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9 1988. 5. 1 (일)
푸른 오월이다.
그러나 날씨는 찌푸린다.
비디오로 본 국산영화 임권택감독 '티켓'
흥부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게 차분하게 그려낸 영화.
라스트신, 김지미가 품속에서 따뜻한 달걀(탁구공)을 꺼내 놓으며 "식기 전에 드세요"하는 장면, 스톱모션의 그 장면은 감동의 전율이기도 하다.
진정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사는 이 산업사회의 속성은,
정.
신뢰.
마음으로부터의 이해.
이런 인간에 가장 필요한 덕목들을 잃어 가는 현장이 이른바 이 산업사회의 얼굴이다.
교회가기 전의 오전.
기도.
"외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아 버리고 내적인 사물만을 살피는 눈을 가진 자는 복되다." -토마스 아 캠피스-
수도자의 행복은 오직 신께 전념할수 있는 객관적이며 주관적으로 부여된 상황, 그들은 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속세에서 부대끼며 소리지르며 피흘리며 살아가는 우리.
외적인 사물에 대해서 아예 눈을 감아버릴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수 있겠나?
<오후>
교회 다녀오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녀'
나의 소망은 英俊이에 대해서 바로 이것이다.
한낮.
모차르트 울리는 내 방의 적요함,
俊이는 곁에서 이원수의 수필을 읽고 있으며 나는 곧 존 딕슨 카의 추리소설을 읽을 참이다.
두뇌를 기울여야 하는 독서, 또는 경건한 독서는 언제나 이런 한적한 일락의 시간에서는 재껴지게 마련.
나는 어차피 생활인이 아니냐?
이런 종류의 독서 엔터테인먼트는 생활인이기에 필요한 것이다.
모차르트의 신을 향한 찬양이 울리는 한낮.
나는 진정 이러한 한적의 일락을 사랑한다.
책상 위의 소주 한병.
이것 또한 사랑한다,
이런 종류의 일락은 행복이지만 지독한 음란의 환상에 빠져버리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락인가.
형편무인지경인 나락에의 함몰, 일단 그런 일종 변태적인 동기에 유도되기 시작하면 헤어날 길이 없다.
건강하게 처리할수 있는 것, 이것이 곧 교양일진데 내 교양이라는 것이 본시 형편없으며 전형적인 바리새인의 교양일 뿐이다.
이러한 때, 적요의 일락은 카오스의 일락이 되고 만다.
15060 1988. 5. 3 (화)
다소 늦잠.
꿈속을 헤매이다.
형제애가 주제인 드라마.
기도.
기도 중 느끼는 한가지 사실.
내 이제까지의 인생 역정에 있어서의 아쉬움이 있다면 내게 동기를 부여해주는 존재가 없었다는 점이다.
인생이나 삶의 방식이나 진학의 문제나 학교생활이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나를 충고하고 코치하는 존재가 없었다.
곧 아버지가 없었구나하는 중요한 느낌.
아버지 대신...스승,형,선배.친구.
날개를 퍼덕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였다.
다만 무분별한 독서는 방향을 바르게 찾지 못하였고, 예술지상주의는 혼돈 속의 악마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길을 비틀비틀 걷다가, 엎드려 자다가, 다시 되돌아서 술을 마시다가 그렇게 이정표없이 살아 온게 아닌가?
더구나 나의 천성은 게으르고 쾌락적이고 의지박약이며 이기적이기까지 한 것을.
안으로나 밖으로나 무엇하나 좋은 징조는 발견할수 없는 실존이었다.
이제 등대를 갖고....
이제 하나님 나의 아버지, 목적과 동기를 주시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나의 아버지, 방법까지 주실거다.
<밤>
술마시다. 커단 덩치의 선량한 박세동과.
진부하며 진부하며 진부하기 그지없는 대화들, 화석을 꺼내어 조미료를 친들 맛이 나겠는가.
소리. 목청으로 내는 소리와 유리창 깨지는 소리는 소리로서 피차일반이다.
사람의 목소리라서 무기미한 소음보다 나을건 무언가.
직장의 다소 직위가 높다고하는 관리자들의 위기감, 그것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집단에 대한 신경질로 나타난다.
그 폭발이 말하자면 아무 뜻도 없는 목청 내지르기이다.
