 없고 목적도 없는 우스갯거리인 양 느껴졌다... 그는 물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지의 여인이라는 모습으로 운명이 어떻게 그에게 뜻밖의 애무를 하였는지, 여름동안 어떤 장면들을 꿈꾸었던지가 떠오르며 자기 인생이 무척이나 가난하고 비참하며 평범한 것으로 여겨졌다...>
뒤늦게 장군의 초대가 왔을때 잠시 동안 랴보비치의 가슴에는 기쁨의 불길이 타올랐으나 곧 그는 그 불씨를 눌러 꺼뜨리고 침대에 누웠고 운명에 대한 적의에 가득차 앙갚음을 하려는 작정으로 장군 댁으로 가지 않았다.
랴보비치는 다시 자기자신으로 돌아왔다.
키가 작고 등이 굽었으며 안경을 쓰고 삵괭이 같은 수염을 단 대위보 랴보비치로.
인생을 낯가림하는 것은 자아일까 운명일까.
어떤 운명이 그러하고 어떤 자의식이 그러하던데.
체홉은 랴보비치 대위의 어떤 병리적인 열등의식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자의식 과잉의 이상 양태는 오히려 공격성일 것이다.
저토록 수동성의 못난 자의식으로 한살이를 직수굿이 감내하여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본다.
체홉은 주로 그런 인간상을 연민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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