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체홉]]
<세자매> <개를데리고...><어느관리...外3편> <아가피야> <잠>
<세자매>
-체홉 作-
***동우***
2014.04.06 05:11
고향 모스꼬바를 떠나서 러시아 지방의 소도시에서 사는 4남매.
노처녀 맏딸 올가는 학교교장이라는 일 속으로 도망가 현실을 짐짓 회피하여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외아들 안드레이는 식구의 기대를 저버리고 천박한 부인의 그늘 속에서 그도 역시 점점 속물이 되어 갑니다.
둘째딸 마샤는 결혼하였으나 남편에게 절망하여 모스꼬바에서 온 군인 베르쉬닌을 사랑합니다.
막내 이리나는 못생긴 남작 뚜젠바하과 결혼하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자매가 그토록 가고자 하는 모스꼬바, 그 꿈은 좌절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대사가 대화체인지 독백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극적 비약을 이루는 큰 사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체홉은 그 누구를 미화하거나 비난하거나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입니다.
갈망과 기다림과 좌절, 그리고 만남과 떠남을.
견디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그냥 보여줄 뿐입니다.
모스코바 극장에서의 독회때 배우들이 이 희곡을 비극으로 인식하여 눈물을 흘리자 체홉은 사람들이 자신의 희곡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불안해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내 감정모체에 담겨지는 '세자매'의 색감.
그것은 분명 Comedy(희극)은 아닐터, 내게 이 연극은 Tragedy(비극)입니다.
삶과 죽음과 세월.
일견, 그에 대한 낙관과 긍정과 순종.
그 뒷편에서 흐느끼는 체홉의 패러독스, 체념과 우울한 체홉의 시(詩)를 읽습니다.
***동우***
2014.04.07 04:09
버지니아 울프, 헤밍웨이, 고리키, 레이먼드 카바를 매혹시켰다는 체홉.
어떤 연출가는 말했다지요.
'저마다 자신만의 체홉이 있다'고.
<"악대는 저렇게 즐겁고 힘차게 연주하고 있구나. 저 소리를 들으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둘어요! 아, 차츰 세월이 흐르면 우리도 영원히 이 세상과는 작별하고 잊혀지겠지. 우리의 얼굴도, 목소리도, 몇 자매였다는 것도 전부 잊혀지겠지....... 아아, 귀여운 나의 동생들, 우리의 생활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어. 굳세게 살아가자! 악대는 저렇게 즐거운 듯이 기쁜 듯이 울리고 있다. 저 소리를 들으니 조금만 더 지나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와하고 있는지 알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왜 태어나는가, 왜 사는가에 대한 인식..
체홉은 철학적이고 현학적 폼을 잡고서 그런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그냥 소박하게 그 아련한 감정을 공유하려 합니다.
나는 체홉이 좋습니다.
체홉과 함께 스무날여, 고맙습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체홉 作-
***동우***
2015.06.08 04:53
1년여 전에 이은 다시 체홉.
성격과 인간성..
그리고 환경과 인생과 갈등과..
사랑의 테마에는 언제나 비극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인간과 인생을 들여다보는 깊이와 그의 극작술...
나는 체홉의 재능을 '위대하다'고 밖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휴양지에서 젊은 유부녀를 꼬셔서 바람을 피다가 그만 진짜배기 사랑에 빠져버린 어느 중늙은이 얘기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서사의 비윤리성을 질책하였다지만 나보코프는 세계 문학사에 가장 위대한 단편 중 하나라고 상찬하였다고합니다.
사랑에는 윤리적 도그마가 도무지 범접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영역이 있다고 믿는바, 나는 당근 나보코프 쪽입니다.
사랑, 그 우주적 신비의 몽환스러움을 어쩌면 이리도 간결하면서도 정치(精緻)한 하나의 이야기로 꾸밀수있는지요.
거듭, 체홉은 위대한 작가입니다.
모스끄비치(모스끄바내기의 속물성을 빗댄 은어) 구로프는 삶을 회의하지만 슬슬 바람도 피워가면서 따분한 인생을 그럭저럭 문대면서 살아가는 중늙은이입니다.