그가 능력없거나, 지혜없거나 할 때 그 목청은 비례적으로 커지기 마련.
우리나라 기업체의 관리 형태가 그런 식이다. 목청내지르기, 목소리 큰놈 이기기.
나의 현장에서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 대하여 역설한다면 알아들을수 있는 사람 뉘 있을까?
15062 1988. 5. 4 (수)
아침 어머니 다녀 가시다.
작취미성의 늦잠 잔 사이에 어린이날 손주녀석들에 대한 요식절차를 어머니는 바삐바삐 마치시고 돌아가다.
회사는 점점 쥐어짜기 시작한다.
괴로울 정도로 들들 볶아대기 시작한다.
누구보다 헌신적인 직반장들을 폄하고 깎아 내리는데, 나역시 중역들 모인 자리에선 폄론의 대상일 것이다.
그 까닭은 어느 직반장의 숨겨진 생각들이 과연 누구 편이냐, 현장공원 편이냐 회사편이냐 하는. 나에 대한 것은 아마도 저 친구가 과연 직반장과 공원들을 장악하고 회사 뜻대로 따라줄만한 능력이 있겠느냐하는.
민방위 훈련, 육사10기라는 강사.
군대식 달변으로 독설을 쏟아내는데 그 에피소드들이 꽤 재미있다.
내일 어린이날이며 장인어른 생신.
15064 1988. 5. 6 (금)
새벽 기도.
어제 장인생신, 처가.
S기 는 머슴애가 계집애처럼 무척 예쁘게 생겼다.
수척하여 마르신 장인, 그 분을 중심으로 다섯자식들의 효라는 것은 그다지 풍부치 못한 그런 분위기인데, 그 중 하나는 바로 나이다.
15065 1988. 5. 7 (토)
무거운 머리.
5시 기상하여 본 회퍼 좀 읽다.
기도.
야비한 회사, 관리직은 마음대로 조종할수 있는 허수아비란 말인가?
연장근무수당 폐지... 결국 감봉이 되는 꼴인데.
오늘 자정부터 썸머타임제.
15066 1988. 5. 8 (일)
오늘부터 썸머타임, 한시간씩 빨라진다.
육체의리듬은 그대로 두고 제도만 바뀌면 어떻거나?
어제 대취.
다스려 휴일의 회사 나간다.
그 현장에 매여 어머니께, 교회는 가지 못한다.
배관외주 김사장이 점심에 보신탕산다.
몹시 바람 부는 날.
지남호 출항, 1년이상 헤어저야하는 가족들, 안벽에 늘어서서 떠나는 배를 향해 손 흔들며 눈물 적신다. 나도 콧등이 시큰.
정지용의 시들....
15068 1988. 5. 11 (수)
스며들 듯 내리는 봄비 왼종일 안개처럼 흩뿌리다.
현장- 공기와 공정의 딜레이, 기능인력은 한계가 있고... 누가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거나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게보린 한알로 아픈 머리를 다스려 최선을 다하는 척 해봐도 밝은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나갈 뿐이다.
SB-333 출항.
나를 완벽하게 버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겨버릴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악착같이 끝까지 한줌 내 것이라고 움켜쥐는 그것.. 인간이란 슬픈 존재이어라.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씨지프스의 바위.
영원히 벗어 던질수 없는 자신의 업.
자아,이기,자의식,리비도...
우연히 펼친 성경의 이사야 한구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십자가,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라.
15069 1988. 5. 11 (수)
참 오래간만에 4시 기상.
이사야 공부, 시편 소리내어 읽다.
본 훼퍼 읽다. 평이한 글 속에 권고하는 간곡함이 느껴진다.
기도. 오래 엎드려.
아내,어머니...... 직장, 오늘 과우회의 회식까지.
눈물흐른다.
무슨 언어가 필요하랴. 말 못할 탄식의 말들을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아, 경건은 회복되었는가. 그 지고한 균형감각은 다시 살아났는가.
새벽4시의 기상은 내게 이토록 유리하다.
"개인의 묵상시간은 성경, 개인적 기도, 그리고 중보기도에 바쳐져야 한다."
