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서머셋 몸]]
<루이자> <산비둘기소리> <시인>
<루이자>
-서머셋 몸 作-
***동우***
2015.09.07. 05:25
서머셋 몸의 ‘루이자(Louise)’
아픈척 하기, 불쌍한 척 하기.
인정이나 동정에 호소하고자 하는.
우리 심리 기저에 얼마쯤 가지고 있는, 일종의 어리광이라 할수 있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일종의 방어기제일듯도 싶습니다.
학교가기 싫어 꾀병 부리기... 여자의 마른 눈물따위.
동물에게도 생존을 위한, 이기적 유전자의 이와 같은 작용이 있다고 합니다,
맛없는 척 하기, 죽은 척 하기..
이런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전에 티브이에서 보았는데 어떤 할머니는 길거리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들여 온 집안을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무엇 하나라도 버리지 못하고 모아놓는 그것은 저장성 강박장애라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랍니다.
또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프로에서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소녀를 보았는데, 그걸 허위성 강박장애라고 한다지요.
그런데 루이자의 저 꾀병은 강박장애라기 보다 이기주의에서 우러난, 지극히 의식적인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안일과 평안을 위한.
저것도 정신병리적인 요소가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참 얄밉습니다.
땡깡을 부리거나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심지어 앵벌이가 연상 될 정도로.
말미에 어떤 반전을 기대하였는데 루이자는 그냥 죽어주시는군요.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 서머셋 몸다운 시니컬함이 배어 있군요.
<루이자는 자신을 살해한 딸을 용서하고 죽어 갔다.>고. ㅎ
아픈척 불쌍한 척은 얄밉기는 하지만 그닥 혐오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착한척 제일 고결한척, 살아오면서 자신은 아무런 흠결이 없는양 폼을 잡는건 몹시 혐오스럽습니다.
이미지로 표심을 얻어야 하는 정치꾼들, 일종의 상징조작으로 자신을 치장합니다.
나중 진실이 뽀록났을때 뒷감당 어찌 하려고. (특히 진보를 표방하는 여럿 정치꾼들..)
***홍애(虹厓)***
2015.09.07 16:44
꾀병은 저 홍애의, 특징이지요.
그것도 사람 봐가면서... 도가 텄어요.
딱 가정용이지만, 통하니 적절히 쓰면서 이제는 반질반질 ㅎㅎ
***┗동우***
2015.09.09 04:58
루이자에 비하면 홍애님의 꾀병은 내 보기에 어떤 종류의 애정표현이 아닐까.. ㅎ
가정용 꾀병이라면 일종의 여우짓이겠는데.
홍애님 아무리 그래봤자, 내 알거니와 홍애님은 절대로 여우는 될수 없는 사람, 오히려 곰에 가깝지요. (이크, 실례. ㅎㅎ)
조박사님 책 출간, 예다가 축하인사 눕힙니다.
홍애님의 정성도 알알이 박혀 있을 것.
<산비둘기 소리>
-서머셋 몸 作-
***동우***
2015.09.11. 05:43
서머셋 몸'의 이 소설 영어제목은 'The Voice Of The Turtle' 입니다.
'거북이 목소리' 란 말일텐데 '산비둘기 소리'라니.
무슨 다른 뜻이 있는가 'turtle'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는데 '거북'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뜻은 없습디다.
산비둘기는 'turtle dove',던데.
나도 산비둘기 울음소리는 태종대 숲길에서 자주 듣습니다.
그 소리는 '이졸데'의 아리아나 프리마돈나 '라 파르티르느'와는 전혀 어울릴법 하지 않은, 어딘가 청승맞은 소리던데..
그런데 어이하여 '산비둘기 소리'로 번역하였는지 그 이유를 도통 알수가 없네요. (아시는 분 있으면 갈처 주시면 후사하리다. ㅎ)
거북이에게 목소리가 있는가 모르겠지만, 차라리 들리지 않는 '거북이 목소리'로 하는게 역설적 알레고리가 있을 듯도 합니다만. ㅎ
어쩄거나 서머셋 몸의 소설들은 읽을수록 인간에 대한 냉소주의를 짙게 느끼게 합니다.
브름즈베리의 세 여인의 살롱, 드넓은 응접실의 책장에는 내용은 조야하지만 껍대기는 화려한 책들이 즐비하고 벽에는 유명화가들의 모사화가 걸려 있습니다. (설마 버지니아 울프의 브룸즈베리 클럽을 빗댄건 아니겠지요.ㅎ , 예전 우리나라 졸부들의 거실. 서가에 꽉 들어찬 금박 번쩍이는 호화판 양장본 전집류, 아이들 바이엘 멜로디나 똥땅거리는 그랜드 피아노, 마란츠등 고급 오디오 기기에서는 고작 백년설의 옛노래나 흘러나왔지요.)