천박하고 편협하며 우아하지 못한 마누라라고 여기고 있는 그는 그런 아내를 좀 무서워하는듯.
<"아시겠어요, 나는 얄따에서 아주 매력적인 여성과 사귀었단 말입니다.” “조금 전 당신이 한 말이 옳았소. 그 철갑상어는 냄새가 아주 고약했어.”>
모스끄바 속물 친구들은 구로프의 저 감정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하느님, 저를 용서하세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그녀가 말했다.“무서워요.”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무엇으로 변명하겠어요? 저는 천하고 나쁜 여자인걸요. 저 자신을 경멸하는데 뭘 변명하겠어요. 저는 남편이 아니라 저 자신을 배반한 거예요. 지금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죠. 제 남편, 그래요,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이죠, 하지만 노예인걸요!>
굽신굽신 세상살이 노예근성에 절은 남편에게 환멸하여 우울한 생활을 영위하는 안나.
사랑에 빠져버렸지만 그녀는 결코 안나 카레니나는 될수 없는 여인입니다.
그녀의 죄의식은 차라리 막달라 마리아와 닮은 연민일테지요.
<그만 울어요, 내 사랑.” 그가 말했다. “그만 됐어요… 이제 얘기 좀 합시다, 뭐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해야 하고 속여야 하며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며 자주 만날 수 없는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면 이 견딜 수 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는 머리를 감싸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는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거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 끝이 아직 멀고 멀어,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을 누릴 자격없는 비겁하고 소심한 나, 한심이는 이렇게 뇌일 뿐입니다.
‘진짜배기 사랑에 함몰된 저 한쌍의 연인, 그나저나 큰일났습니다그려.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을 뿐이니,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라고..
쯧쯧...
<"이제까지 사랑에 관해서 언급한 다시없는 진리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위대하고 신비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기 포스팅한 체홉의 '사랑에 대하여'에 나오는 대사>
<"내가 지금 이 혹성에 살고 있는 이유가 뭔 줄 아시오. 프란체스카? 여행하기 위해서도, 사진을 찍기 위해서도 아니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혹성에서 살고 있는 거요. 이제 그걸 알았소. 나는 머나먼 시간 동안, 어딘가 높고 위대한 곳에서부터 이곳으로 떨어져 왔소. 내가 이 생을 산 것보다도 훨신 더 오랜기간 동안. 그리하여 그 많은 세월을 거쳐 마침내 당신을 만나게 된 거요. -기 포스팅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대사-]
<어느 관리의 죽음 外 3편>
-안톤 체홉 作-
***동우***
2015.06.09 05:01
체홉의 짧은 단편소설 4편.
어느 관리의 죽음, 흥정, 뚱뚱이와 홀쭉이. 환희
한세대 전의 사실주의 작가 고골리(1809~1852)의 '코'와 '외투' (기 포스팅, 19세기 러시아문학은 '외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명작)
그로 부터 그보다 한세대 후의 작가 체홉 (1860~1904)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계층구조..상급자의 권위적 지배성향과 하급자의 무비판적 복종성향...
러시아의 관료주의.
짧은 풍자이지만 그 뿌리깊은 연조(年條)를 느끼게 하는 소설들입니다.
볼세비키의 당위와 사회주의 몰락의 당위도 이런 관료주의에도 한줌 녹아있을듯 합니다..
요식과 명분과 행정의 추상성...
으흠, 더욱 은밀하고 더욱 교묘해졌을 요즘의 관료주의...
아, 아래 포스팅들은 지금 '다음'에 의하여 블라인드 상태입니다.
저작권보호센터의 신고로 삭제 요청이 들어왔다는군요.
삭제하면 블벗님들의 귀한 댓글들도 날아갈터인데 그건 복사해 놓아야겠군요.
다소 의기소침...
<아가피야>
-체홉 作-
***동우***
2015.06.10 04:49
아등바등 내일을 걱정하지도 않고 생활이라는 것도 시덥지않아 그 어떤 열정도 없습니다.
숲 속 시냇물에 낚시나 드리우면서 일상을 죽일 뿐입니다.
