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학이가 경기전 장원 퇴락한 곳을 봉심한 뒤에 경기전에서 가까운 내사정에
가서 한량들의 활쏘는 것을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활 하나를 빌어가지고 전후
세 순을 쏘는데, 첫순은 자청하여 쏘고 둘째순은 활 임자의 청으로 쏘고 셋째순
은 여러 한량들에게 졸려서 쏘았다. 세 순이 다 같은 오중이라도 살을 꽂는 곳
은 다 각각 달랐다. 첫순네는 과녁 네 귀와 복판에 다섯 살을 벌려 꽂고, 둘째순
에는 무고위에 다섯 살을 일자로 꽂고, 셋째순에는 똥때까지 여섯 살을 과녁 복
판에 모아서 꽂았다. 봉학이로면 이쯤것은 자랑거리도 되지 못하건만 한량들은
귀신 같은 재주라고 놀라서 혀들을 내둘렀다. 한량들이 봉학이를 술대접하려고
술집으로 끄는 것을 봉학이가 오늘은 공사로 나온 길이라 술 먹고 있을 수 없다
고 사피하고 내사정에서 바로 감영으로 들어왔다. 봉학이의 봉심하고 온 사연을
감사가 들은 뒤에 “봉심하고 바로 오는데 이리 늦었느냐?” 하고 물어서 “내사정
에서 한량들이 활을 쏘기에 서너 순 쏘구 왔소이다. " 봉학이가 바로 말씀
하였더니 “봉심 나간 사람이 한만히 활을 쏘고 있었단 말이냐? 사람이 지각이
그럴 수가 있느냐!” 꾸중이 내리었다. 봉학이가 비장 거행 두 달만에 처음으로
감사께 꾸중을 들었다. 그날 저녁 폐문 후에 봉학이가 다른 비장들과 같이 선화
당에 올라와서 감사께 저녁 문안하고 함께 물러가려고 할 때 감사가 “봉학이는
좀 있거라. " 하고 말씀하여 봉학이가 미진한 꾸중을 들을 줄로 알고 속으로 걱
정스러웠더니 다른 비장들이 다 물러간 뒤에 “이리 좀 가까이 들어서라. " 감사
의 말소리부터 우선 다정스럽게 들리었다. “네 처소로 수리하는 방이 내력 있
는 방인 것을 네 아느냐?” “대강 들어서 아옵니다. " “그방에 가서 거처하기
가 맘에 싫지 않으냐?” “싫을 것 없소이다. " “그렇겠지. " 감사가 빙그레 웃
으며 고개를 끄떡끄떡하였다. “하인들은 그 방에 참말 귀신이 있는 것같이 말
하옵디다. " “그건 종작없는 하인들뿐이 아니다. 내가 부윤으로 있을 때 김감사
께도 그런 말씀을 들었다. 훌륭한 방을 사십여 년간 폐방하고 못 쓰다니 전라감
영의 수치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그 방을 쓰기 시작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그
방을 싫게 생각 않고 거처할 만큼 담기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 생각에는 나
빼놓으면 너밖에 없을 것 같아서 네 처소를 그 방으로 옮기게 한 것이다. " “황
송하오이다. " “그 방 수리가 거의 다 되었다지?” “네, 내일이면 문창호까지
다 끝난답니다. 일하는 것들이 해만 설핏하면 일을 못하는 까닭에 날짜가 의외
루 많이 걸렸소이다. " “내일 바로 처소를 옮기겠느냐?” “네, 옮기겠소이다. "
“그외에 네게 말을 일러둘 것이 있다. " 하고 감사가 말을 다시 고치어서 “내
가 너를 애호하여 준다고 믿고 방자스러우면 죄책을 더 중하게 당할 것이니 각
별 조심해라. 네가 근본이 미천한 것만큼 남들이 업수이 여기기 쉬우나 남이야
업수이 여기든 말든 내 앞만 닦으면 고만이니 아모쪼록 뉘게든지 공손하게 더욱
이 다른 비장들과 의좋게 지내도록 해라. "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듯이 말을 일
러주었다. 감사의 말이 귓속에 박히는 것보다도 뼛속에 박히어서 봉학이는 눈물
까지 머금었다. “고만 물러가거라. " 감사의 명을 받고 봉학이가 비장청으로 물
러나올 때 “나 빼놓으면 너 밖에 없다. " 감사의 말을 생각하고 곧 그 밤이라도
처소를 옮기고 싶은 맘이 있었다.