제법 이름난 문화인이라면 어즙잖은 그의 한마디에도 그저 자지러집니다.
기성작가를 매도하여 따지기 좋아하고 자기 주장에 핏대세우는 젊은 작가들, 그걸 기개로 알고 설쳐대지만 세상을 모르는 풋내기들입니다.
대체로 그런 것들은 객기이거나 자의식이거나 열등감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그런 저돌적인 정열과 진지함은 인간의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분명히 그 속에서 젊고 벅찬 사랑, 이상주의적이고 성적으로도 적극성을 띤 사랑이라는 인상이 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실로 생기있고, 감명 깊고, 숨막힐 듯한 기분을 준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맥박이 지면(紙面)을 뒤흔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모하고 노골적이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건 하나의 자연력(自然力)과 흡사하였다. 즉 정열덩어리라고 부를 수 있었다. 다른 어디를 찾아보아도 인생에 이렇듯 감동적이고 엄청난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그는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나, 역시 마음속으로는 침착하지 못하고 들떠 있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제일 자신있게 내세우는 것은, 실상 자신이 없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자신에게 대해서일 것이다- 숨기기 위한 태도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듯이 하면서도, 항상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자기의 주장에 동조해 달라는 듯이 보였다. 일부러 상대방을 초조하게 만들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지껄여, 그가 자부하는 대로 멋진 사나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는 걸핏하면 자기 또래의 문인들을 경멸하고, 또 그것이 그의 제일 큰 관심거리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기의 소질을 알고 있으나,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자기 장점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연히 반발하게 된다.>
저런 테크닉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숙성해질 터, 그 순수함만은 사줄만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이런 철이 없고 거만한 젊은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내가 동정(同情)의 주머니 끈을 바짝 조이는 것은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젊은이를 만났을 경우이다.>
프리마돈나 '라 파르테르느'
책을 한권이라도 읽었는지 의심할 정도로 무식하고, 오로지 자기중심적 성품이면서 화장과 치장에 올인하는 허영덩어리.
남자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매혹되었는지, 자신의 정사(情事)를 요모조모 꾸며서 자랑하는 여인.
명색 성악가이면서 베토벤 넘버 5를 들으면 내처 잠이 드는, 그러면서 남 앞에서는 이렇게 떠벌이지요.
<베토벤을 듣고 있으면 너무나 크게 감동되어, 음악회에 가는 것을 망설이게 될 지경이에요. 그 아름다운 테에마가 머릿속에서 줄곧 울려 퍼지기 때문에 그날 밤은 뜬 눈으로 새거든요.>
라 파르테르느는 프리마돈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려는 촛자배기 작가 피터 멜로우즈에게 떠벌입니다.
자신은 얼마나 내성적이고 측은한 사람인지, 세상 사람이 떼를 지어 얼마나 자신을 들볶아대는지.
극장 매니저들에게서는 가혹한 취급을 당하고, 지휘자에게서는 비열한 농간을 받고, 가수들은 한 패거리가 되어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고 하며, 그녀의 적들에게 매수당한 비평가는 그녀에 대한 중상을 퍼붓는 기사를 쓰고, 그녀가 모든 희생을 개의치 않고 사랑한 애인들에게서는 배신의 쓰라림을 겪어야만 하는지.
그래도 자신이 예술을 위하여 얼마나 용기있는 사람이며, 자신의 천재적 재능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해 왔는지.
피터 멜로우즈는 라 파르테르느의 그 빤한 거짓에 홀떡 넘어가고 맙니다.
<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여인상(女人像) 그대로에요. 내가 그녀를 만나보기 전에 벌써 그녀의 성격상의 특징들을 대략 정해 놓고 있었던 줄은 그녀 자신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요.>
이 소설의 話者('서머셋 몸'이렷다)는 온갖 미사여구로 지껄이는 여자의 거짓과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남자가 한심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흥미롭습니다.
<야유적>인 흥미인 것입니다.
드디어 소설이 출판되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한껏 고상한 여인으로 추켜 세워진 자신을 속으로는 얼마나 자랑스러워 할까마는, 기막힌 내숭을 떠는 라 파르테르느.
話者는 그녀가 얼마나 얄미웠을까요.
그러나 그날 밤 자연은 너무나 감미로운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수목과 밤바다의 향기가 넘실대는 테라스.
물결을 철썩이는 밤바다. 밤하늘에 실루엣을 수놓는 웅장한 삼나무 숲..
나르시시즘에 도취되고 자연에 마취된 '라 파르테르느'는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미스 그레이저는 대답대신 슈우만 가곡의 첫소절을 반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이라면, 목청을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부를 수 있으므로, 미스 그레이저가 이 곡을 택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라 파르티르느는 나직이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자기가 듣기에도 매우 청아하다고 생각했던지 다음에는 목청을 한결 돋구어 불렀다.
