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르네. 마테오 팔콘느]] (1,4,3,3,1)

카지모도 2020. 1. 2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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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르네> <마테오 팔콘느>

 

 

<르네>

-샤또브리앙 作-

 

***동우***

2013.02.05 05:45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Chateaubriand, 1768~1848)’의 ‘르네’

다음은 이 소설에 대한 작가 '이문열'의 해설입니다.

 

++++

<초월로 가는 길목으로서의 사랑>

-이문열-

 

샤토브리앙은 대혁명으로 처절하게 무너져내린 앙시앙 레짐의 찬연한 노을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꿈을 삶의 일부로 간주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를 존재하지도 않은 완전한 세계의 환상에 빠져 끝내 세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던 몽상가로 제쳐놓는다.

한때는 반혁명군으로 싸우기도 했고 그 싸움에서 패배한 뒤에는 오랜 망명객으로 신대륙을 떠돌았던 그에게 그토록 집착하였으나 끝내 잃어버린 세계는 환상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그 비극적인 몰락이 자아낸 뒷 사람들의 연민은 이제 전설로만 남은 옛 영광의 잔영에 더욱 휘황한 덧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도이든 체제이든 인류사에 일정한 수명을 가지고 존재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너지는 그 아침으로 온전히 무용해지는 일은 없다. 또 우리에게 새로운 것에 열광할 권리가 있다면 사라진 것에 연연할 권리도 있다. 하물며 그 새로움의 내용이란 게 기껏 그로부터 백년도 안돼 간교한 부르주아들의 허구로 판명되고 사람들은 다시 피흘리며 새로운 혁명을 준비해야 했음에랴.

이 작품 [르네]는 그런 샤토브리앙의 세계해석에는 조금 벗어나 있으나 사랑을 주제로 한 프랑스 낭만주의 단편의 한 정화로 꼽을 만하다. 잘 난 이론가들은 이 작품에서 근친상간의 모티브를 끌어내 원형분석을 시도할지도 모르고 남매콤플렉스를 들며 심리학적 분석을 하려들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은 내 이해 밖이다.

젊은 날 이 작품이 내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 사랑의 철저한 관념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베푸는 엄청난 효용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들 두 불행한 연인들에게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삶이 없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조차 어려울 만큼 육체와 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로서는 가벼운 살갗의 스침조차 없는 사랑도 사랑일 수 있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랑으로 우리 존재가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고독의 심연을 헤쳐 가는 유일한 수단으로 삼고, 그 사랑과 삶의 나머지 부분들을 기꺼이 맞바꾼다. 그리고 궁극으로는 그 사랑을 통해 초월의 길목으로 접어든다. 아멜리가 죽은 뒤 르네의 삶은 냉정하게 보면 방기이고 일탈이지만 젊은 내게는 그것조차도 초월의 한 양상으로 이해되었다.

그밖에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샤토브리앙의 문장도 있다. 비록 불완전한 번역본을 통한 것이기는 하나 젊은 시절 한동안 나는 애절함과 격정을, 회한과 고독을, 지성과 교양을 두루 드러내면서도 격조를 잃지 않은 문장이란 바로 샤토브리앙의 문장, 특히 [르네]에서 보여주고 있는 문장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토마스 울프의 [그대 가시 고행에 못가리]와 더불어 내 초기 문장수업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것이 이 [르네]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제 그때로부터 이십 년이 훨씬 넘어 다시 읽어보려는 느낌이 옛날과 같을 수는 없다. 액자형식의 이야기들은 낡고 느슨해 보이며, 세계는 일방적인 관념으로 이해되어 있고 감정은 너무 과장돼 있는 듯 느껴진다. 문장의 화려함에서도 어떤 전형성이 보여 젊은 날의 감동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나의 지난 이십년간이란 게 또한 어떠했던가. 단편의 재능이 없는 탓에 구성의 무게에 과도하게 짓눌려온 세월이었으며, 구조니 총체니 하는 용어들로 고전적인 문장론을 깔아 뭉개버린 강단이론가들에게 주눅들어 지낸 세월이었다. 내용도 애매하고 설사 유행적으로 확정된 내용이 있다 해도 결코 전폭적인 동의에는 이르지 못했던 리얼리즘의 주문에 가위눌려 지낸 이십 년이었다.