"묵상의 시간은 우리들이 공허와 고독의 심연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한다. 즉 묵상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혼자 있게 한다. 그리고 묵상을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택해야 할 길에 대한 명확한 방향과 우리가 서야 할 튼튼한 바탕을 제시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북상에서 반드시 새로운 것들을 찾거나 경험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을 종종 잘못 인도하고 우리의 공허함을 증가시킨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묵상 중에 반드시 어떤 예기치 않은 특별한 경험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경험이 일어날수도 있지만 그런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상관없이 유익하다. 묵상중 우리는 커다란 영적 고갈이나 무관심, 어떤 반감, 심지어는 묵상을 할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때가 있지만 그래도 묵상은 유익하다." -본 훼퍼-
15070 1988. 5. 12 (목)
어제 과우회 모임에서 대취.
마룻바닥에 쓰러져 잠들고 일어난 시간은 이미 8시가 넘었다.
지각하느니 오늘 하루 쉬자.
키메라의 오페라 아리아 크게 틀고...
15072 1988. 5. 14 (토)
새벽.
전도서.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인생의 헛됨이여.
헛되고 헛되고 헛된 그것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들을 좇아야하는 슬픈 동물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기도.
기도의 언어는 진부할뿐, 다만 말못할 언어로...
희끄무레 밝아오는 창문.
새소리, 새소리, 영롱한 새소리.
<밤>
관념화 되어버린 어떤 외마디 단어를 끄집어 내려 애쓰는 술취한 밤.
끄집어 낸 그 단어는 '고향'이다.
내게 고향이 있었던가. 아니 이 도시인들에게 고향이 있는가.
고향이라고 발음할 때 어떤 따뜻한 숨결을 느낄수 있는가.
고향이라고 발음할 때 어떤 우러나는 눈물겨움이 있는가.
그 기억의 원형질의 소스를 갖는 사람은 행복하다.
돌아갈 곳, 돌아 가 눞는 곳이 있다는 것.
인문적인 어떤 것도 고향의 짓거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술집이,남포동이,디스코텍이,거리가...
예전 전혜린이 쓴 아스팔트 킨트라는 단어.
고향이 있는 사람들.
그는 온유하며 침착하며 오래 참는 사람.
그는 결코 히히덕거리지 않는다.
그는 술마시지 않고, 함부로 지껄이지 않는다.
나중에 그저 한번 씨익 웃는다.
그런데 나는 고향이 없으므로 그러 할 수가 없어 술을 마시노라.
15073 1988. 5. 15 (일)
어머니와 꼬부랑 마산고모님.
함께 교회.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J.
한마디, 단 한마디의 말.
J여, 당신은 가치있습니다... 영원히 여성다움.
언젠가 내 인생에도 여성다움의 포옹이 있으리라.
어딘가에 여성다움이 숨어 있으리라.
15074 1988. 5. 16 (월)
온화한 날씨, 푸른 오월.
베토벤의 첼로소나타가 유장한 선율을 노래하고 있건만.
내 영혼은 오늘 그다지 맑지 못하다.
선한 덕을 사모하는 마음은 어디에고 없다.
타락과 쾌락을 향한 그 어두운 불꽃, 도취케 하여줄 감각의 노오란 나락을 향하여 육신을 맡겨버리고 싶은 욕망.
월요일.
또다시 곤혹의 일주일이 시작되려는 아침.
언제까지인가. 이토록 가치없는 일의 되풀이.
이토록 악의적이고 유치한 관계의 지속.
언제까지인가.
어제는 잠시 에클레시아의 과즙을 맛보았는데.
"보라 색깔 속에서
뛰쳐나온 빨강색 구두 한짝
블레이크 그림처럼
불쾌한 환상
현실은 이런 거래요
불쾌함을 유식으로
웃어야 되는 거래요."
-성민 '무제'-
15075 1988. 5. 17 (화)
회색수면.
불면의 악한 영.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틈입함은 그 분이 주신 단순함을 잃어버린 탓임을.
복잡다단학 난마처럼 얽힌 심리의 어떤 상태라도 한방에 날릴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잃어버린 탓.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아랍의 무사가 큰 칼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오만가지 폼을 다 잡고 있지만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인디아나 존스박사, 한방 권총을 발사하여 잠재운다.
화장실에서 미가, 책상에서 빌립보서.
<밤>
회색수면 다음 날의 육체적고통.
초여름의 무더운 날씨.
안전모 눌러쓰고 장갑끼고 헤매이는 현장.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현장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현장에 관리 당하고 있다.