또한 여자를 대하는 것도 언제나 무심합니다. 절대로 어떤 여자에게도 애달캐달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지요.
삶을 대하는 포즈가 늘 무위로운듯 초월한듯 시큰둥한듯 하여 그의 분위기는 어딘가 신비롭습니다.
게다가 말입니다.
빼어나게 잘생긴 용모와 훌륭한 체격을 갖고 있습니다.
나도 예전 사브카와 같은 친구(김동*)가 있었는데, 여자들은 속절없이 고기떼처럼 꾀어들어(?) 그 친구에게 빠져들더군요.
사브카의 미끼도 없는 낚시에 스스로 걸려든 아가피야.
갓 스물 유부녀의 어린 분별은 남자를 향한 불타는 열정과 욕정에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남편을 향한 발걸음에 담겨있는 아가피야의 필사적인 저 갈등...
굳게 마음을 다졌다는데 결혼생활을 끝장내고 좋아하는 남자의 품속으로 뛰어들고자 결심하였을까요, 아니면 남편에게 무릎꿇어 용서를 구하고자 결심하였을까요?
아무래도 前者인듯 싶지요?
강과 숲과 나무들과 새소리와 별과 햇살...
사브카와 아가피야.. 그리고 나.
번역이 너무 거칠어 맥락 연결안되는 몇 부분 고쳤습니다만.
이 소설 번안하여 연극으로 상연되기도 합니다.
참, 사브카와 같다는 내 옛 친구.
자식 손주 거느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영악한 생활인으로.
***해나***
2015.06.10 05:20
여자들이 많이 따르는 남자들이 있더라고요 ㅎㅎ
남자들이 많이 따르는 여자들도 있고요~
늘 느꼈던 거지만...여자가 같은 여자를 보는 눈이랑
남자가 여자를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
나는 이 짧은 글로는 알지 못하겠지만
여자들이 사브카에게서 받는 위안이 있겠지요?
***해나***
2015.06.10 07:12
동우님...혹 사브카와 같은 그 친구를 부러워한 건 아닌지요? ㅎㅎ
<잠>
-체홉 作-
***동우***
2016.06.25 04:19
아, 체홉.
읽을적마다 나는 그가 놀라웁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잠. 잠.
그러나 바르카는 잠을 잘수가 없다.
작가는 열세살짜리 소녀의 그 극한의 정신적상황에 완벽하게 빙의(憑依)하고 있다.
몇 밤을 새보라.
그 때 쏟아지는 잠은 죽음으로도 막지 못한다.
깜빡깜빡 졸면서 행군하였던 기억이 있는데, 그 순간에 욕구하는 잠이란 세상천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천의무봉의 달콤함이었다.
비몽사몽의 환각 속에서 아기의 목을 조르는 바르카.
아, 이제 비로소 잠잘수 있구나...
자율신경계가 저지른 무의식적 영아살해.
저것은 생존을 위한 정당한 자기방어이다.
어린 여자아이 바르카의 저 상황적 참혹함.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가 아프구나.
***어줍이***
2016.06.25 07:36
비몽사몽, 서성이는 녹색얼룩과 그림자, 누워 곤히 잠든 그림자들.. 어머니 아버지...
닦고 있는 방수화에 머리를 박고라도 자고 싶은 잠.
읽는 이마져 환각이 보이고, 환청이 들려오고, 잠을 자지못해 괴로운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문장에, 내게도 졸리움이 마구 쏟아져 내리고 있는 듯,
바르카의 잠처럼 내가 취합니다.ㅋ
안톤 체홉의 소설에 등장하는 슬픈 사람들,
보잘것없어 쓸쓸하고 외롭고 고단하여 애처로운 사람들.
<우수>에서의 요나 처럼...
이 아침의 바르카는 슬프다기 보다
어떤 잠을 잘 수 없는 어린 소녀의 임상적 결론을 보는 심리극(?)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어줍이.ㅎㅎ
***┗동우***
2016.06.28 04:30
어줍이 님.
'우수'에서의 요나처럼 쓸쓸하고 외롭고 고단한 바르카...