그런 세월이 과연 내 안목의 발전에만 기여할 수 있었을까. 순수한 감동을 잃어버린 대신 쓸데없는 눈치만 늘게 하지는 않았을까.

거기다가 샤토브리앙의 산 시대와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아제 와서 눈에 띄는 흠들에는 얼마든지 관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르네]는 사랑을 다룬 단편의 한 전범 가운데 하나로 아직 유효할 수 있다고 보아 주저 없이 골랐다.

++++

 

***동우***

2013.02.05 06:13

 

사랑.

'르네'의 저 관념적 사랑도 숭고하고 고상하고 아름답지 아니한가. (근친의 사랑일지라도).

그와 대비되는 인간의 현실에 기반한 굳건한 사랑의 모습.

 

실은, 영화 ‘아무르’의 ‘사랑’을 얘기하고 싶어서 '샤또브리앙'의 '르네'를 포스팅한 것이다.

음악 블로거 ‘저녁산책님’의 ‘아무르’ 감상의 글을 스크랩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좀 얘기하고 싶었는데. (저녁산책님 원칙은 스크랩금지.ㅎ)

 

이 영화에 대한 저녁산책님의 빼어난 포스팅.

http://blog.daum.net/isooklee/905

 

영화 '아무르'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는 80대의 음악가부부.

조르주(장 루이 트렝티냥粉)와 안느(에마뉘엘 리바粉).

이들 예술인 부부의 평온하고 품위롭게 영위하는 일상.

그것은 참으로 고상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가 병이 들었다.

아내의 육체는 시나브로 파괴되어 간다.

노년의 '무자비한 그 대학살'이 아내에게 밀어 닥치는 것이다 (‘필립로스’의 표현)

육체가 무너지고 뒤따라 정신이 무너진다.

인간성, 그 자존(自尊)은 피흘려 신음한다.

 

남편은 불편한 다리를 끌고서 아내의 손발이 되어 주어야 한다.

거부하는 아내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머리를 감겨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용변을 누이고...

무엇보다 아내의 절망적인 투정과 심통을 받아주면서 아내를 다독거려야만 한다.

 

아, 그리고 무너지려는, 사랑하는 이의 그 자존(自尊)만은 저대적으로 지켜주어야 한다.

그것은 곧, 남편 자신의 자존이기도 한 것이다.

아내 자존의 파멸은 아내를 향한 오로지한 자신의 사랑의 자존인 것이다.

남편은 어떻거든 그 사랑을 지켜내야만 한다.

절대적 삶의 조건이다.

 

자식을 비롯한, 그들은 어디까지나 제3자이다.

그들의 사랑 역시 진실한 것일터이나 관계가 만들어 놓은 상투성 또한 없지 아니하다.

왜 엄마를 입원시키지 않느냐는둥(엄마는 그토록 끔찍하게 병원을 싫어하였는데) 그 상투성은 남편의 사랑의 형식을 공격한다.

그에도 상처받지 않을수 없다.

 

아내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린다.

육체가 해체되고 정신이 해체되고 아, 무엇보다 자존의 그 사랑이 해체되려 한다.

사랑의 한계, 그 지점에서 남편은 불멸의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 아내를 질식 시킨다.

고운 옷을 입혀 아네의 주검을 침대에 눕히고 꽃잎으로 어여쁜 아내를 장식하고 자신의 사랑이 잠들어 있는 그 공간을 밀폐시킨다.

아무도 침입하지 말라..내 사랑, 아내의 주검곁에. 우리의 사랑은 불멸이다.

인간으로서 최선인 불멸.

 

“이 영화는 얄짤없이 엄정한 현실을 우리에게 들이밀 뿐이다” (저녁산책님의 얼마나 적실한 표현인지.)