썸머타임 덕분에 7시 30분 퇴근도 그다지 늦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술이 아니면 회색수면의 이 뾰죽뾰죽한 신경 끝을 무디게 할 방도가 없다.
책상앞 진로에다 토닉 워터타서 참치캔 안주로 마신다.
이럴 때의 술은 탓하지 말자.
약이 아닌가? 아티반 대신.
아, 무엇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가?
무슨 미련 그리 많고, 무슨 갈등 그리 많고, 무슨 불안 그리 많고, 무슨 회한 그리 많고, 무슨 절망 그리 많길래 잠 못드는가?
호모 사피엔스로서 이성의 예지에 의한 절망이 배후에 있는가, 저녁 먹은 것의 위장에서 화학 작용 탓인가, 또는 생시의 누군가에 당한 무엇이 무의식 심층심리 속에 파묻혀 있다가 망령의 춤처럼 한밤중 내 정신의 바다를 춤추고 난리를 피는 것인가.
인디아나 존스의 권총 한방.
한방만 갈겨 주소서. 저 춤추는 괴물을.
불면의 나쁜 영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15076 1988. 5. 18 (수)
적당한 술은 이토록 유익하다.
간밤 숙면.
"하나님의 능력을 안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복된 일이다.
깊은 기도생활과 삶의 고뇌와 번민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평화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구도자들의 공통된 관심이다.
신령한 능력의 세계를 탐내는 것은 우리 인간만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며 나의 손이 닿고 나의 발이 닿고 나의 사랑의 가슴이 닿는 곳에 거룩한 삶의 자국이 일어난다고 믿는 생활은 종교 이상의 문제이다.
혼돈과 착각과 자기합리화의 어수선한 현실 속에서 지식이 주지 못하는, 또 세상과 사람이 주지 못하는 영적인 힘의 세계를 소유하는 일, 이것이 우리가 탐내야 할 삶의 절실한 분야이다." -전가화-
15077 1988. 5. 19 (목)
4시 기상.
토마스 아 캠피스, 마태복음.
기도.
이제 5시 15분.
俊 깨워야할 시간이다.
초여름 새벽 공기 가르며 뛰어보자, 아들아.
15078 1988. 5. 21 (토)
俊이와 새벽 달리기.
새벽 내 희락의 내용중 俊이와 더불어 이것 하나가 더 추가된 것이다.
J의 장점- 흑백 논리가 분명한 성격, 단순한 직선성, 솔직담백, 남의 험담을 혐오함, 약속이행의 철저함, 우유부단하지 않음, 동정심.
J의 약점- 상상력 부족, 불친절, 뻣뻣함, 사려없는 말씨, 즉발 반응, 정리성부족.
J나 나나 자신들이 조금만 변화하면 이 척박한 가시버시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을 모르니, 결국 피차 두 어릿광대.
<밤>
나는 술이 취하지 않으면 슈베르트를 가슴으로 들을수 없을 것이다.
디스카우의 저 리트를 받아들이는 것은 귀가 아니라 가슴이다.
슈베르트를 듣는 것이 이러 하듯이 무릇 예술이 내게 들려주는 말 못할 것들의 말을 듣는 것은 가슴이다.
옛날에는 영화도 가슴으로 보았던가?
남포동 3류 극장에서 의외로 좋은 영화를 보고서는, 글쎄 그게 '파계'였던지 '녹색의 장원'이었던지 '정글지대' 였던지, 나를 전율케 하여 허공에 붕 뜬 기분으로 배고픈 것도 잊어버린채 앉은 자리에서 3번을 연속으로 보았었지.
그 가슴을 주체할길 없어서 또 다른 극장의 영화, 서영춘나오는 국산영화 한편을 보고 중화 희석시켜서야 그 가슴을 진정시킬수 있었던 그때, 영화를 본 것은 눈이 아니고 가슴이었다.
그런 영화들은 지금 비디오 테이프로 구해 볼수 있고, 다시 옛날의 감동을 구할수도 있을 터인데, 나는 과연 지금 그 감동이 가능할까?
다시 영화도 가슴으로 볼수 있을까?
아니다.
내 지금 어른 스런 눈과 머리는 옛날 그 감동이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해 버렸거든.
또는, 어느 구석에 '그건 꿈이야. 그 감동은 꿈일 뿐이야. 그것은 내 것이 아니야. 비켜.'하는 속삭임도 있거든.