나 또한 소녀의 환경, 저 상황 배후현실의 참혹함 운운하였지만.
그보다 임상으로 묘파한 심리극.
바로 이 소설에 딱 들어맞는 말씀.
말씀 듣고 체홉의 의도가 그러하였음을 확연이 깨닫습니다.
"역시 어줍이.ㅎㅎ" 하시며 스스로 훼하시는듯한 말씀 거두어 주시기를.
-독서 리뷰-
[[체홉]]
<기우> <환희><황홀한...><이웃학자...> <함정> <인생은...> <내기>
<기우>
-체홉 作-
***동우***
2016.08.02 04:57
'안톤 체홉'의 '기우(杞憂)'
무인지경의 평야를 달리는 마차에는 샌님같은 측량기사와 험상궂게 생긴 마부가 타고 있을뿐 아무도 없습니다.
날은 차츰 어두워지고 측량기사는 갈수록 겁이 나기 시작합니다.
마부가 돌연 변하여 강도가 된다한들 속수무책 당할수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부에게 은근슬쩍 공갈을 칩니다.
덩치는 이래보여도 자기는 싸움을 매우 잘한다고, 그리고 권총을 세자루나 가지고 다닌다고.
마차가 호젓한 숲길로 접어들자 측량기사의 두려움은 더욱 커져서 뒷주머니의 권총을 뒤지는 척 합니다.
물론 권총 따위는 있을리가 없지요.
그런데 웬걸, 마부가 갑자기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헐레벌떡 숲으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말이고 마차고 다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하면서.
오히려 선량한 농사꾼인 마부는 줄곧 싸움이나 권총을 뇌이는 측량기사를 권총강도로 여기고 있었던 겁니다.
서로에 대한 두 사람의 기우(杞憂)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영어제목은 'Overdoing It'이로군요.
과장하기, 과시하기, 부풀리기, 공갈치기, 허세부리기, 후까시...
쓸데없는 걱정인 '기우(杞憂)'와 공갈치기인 '허장성세(虛張聲勢)'
이 에피소드의 주제, 어떤 걸 취하시겠어요?
나는 후자(後者) 쪽 입니다. ㅎ
복어는 포식자를 만나면 바닷물을 흡입하여 몸을 몇배로 팽창시킨답니다.
위험이 닥치면, 코브라나 도마뱀는 몸을 부풀리고 조류(鳥類)는 깃털을 세우고 거의 모든 동물들이 털이나 꼬리를 곧추 세운다지요.
말하자면 자기과시는 생존을 위한 생리화된 공갈일 터입니다.
포식자를 향한 공갈말고도, 짝짓기를 위한 자웅(雌雄)끼리의 공갈에 이르면 그 수사(?修辭)는 자못 화려하지요.
짐승뿐이리까.
허장성세라면 인간이 한수 위이지요.
남자라는 족속들. 즤들끼리나 여성을 향한 사내다움의 과시는 동물보다 더 유치하지 싶습니다.
여성이라고 썩 다르리요? ㅎ
화장이 성형이 새침떼기가 도도함이 애교가...
으흠, 따지고보면 과장이나 과시 아닌게 어디 있겠어요.
관계끼리의 소통 자체가 과장이지요.
몸짓 말짓 표정짓에서 레토릭을 모두 제거해버린다면 아아, 그러니까.. 진실만이 남을까요?
어쩌면 존재 자체가 과장이 아닐런지..
인간은 짐승의 과장이고 진화는 창조의 과장이고 자아는 타아의 과장이고...매미소리는 여름의 과장이고.....
하하하... 헛소리가 덥습니다.
***송현***
2016.08.03 02:13
ㅎㅎ 현실에선 헛것이 그리 중요합니다~ ^^
***┗동우***
2016.08.05 04:25
그렇지요.
세상사 참소리만 있어도 재미 없을듯 싶습니다.
가끔은 헛소리도 있어야. 하하하
<환희>
-체홉 作-
***동우***
2017.05.25 03:53
내게 체홉은 언제나 미증유(未曾有)의 작가입니다.
작금에도.
셀러브리티(Celebrity)를 향한 열망, 요즘 아이들 대단하지요.