노래는 곧 끝나고 고요에 잠기게 되었다.
미스 그레이저는, 그녀의 목청이 지금 쾌조(快調)이며, 그녀가 계속해서 더 부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대한 프리마돈나는 방안의 밝은 조명을 등에 업고 창가에 서서 검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 삼나무가 밤하늘에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조용하고 감미로운 밤이었다.
미스 그레이저가 다시 두 소절을 반주했다.
나는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라 파르티르느는 그 소절이 어느 곳인지 분간하고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녀가 포우즈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부드럽고 조용하게 웃으세요,
두 눈을 살며시 뜨세요.
이것은 이졸데의 죽음의 노래이다.
그녀는 목청에 부담이 가는 것을 걱정하여, 바그너의 가극에는 출연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 노래는 아마도 가끔 연주회에서 불렀던 모양이다.
지금은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아니라 가냘픈 피아노 반주이므로, 그 점은 염려할 것이 없었다.
절묘한 곡조가 그녀의 목소리에 실려 조용히 불어오는 밤바람을 타고 바다 위로 퍼져나갔다.
더할 나위없이 로맨틱한 풍경이었다. 그 노랫소리는, 별빛 찬란한 이 아름다운 밤을 배경으로 삼아, 사람들의 가슴을 몹시 설레이게 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섬세하고 아름답고 풍요한 수정처럼 밝게 들렸다. 그녀는 그런 목청에 놀라운 감정을 담아서 노래하였다.
애절하고 아름다운 그 가락은, 때로는 짜릿짜릿하게, 또 때로는 부드럽게 내 가슴 밑바닥까지 스며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노래를 마쳤을 때, 목구멍에 치솟는 뜨거운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번져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 말하기가 싫었다.
그녀는 창문을 통해 태고적부터 늙을 줄 모르는 바다를 내다보면서, 정물(靜物)처럼 언제까지나 조용히 서 있다.
그녀는 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여자인가!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가 설사 여러가지 어처구니없는 결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온갖 미덕을 아울러 지닌 전형적인 여자로서 그녀를 작품에 소화시켰다는 점에서, 피터 멜로즈로 하여금 선수(先手)를 쓰게 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비정상적인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으레 비난할 것이다.
그녀는 물론 얄미운 여자이다. 그러나 이런 것도 감히 그녀의 매력 앞에서는 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에고와 허영과 거짓.
그런 것들이 진실과 아름다움으로 화하여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제비 춤꾼의 스텝... 엿장수의 가위소리... 각설이의 품바타령... 막걸리 한사발에 흥얼거리는 낭만에 대해서... 마파람에 떨구는 실연자의 눈물..
그런 소소한 것들도 진한 감동을 주는 경우 없지 아니합니다.
지니고 있는 하찮은 스킬이라도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신비한 것일런지요.
아름다움이란 그 신비함에 근거하고 있는 '어떤 것'일 겁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트리스탄의 주검 앞에서 이졸데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따라 죽습니다.
사랑은 완성되었습니다.
지금 내 방, 노먼의 노래는 감동적입니다.
<시인>
-서머셋 몸 作-
***동우***
2015.09.12. 05:26
서머셋 몸의 ‘시인’
우리 세상.
정열과 영웅적 패기 있는가.
전율을 일으키는 오색찬란한 활력소의 샘(泉) 있는가.
반항과 파괴의 담대한 모험 용납될 구석 있는가.
이루지 못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 있는가.
윤심덕 있는가.
조지 고든 바이런이 가능한가.
어림반푼 어치도 없다.
서머셋 몸의 세상에도 없던 것을.
죽어버린 낭만.
삼가 조의(弔意)를 표하노라.
칼리스트 데 산타 안야. <이런 이름의 시인, 서머셋 몸의 가공(架空)의 이름으로 간주하련다. 검색하여도 不明인데 실존인물이라면 내 무식을 용서하시라,>
옆길로 샌다.
나는 코끝에 건다.
명사(名士)들이란 사람에 대하여 거의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유명인사 손한번 잡아보려 애쓰는 사람들을 딱하게 여긴다고.
스타에 자지러지는 아이들에게 쯧쯧 혀를 찬다고.
그런가.
아니다.
위선이거나 비겁한 자의식이다.
유명인의 후광에 압도되는 스스로의 꼬라지가 불쾌하여 내지르는 시셈이거나 부러움일시 분명하렷다.
옛날 직장의 세레모니때 열(列)의 꽁무니에 도열하여 섰던 나를 기억하고 있다.
허리 깊숙이 굽히고 세상에 떠르르한 유명인사의 손을 두 손 모두어 잡았을 적 감격(까지는?)을.
그 중에는 당시 건설부장관이었던 김재규도 있었다.
선입견이 인물에게 아우라를 만든다.