스크린에는 귀에 익은 슈베르트와 베토벤이 흐르지만, 음악이 어떤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파이널, 엔딩 크레딧 올라갈적에도 음악 한소절 흐르지 않는다)

아무런 낭만적 필터링없이,, 가차없이..폐부를 찌르는.. 사랑의 그 리얼하게 엄혹한 현장을 한정된 공간 속에서 냉정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보여 줄 뿐이다.

 

사랑.

사랑의 실체는 무엇일까.

저 '르네'의 불변의 사랑이 오로지 관념일수 만은 없듯이, 이 늙은 남편의 사랑은 리얼한 현장의 한 컷 그림일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 또한 불멸의 사랑이다.

 

이성을 향한 사랑은 이렇게 싹이 튼다.

핑크빛 풍선처럼, 귀에서 종소리 울리는 환상으로, 달콤한 장미향 가득. (저녁산책님)

세월과 더불어 저와 같은 분홍색 행복함은 성숙한 사랑으로 점점 내실을 기할 것이다.

그리하여 르네와 같이 저 관념적 절대성(근친간 사랑이라서 더욱)을 숭모하여 사랑은 불멸이 되는가.

 

흐음, 더 지껄일 말 있을듯 싶은데 안하련다.

 

이 영화를 한번 보라. 젊은이들.

그리고 연애하는 상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리고 먼 후일을 그려보라.

늙어 주름진 얼굴에 가득한 꽃의 영광을, 초원의 빛을.

 

그리하여 '아무르'의 저 사랑을 평하려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그저 한번쯤 느껴보라는 말이다.

 

젊은이는 결코 늙은이를 연기해 낼수 없다.

안느(에마뉘엘 리바粉)가 이번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는다면 나는 다시 아카데미의 권위를 인정하려 한다.

 

***저녁산책***

2013.02.06 11:18

 

동우님, 오늘은 올려주신 책 제목만 일별하고 다시 읽으러 오겠습니다.

 

아..부족한 표현들을 이렇게 인용해 주시니..넘 송구합니다.ㅜㅜ

사실 동우님의 멋진 포스팅 기대하고 있었는데..영화 본후 그 일렁이는 감정을 못 참고 그만 ..ㅜ

 

***동우***

2013.02.07 05:11

 

저녁산책님.

시간나실 적, 읽고 싶은 것 있으실때 재미롭게 읽어 주시면.

저녁산책님의 안목이 읽어주시는, 그로서 나는 기쁘답니다. ㅎ

 

'아무르.

저녁산책님의 포스팅 접하고 나는 접었지요.하하

 

바로 나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해 주셨는걸요.

전율같은 그 서늘함.....

 

 

 

<마테오 팔콘느>

-메리메 作-

 

***동우***

2013.02.15 06:00

 

‘프로스페르 메리메 (Prosper Mérimée, 1803~1870)’의 ‘마테오 팔콘느’

 

아래 글은 '이문열'의 작품해설입니다.

 

++++

<사내만이 연출할 수 있는 비정의 미학>

-이문열-

 

설령 죄를 짓고 쫓기고 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숨겨주고 돌봐주기를 청해오는 자가 있다면 이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유목민의 전통이다. 그 전통이 어떻게 코르시카의 율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마테오 팔콘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와 같은 '둔피처 제공의 의무'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명사회에서는 오히려 범인은닉죄를 구성할 수도 있는 그 의무가 거기서는 사람값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같은 것이 되어 있다.

비록 열 살 밖에 되지 않았으나 마테오의 아들 포르튀나트도 그런 코르시카의 율법을 거의 본능적으로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은전 한 닢을 받고서야 범죄자 쟈네트를 숨겨주는 데서부터 벌써 포르튀나트는 그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의 율법과는 어긋나는 경향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헌병의 은시계에 홀려 쟈네트를 내어줌으로써 그는 결정적으로 그 율법을 깨뜨리고 만다.

마테오 팔콘느가 얼마나 아들을 사랑했는지는 이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내리 셋씩이나 딸을 낳은 뒤에야 낳은 아들이며 그뒤 십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해 결국은 유일한 아들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그 아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 열 살의 나이는 흔히 어떤 종류의 죄에서든 면책의 특권을 누릴 만하다.