주로 연예 쪽이지만.
그 옛날, 교지(校誌)에 실린 어줍잖은 내 작품.
종이에 활판인쇄로 새겨진 내 이름석자.
그 환희를 기억합니다.
먹물의 타락은 어쩌면 그로부터 시작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ㅎ
<황홀한 순간 그 후 '발로쟈'>
-체홉 作-
***동우***
2017.11.14 06:22
체홉은 거듭 놀라운 작가입니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인간과 인생을 묘파해내는 그의 솜씨.
그 저류에는 인간성에 대하여 짙은 연민이 흐르고.
체홉의 '황홀한 순간 그 후 -발로쟈-'
'발로쟈'는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블라디미르'의 애칭이라지요.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7.11.15 04:16
<암소의 울음 소리와 목동의 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들과 밝은 햇빛은 이 세상 어딘가에 순결하고 시적이며 아름다운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삶에 대해서는 어머니도, 그를 둘러싼 다른 어떤 사람들도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열일곱살 짜리 발로쟈.
<아버지는 갑자기 두 팔로 자기를 안고 함께 어떤 깊고 깜깜한 심연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모든 것이 뒤섞이더니 사라져 버렸다...>
발로쟈의 권총자살.
어떻게 납득할까요.
일찌기 아버지를 여윈, 몰락한 집안.
경박하고 허영 가득한 어머니.
친지로부터의 은근한 경멸로 인한 굴욕감.
유급을 걱정할만큼 자신없는 수학시험.
잘 생기지 못한 용모, 병약한듯한 신체, 심약한 성격,
서른살 먹은 유부녀를 향한 생전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
그런 감정의 고백은 한낱 웃음꺼리가 되고. 어머니한테까지도.
체홉이 묘파한 발로쟈의 기질과 심리와 상황.
그로써 유추하는바, 이틀 동안 축적된 발로쟈의 어두운 기분.
극도의 우울, 결국 그 우울이 권총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일테지요.
기분이라는 놈.
육체나 정신의 어떤 세미한 것들의 미묘한 작용에 의하여 마음의 분위기를 채색하는.
내 기분이 좋으면 세상이 밝고, 내 기분이 아프면 세상이 아픕니다.
나는 가끔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혹여, 만물의 척도는 '기분'이 아닐까 하고.
기분이 그 날의 세계관을 만든다는... ㅎ
OECD 국가중 우리나라가 자살율 1위라지요.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가 자주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저조한 날 떠오르는 생각에 속지 말자'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드는 날에는 선택을 미루자'
<이웃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
-체홉 作-
***동우***
2017.12.06 04:17
체홉의 '이웃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
인과적, 유비추론의 오류 투성이 내용의 편지.
무식한 시골지주.
제 딴에는 자신이 매우 사변적(思辨的)이고 자연현상에 대한 깊은 사유(思惟)를 하고 있다고 확고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저 편지, 그런 자부심을 짐짓 겸양하듯 최대한 과공(過恭)과 정중함을 내세우기 위하여 문장을 몇십번 퇴고(推敲)하였을 겁니다.
없는 지식에 온갖 현학적인 폼을 잡고서,
나 또한 저런 똥폼잡는 글쓰기 없지 아니할 것..ㅎㅎ
귀여운 구석은 있습니다그려.
놀라운 작가 체홉.
짧은 글 속에서 정치(精緻)하게 드러내는 한 속물 캐릭터의 우스꽝스러움.
<지금 저희는 정진(精進)음식을 먹고 있습니다만, 귀하를 위해 부정(不淨)한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무슨 뜻인가하여 검색해 보았더니, 정진(精進)음식이란 이를테면 도 닦는 승려가 먹는 채소 위주의 사찰음식 비슷한건가 봅니다.
그러니까 학자께 대접하고자 하는 부정(不淨)한 음식이란 껄쩍지근한 기름진 음식을 말하는거겠지요. ㅎ
러시아 原語로는 더 해학적 의미가 있을듯.