어떤 이의 목에 드리워진 시장산 스카프가 내 눈에는 이브생로랑으로 보였던 적이 있었다.
반면, 삐까번쩍한 어떤 부자의 손목에 걸쳐진 로렉스 손목시계가 싸구려로 보였던 적도 있었다.
선입견에 속지 말지어다.
아래는 움베르토 에코의 글이다.
++++
<유명인을 만났을 때 반응하는 방법>
몇 달 전 뉴욕에 있을 때의 일이다. 거리를 걷고 있는데, 아주 낯익은 사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내는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그의 이름이나 그를 알게 된 경위가 생각나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는 만난 낯익은 얼굴은 마치 문맥을 벗어난 낱말처럼 혼동을 준다. 자기 나라에서 사귄 사람의 얼굴을 외국에서 마주친다든가, 외국에서 알게 된 얼굴을 자기 나라에서 보게 되는 경우에 그런 혼동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날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그 남자는 너무나 낯이 익은 사람이어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인사를 건넨 다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는 <아, 움베르토, 요즈음 어떻게 지내?>하면서, <전에 얘기했던 그 일은 잘 처리되었어?>라고 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하지? 못 본 척 할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그는 아직은 길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지만 곧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릴 참이었다. 차라리 내가 선수를 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의 목소리와 처음 나눈 몇 마디 이야기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를 다시 짐작해 보는 거야.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두 발짝밖에 되지 않았다. 그를 향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손을 내밀려는 찰나, 문득 그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그는 다름아닌 앤서니 퀸이었다. 물론 우리는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나는 만면에 띠려던 미소와 악수하려고 내밀던 손을 재빨리 거두고 눈길을 허공으로 비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가서 그 일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나는 그때의 내 행동이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찰턴 헤스턴을 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우리 기억에 깊이 새겨져 있다. 스크린 속의 그들과 더불어 허다한 시간을 보낸 탓에, 그들의 얼굴은 친척의 얼굴만큼이나, 때로는 그 이상으로 친근한 느낌을 준다. 우리가 설령 매스컴 전문가로서 이미지의 현실적인 효과에 대해서 토론하고,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사이의 혼동 및 그런 혼동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다 해도, 그런 증후군에서 결코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혼동보다 더 고약한 일이 생긴다는데에 있다. 미디어에 얼굴이 많이 팔린 사람들이 고백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일정 기간에 걸쳐 TV에 자주 출연했던 사람들이다. TV 스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 나가면 남들이 알아볼 만큼 꽤 오랫동안 토크쇼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은 모두 불쾌했던 경험을 토로했는데, 그 내용이 한결같다.
우리는 대체로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는 사람과 마주치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지도 않고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않으며 그가 듣는 데서 그에 대해 큰소리로 지걸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무례할 뿐만 아니라 도가 지나치면 공격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어떤 술집에 온 손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친구의 새로 산 넥타이를 가리킬 때조차도 손가락질 같은 건 안 할 사람들, 그런 점잖은 사람들이 잘 알려진 얼굴들을 대하면 완전히 딴판으로 행동한다.
대중에게 신기한 동물 취급을 당했다는 유명인들의 얘기는 이러하다. 담배 가게에서든 식료품점에서든, 또는 기차를 타거나 레스토랑의 화장실에 갈 때든, 그들이 지나갈때면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친다.
"너 봤지. 저거 아무개야."
"아니, 못 봤는데. 확실해?"
"확실하다마다. 분명히 아무개야."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떠벌린다. 그 아무개가 자기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건만, 마치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댄다. 이들은 미디어라는 가상 세계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주인공이 갑자기 현실 세계에 등장한 것을 보고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그를 실재하는 인물로 선뜻 받아들이기보다는 마치 그가 여전히 가상 세계에 속한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가 자기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나 잡지 속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들 못대로 지껄이는 것이다.
그건 마치 내가 거리에서 만난 앤서니 퀸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하는 거나 다를 게 없다. 즉, 앤서니 퀸의 멱살을 잡고 공중 전화 부스로 끌고 간다. 그런 다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 한번 맞혀 봐! 바로 앤서니 퀸이야. 그런데, 이자는 영화 속에서 어떻게 걸어나왔는지, 꼭 진짜 사람 같아." (그러고 나서는 앤서니 퀸을 옆으로 밀쳐 버리고 내가 하던 일로 돌아간다.)
처음에 매스 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가상 세계를 현실로 믿게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현실을 가상으로 여기게 한다.
TV 화면이 현실을 많이 보여 주면 보여 줄수록 우리의 일상은 점점 더 영화처럼 되어 간다.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우리는 몇몇 철학자의 주장과 비슷한 이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에는 오로지 우리만이 존재하며 우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신이나 악마가 우리의 눈앞에 투사한 영화일 뿐이라고.
(19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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