그렇지만 이 씩씩한 사내 마테오는 자신들의 율법에 따라 끝내 그 아들을 처형하고 만다. 그 율법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도 일생 몸을 담고 살아야 할 코르시카의 문화와 정서가 만들어낸 삶의 원칙이다. 그가 용서한다 해도 그걸 어긴 아들의 남은 삶은 뻔하다.

설령 아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맞지 않은 경향을 고친다 하더라도 이미 저질러진 일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그의 남은 삶을 치욕과 고통에 빠뜨릴 것이다.

마테오 팔콘느가 연출하는 비정의 미학 뒤에는 바로 그런 점을 헤아린 아비로서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지나 않은지.

<마테오 팔콘느>는 사실주의의 대두 이후 자잘하고 심약해진 남자들과 그 일상적인 삶에서 일쑤 소재를 구해온 서구문학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 작품이다.

자식을 쏘아죽이는 아비가 겪어야 할 내면의 갈등을 한 줄 내비침 없이 얘기를 맺는 작가 메리메의 냉철함도 작품의 비장미를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감격무용론을 주장한 메리메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작가 메리메는 양쪽 모두 화가인 부모와 <미녀와 야수>로 유명한 동화작가를 할머니로 둔 예술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극작가, 역사가로서도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처녀작은 <클라라 가즐의 극들>이라는 희곡집이며 <샤를 9세 연대기>라는 역사소설로 문명을 높였다. 장편으로 <콜롱바>가 있고 괴기소설류로 여럿 있으나 가장 찬사를 받은 작품은 1830년에 발표한 <마테오 팔콘느>를 비롯한 단편들이었다.

<카르멘>과 <이중의 요새>등이 유명하며 단편집 <모자이크>는 그에게 천부적 단편작가라는 평판을 가져다주었다. 스탕달을 스승으로 모셔 프랑스 근대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꼽힌다.

한편 프랑스 문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낸 메리메는 세속적으로도 적지 않은 성취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 언어학 고고학등의 연구로도 이름을 얻었고 제2제정 때에는 나폴레옹 3세에게 중용되어 궁중을 드나들기도 했다.

그의 죽음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소식이 준 충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전해질 만큼 그는 자기의 시대와 민족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동우***

2013.02.15 06:04

 

삼년 시묘살이.

묘단(墓壇)에서 은은하게 피오오르는 향연(香煙)의 형식은 지극히 향그롭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의 명분 (전국시대 도덕율) 때문에 아들 노부야스에게 배를 가르게 한다.

오콩코는 신탁(부족의 도덕률)으로 아들과 진배없는 소년 이케메푸나를 도끼로 내리 찍는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사람을 죽인 자, 납치한 자,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출애급기 21장)

 

사람살이란 시공(時空)의 상황 규범 속에서 누려지는 삶이다.

그로 인한 내적도덕률은 사람살이의 숙명적 당위이다.

 

아, 그리하여 사람살이란 스스로 비장(悲壯)하여 스스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마테오 팔콘느, 아비의 저 도덕적 자아를 ‘엄정한 기품’이라고 한다면.

포르튀나르, 아버지의 손에 죽는 저 소년의 죽음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날더러 잔인한 놈이라고 할 터이지.

 

으흠, 이 생각 풀어 놓자면 장황하고 힘에 부친다.

 

나는,

저와 같은 엄정한 형식으로 생을 마치고 싶은데.

통재라, 내게는 형식이 없구나.

 

***teapot***

2013.02.16 14:44

 

엄정한 기품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가 붙네요.

굉장히 파워풀하지만 소름끼치는 이야기입니다.

잘 읽었읍니다.~

 

***동우***

2013.02.17 04:55

 

그래요, 티팟님.

여성분에게는 어떤 파워풀한 느낌 없을수 없을겝니다.

또한 소름끼치는 느낌도.

 

메리메의 건조한 문체.

추호의 감상이나 연민 따위 용납치 않는듯한.

 

티팟님의 접속사 그래도~ 그래도~ 처럼.

여성성에 소구하는 바, 그것이 메리메 문학의 하드보일드적 매력이기도 할테지요.ㅎ

 

아, 제 자식을.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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