<함정>
-체홉 作-
***동우***
2018.04.17 04:01
체홉의 '함정'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숫컷들의 저 던적스러운 속성, 여성 제위께서는 혀를 차도 좋으시리이다. ㅎㅎ
***동우***
2018.04.18 04:47
어쩌면, 고급한 환경속의 고상한 기질의 사람일수록 더 간절하게 일탈을 꿈꾸는지도 모르제요.
상스럽고 저급한 품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함정 속으로.
상승이 인문적 욕망이라면 추락은 본능적 욕망일런지.
착한 것보다 더러운 것이 정돈된 것보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것이 더욱 흥분되고 에로틱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나 역시 때로 그런 충동에 휩싸인 적 없지 않습니다.
마냥 망가지고 싶은.
퇴근 후 일차 이차 삼차.
술에 떡이 되어 외치는 봉급장이들.
'마시고 죽자! 오늘'
다음날 아침이면 쓰린 속 부여안고 헐레벌떡 직장 속으로 뛰어가는 주제에 말입니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고소에 오르면 느껴지는 현기증.
그건 떨어져 죽지말라고, 추락욕망을 억제하는 방어기제라고.
<인생은 아름다운 것>
-체홉 作-
***동우***
2018.06.14 04:34
체홉의 권고.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능력.
'이보다 더 나쁠 수 있다'라고 인식하고 행복해 하기.
安分知足.
是亦過矣.
自足者는 不彰이랍니다. ㅎ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환희이기를.
스스로에게조차 숨어있는.
***아네스***
2018.06.16 11:05
체홉의 단편 '내기' 라는 작품 지금도 가슴에 화인처럼 남아있어요.
인생은 아름다운 것... 감상하면서 지혜와 더불어 종교적인 마음이 느껴집니다.
***┗동우***
2018.06.17 04:44
오랜만입니다, 아네스님.
인생이라는 명제를 가슴에 화인으로 남기는 체홉의 작품들...
리딩북 포스팅에 '내기'를 아직 올리지 않았는데 찾아 올려야겠군요. ㅎㅎ.
그리고.
아네스님의 단편소설 '화사한 날의 벌초'
세계문인협회 문학세계 문학상 소설대상 수상, 거듭 축하합니다.
더워지기 시작하는 즈음, 여전 건필하시고.
집필도 좋지만 건강도 유의하시면서.
우리 연배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지요. ㅎㅎ
올해 부산 나들이 하신다니 그때 뵙시다.
<내기>
-체홉 作-
***동우***
2018.10.22 23:21
체홉의 '내기'
15년의 감금과 2백만 루불.
설문조사를 한 바, 고등학생의 50% 이상이 10억이 생긴다면 1년 쯤 감옥살이 하는건 괜찮다고 한다는 기사를 전에 어디선가 읽었습니다.
그렇게 따져서(15년으로) 2백만 루불은 현재 우리 화폐가치로 150억 쯤으로 추산합니다.
... 150억 꿀꺽하고 15년 감옥살이를 한다?
저 경우, 책과 음악과 술이 있으니 감옥보다는 좀 낫을랑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사양할랍니다. ㅎ
그런데 인생의 오의(奧義)는 그런게 아닌가봅니다.
세상 속의 노은행가는 15년 동안 불안과 초조로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관계를 끊고 갇힌 변호사는 15년 동안의 수많은 독서와 사색으로 달관에 이릅니다.
2백만 루불따위 한껏 비웃으면서 내기 만료 5시간을 남기고 스스로 계약을 파기해 버리고 마는군요.
이를테면 15년 동안의 무문관(無門關) 수행으로 바야흐로 부처가 된 것인지요. ㅎ
으흠, 체홉이 불교적 해탈을 이야기하는건 아닐테고.
<나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었노라. 아, 육체는 슬프도다. -말라르메->
이와 비스무리한 울림...
노은행가는 자기혐오와 자괴감에 떨면서도 변호사의 편지를 금고 속에 꽁꽁 간직합니다.
변호사가 나중 딴 말 할까보아..
어쩔수 없는 속물, 나 처럼.
죽음에 이르는 도정을 걷는 우리네 한살이.
세상사 희비쌍곡선의 고비마다 시역과의(是亦過矣,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뇌입시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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