그런데 정말 슈베르트를 나는 가슴으로 듣고 있는걸까?
그런데 나는 옛날 영화를 가슴으로 보았던가?
맥주를 마신다.
비약, 비약,
가슴이 비약하는가?
그래서 말없는 것들의 말을 알아내는가?
보오들레르..
15080 1988. 5. 22 (일)
어머니와 교회.
목사님 설교.
마가복음 9장 '믿음이 없는 세대'
15081 1988. 5. 23 (월)
석가탄신일.
오전 흐리다가 오후들어 푸른 하늘.
아침. 어머니 오시다.
29일 이사에 대하여, 어머니는 나 듣지 않는데서 도와줄수 없다는 선언 같은 말씀.
어머니 가신후 그를 전해 듣는 내 마음 속에는 묵직한 바위덩어리 하나.
이 바위는 경제가 아니라 유아적 집착의 배신에 대한 괴로움의 바위이다.
珍 아빠, 장기 해외여행중 지독한 피부병 걸려 고생한다고.
전화하여 안부 묻다.
푸르고 푸른 하늘.
따스하게 내려 붓는 오월의 햇살.
그리고 오후의 적요함... 한가함.
오이디푸스를 망각하고 파묻히는 충족된 풍경화.
프로메테우스가 아닌 아폴로의 충일감.
유아적 집착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풍광의 충일함.
15082 1988. 5. 24 (화)
하루 종일 바람 불다.
마음은 공허하고, 사념은 하염없이 아득한 곳을 달린다.
황량한 환경의 나, 보이는 것, 느끼는 것, 상상할수 있는 것, 추측할수 있는 것들이 황량하다.
어머니... 형제.....관계라는 것....
관계, 완벽하다는 짝사랑 속에서의 절망감은 본노이기 보다 가없는 슬픔이다.
15083 1988. 5. 24 (수)
俊이 생일.
새벽.
무릎 꿇어 엎드려 긴 시간 기도.
치솟는 눈물.
시편 읽다.
이 새벽, 뛰자. 俊아.
15087 1988. 5. 29 (일)
이사준비.
태림아파트 1동 303호.
6년이상을 살아 온 집.
고맙다. 집아.
어제 저녁 어머니에게서 전화.
형수, 媛이에게 전화하라는.
도와 줄 염도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바쁜 와중에 전화하라니.
이럴 때 어머니는 정말 얄밉다.
오늘은 바쁘게 몸을 움직이자.
짐 짝 정리. 이사갈 집 청소.....
15088 1988. 5. 30 (월)
4시 기상.
화장실에서 히브리서.
어수선한 방안, 불끄고 엎드린다.
아버지 나의 하나님. 어언 6년째 살아 온 이 집에서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우리 아이들이 성장하였습니다.
이 집에서 많은 즐거움을 주시고 많은 괴로움을 주셔서 생활인으로 단련케 하셨습니다.
이 집에서 이제 살게 될 그 젊은 가족들에게 복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제 이사가는 동산아파트.
그 집에 하나님 나의 아버지, 함께 하여 주십시오.
앞으로 트인 바다와 뒤에 펴처진 숲을 주야로 접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손길을 느끼게 하십시오.
그 집에서 우리 온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 집에서 식구들의 건강과 경제를 이루도록 도와 주십시오.
오늘 이사 작업을 함께 하여 주십시오.
자, 이제 작업이다.
사람들 오기 전에 최대한 꾸려 놓아야 한다.
오늘 밤에는 새 집에서 자게 될 것이다.
안녕. 태림 1동 303호여.
15089 1988. 5. 31 (화)
이사.
바다의 조감도. 그 풍광은 그림과 같다.
그러나 현실은 숙제 투성이.
목욕탕공사, 조명, 문틀,, 무엇 하나 완전한게 없다.
나도 한사람의 기술자로서 느끼건데, 가장 중요한 끝마무리에 소홀한 우리 기질이 여기에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끝마무리 공학'이라는 전문 분야를 창설할 필요가 있다.
손목의 아픔은 어제 딴에는 열심을 내어 일했더니 오히려 상태가 좋아진다.
관념 속 아픔인지, 더욱 부려 먹어도 좋을 당나귀다.
아내, 수린이, 俊이.... 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