이튿날 봉학이가 방을 옮기려고 할 때 예방비장이 와서 보고 “방을 아직 옮
기지 말게. " 하고 말리었다. “왜 옮기지 말라시오?” “사또 처분이 내리기까
지 기다려보게. " “어젯밤에 사또 분부를 물었으니까 오늘 곧 옮길 테요. " “
사또께서 오늘 옮기라시든가?” “옮기라십디다. " “알 수 없는 일일세. " “무
에 알 수 없단 말이오?” “나는 어제 사또께 꾸중을 들었네. " “무슨 꾸중을
들었소?” “자네 처소 까닭에 꾸중을 들었어. " “사람을 은사주검시키려구 하
니 꾸중 들어 싸지요. " “은사주검을 시키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 방에
가면 죽는단 말을 내 귀루두 몇 번 들었소. " 예방비장은 봉학이의 말을 듣고 얼
굴이 붉어졌다. 예방비장이 봉학이를 미워하는 까닭에 귀신방으로 처소를 옮기
게 하려고 은근히 애를 썼지만 죽이려고까지 미워하는 것이 아니던 터에 “그
방을 봉학이 주자고 한 것이 무슨 뜻인가?” 감사의 날카로운 말에 가슴이 찔리
어서 거심이 좋지 못한 것을 깨닫고 뉘우친 뒤라 “그 방이 맘에 뜨아하거든 옮
기지 말구 고만두게. 내가 사또께 다시 품해봄세. " 하고 정답게 말하는데 봉학
이는 예방비장의 눈치를 살펴보며 “아니 고만두시우. " 하고 손까지 내저었다.
봉학이와 벗하는 형방비장이 마침 옆에서 듣다가 “내 생각엔 좋은 수가 하나
있구먼. " 하고 말하니 봉학이가 “무슨 좋은 수?” 하고 형방비장을 돌아보았
다. “북문 밖에 용한 장님이 있다네. 그자를 불러다가 옥추경이나 한번 읽히구
방을 옮겨들게. " “실없는 소리 고만두게. " “이 사람 자네는 모르네. 귀신 쫓
는 데는 옥추경이 제일이라네. " “옥추경이구 금추경이구 고만두어, 이 사람아.
" “그러다가 기생귀신이 참말 나오면 어떻게 할 텐가?” “수청들이지 걱정인
가. " “자네가 나하구 한방 쓰느라구 기생 수청을 못 들여서 성화가 났네그려.
" “자네는 기생을 쇠배 싫어하니까. " “까마귀가 오디를 싫다기가 쉽지 사내자
식이 누가 기생을 싫다겠나. 그렇지만 기생귀신까지 수청들이구 싶어하는 사람
은 자네 하나뿐일 걸세. " “실없는 조롱은 고만두구 참말 수청기생이나 하나 골
라주게. " “가만있게. 내가 기생 독차지한 뒤에 이야기하세. " “동관 대접으루
수노에게 분부 한번 해주면 어떤가. " “그건 어렵지 않지만 죽은 기생 산 기생
이 서루 시새워서 쌈질을 하게 되면 자네가 틈에 끼여서 죽지두 못하구 살지두
못할 테니 걱정 아닌가. " 형방비장의 웃음의 소리에 봉학이와 예방비장이 다같
이 웃었다. 봉학이가 방을 옮긴 뒤에 바로 선화당에 올라와서 감사께 처소 옮긴
것을 아뢰니 감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었다. 봉학이가 물러가란 명령을 기다
리고 섰을 때 감사가 통인의 방을 향하고 “이리 오너라. " 하고 사람을 부르니
대답 소리가 나며 곧 통인 하나가 방에서 나왔다. 감사가 통인에게 “다락 구석
에 세워둔 환도를 이리 내오너라. " 분부하고 나서 봉학이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내가 환도 한 자루를 줄 테니 갖다가 머리맡에 걸어두어라. " “활을 머리맡에
걸어놓았소이다. " “검기가 벽사를 한다기에 환도를 갖다 걸란 말이다. " “황
감하오이다. " 통인이 감사의 분부를 좇아서 환도를 봉학이에게 갖다 주니 봉학
이는 두 손으로 받아들고 감사의 앉은 자리를 향하여 허리를 굽히었다.
봉학이의 새 방은 아래윗간 사이를 장지로 막은 이칸 마루방인데 아랫간은 골
방이 뒤로 붙어 쌍창이 났을 뿐이나 윗간에는 앞쌍창 외에 뒤되창이 더 있고 아
랫간은 짚을 깐 위에 멍석을 깔고 멍석 깐 위에 기직자리를 깔아서 화롯불을 피
우고 낮에 앉고 이부자리 펴고 밤에 잘 만하나, 윗간은 마루청 위에 바로 기직
자리를 깔아서 밑에서 나는 찬바람을 막을 뿐이고 아랫간에는 등 뒤 벽장 위에
횃대가 걸리고 머리맡 벽 위에 감사가 준 환도가 걸리고, 또 발채 골방문 옆에
활과 전동이 걸리었으나 윗간에는 군데군데 대못이 박히었을 뿐이고 아랫간에는
방구석에 탁자가 놓이고 탁자 앞에 재판이 놓이고 재판 위에 촛대와 화로와 요
강이 늘어 놓였으나 윗간에는 아무것도 놓인 것이 없었다. 아랫간은 자뭇 아늑
한 맛이 있고 윗간은 밤낮 썰렁한 뿐 아니라 같은 방에 장지 사이 하나가 딴세상
같이 달랐다. 봉학이가 처소를 옮기던 날 통인 아이가 낮에는 와서 서행을 하여
도 해 진 뒤에는 뫼시고 있을 수 없다고 사정하여 봉학이가 해 진 뒤에는 다른
처소로 가라고 허락한 까닭에 봉학이는 귀신방에서 혼자 자게 되었다. 선화당에
서 퇴등령이 내린 지 벌써 오래다. 봉학이는 감사께 저녁 문안을 여쭙고 와서
촛불을 밝혀 놓고 혼자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원양으로 귀양온 것 같은 생각은
없지 아니하나 무서운 생각은 꼬물도 없었다. 귀신이나 도깨비를 이야기만 많이
듣고 눈으로 한번도 본 일이 없어서 궁금한 마음에 기생귀신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다리었다. 이때나 저때나 하고 기다리는 중에 뒤꼍 대숲에서 우수수 소리가
나며 무슨 발짝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인제 나오는가 보다. "봉학이가 혼자 말
하며 장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이 지나도 아무 기척이 없고 장지 틈으
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촛불만 흔들었다. 불후리를 돌려서 바람을 가리려고 봉학
이가 앞으로 나앉을 즈음에 윗간에서 창문이 덜커덕하였다. 봉학이가 벌떡 일어
나서 장지를 밀어젖히고 내다보니 앞쌍창과 뒤되창이 다 닫힌 채 있었다. 문풍
지가 바람에 떠는 소리를 듣고 봉학이가 “바람인 게다. " 생각하면서도 귀신이
방구석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우두머니 방구석을 바라보고 섰다가 장
지를 도로 닫고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 뒤에는 대숲에 바람소리와 문풍지 떠는
소리 외에 이따금 골방에서 쥐소리가 날 뿐이었다. “에이, 자야겠다. " 봉학이가
혼자 말하고 골방에서 이부자리를 꺼내는데 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이부자리
를 펴놓은 뒤에 쥐를 잡으려고 봉학이가 재판 뒤와 탁자 밑을 골고루 살펴보았
으나 쥐가 어디 가서 숨어 있는지 골방으로 도로 들어갔는지 다시 눈에 뜨지 아
니하였다. 봉학이가 화로의 숯불을 다독거려 묻은 뒤에 이불 속에 드러누워서
촛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 캄캄한 속에 한동안 눈을 뜨고 있다가 잠이 들기 시
작하여 어슴푸레 잠이 들었을 때 누가 이불 위를 더듬는 것 같아서 잠이 도로
깨었다. 아래에서 살살 기어오는 것이 있는 듯하여 슬며시 손을 빼가지고 있다
가 가슴께로 올라올 때 이불 위를 덮쳐 누르니 찍소리 하며 손 사이로 빠져 나
가는 것이 쥐였다. 봉학이는 불을 켜고 잡으려다가 귀찮은 생각이 나서 그만 두
고 다시 잠을 청하였다. 잠이 들었을 때 쥐가 또 이불 위로 올라와서 손을 이불
밖에 내놓고 기다리다가 꽉 움켜잡으니 이번에는 찍 소리 대신에 아야 소리가
나고 손에 잡힌 것이 쥐가 아니요, 보드라운 계집의 손이었다. 봉학이가 깜짝 놀
라서 살펴보니 이쁜 기생 하나가 옆에 와서 앉았는데 얼굴이 전에 많이 본 것같
이 눈에 익었다. “네가 추월이냐?” “나리는 추월이만 아시오?” “그럼 네가 누구냐?”
“내가 누군지 몰라서 물으시오?” “나는 잘 모르겠다. 나 자는 방에 어째 들어왔느냐?”
“나리가 혼자 주무시기 고적하실 듯하기에 들어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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