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학이가 기생을 데리고 잤다. 꿈이 깨어서 눈을 떠보니 날이 벌써 환하게 다 밝았
었다. 너무 늦지나 않았나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서 아래윗간 문을 다 열어놓았다.
봉학이가 일어나며부터 식전내 여러 사람에게 아침 인사를 탐탁하게 받았다.
감영 하인들은 죽을 경우에 살아난 사람처럼 아는 눈치고 다른 비장들은 한번
액회를 면한 것같이 치는 모양이고 감사까지 밤 사이 무양한 것을 기뻐하는 기
색이 현연하였다. 감사가 각 비장의 아침 문안을 받을 때 전 같으면 여러 비장
의 얼굴을 한 번 죽 돌아보며 고개나 끄떡이고 말 것인데, 이날 봉학이에게는
특별히 “밤에 잘 잤느냐?” 하고 묻고 육방관속들의 조사가 끝난 뒤에 감사가
비장들을 돌아보다가 다시 봉학이에게 “외딴 처소에 혼자 자기가 고적치 않느
냐?” 하고 물었다. 봉학이는 감사의 물어주는 것이 황감하여 그저 녜녜 대답만
하는데 예방비장이 옆에서 “고적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 하고 봉학이를 위
해서 말하였다. 각 비장들이 감사앞에서 물러나올 때 형방비장이 예방비장에게
귓속말하고 봉학이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봉학이가 낮에 방에 앉아서 방
수리 맡아 시킨 아전을 불러다가 새로 수리한 방에 쥐구멍이 있으니 역사를 허
수히 시킨 탓이라고 꾸지람하는 중에 방자 하나가 와서 “어떤 한량이 와서 뵈
입자구 합니다. " 하고 말하여 봉학이는 꾸지람을 대강 하고 그치고 찾아온 한량
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그 한량은 전일 내사정에서 봉학이를 술대접 하려고 먼
저 설도하고 나중까지 간청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 날 자기집에 혼인술이
있다고 청하러 온 것이었다. 봉학이가 그 한량의 인정을 떼치기가 어려워서 감
사께 들어가서 외출 허락을 물은 뒤에 그 한량을 따라나갔다.
봉학이가 혼인집에 가서 여러 한량들과 같이 잔치술을 취하도록 먹고 다 저녁
때 감영으로 들어오는데 취중에 발길이 전에 있던 처소로 향하였다. 형방비장의
처소에 가까이 왔을 때 기생 한 떼가 몰려나가는 것을 보고 “이년들 점고 맞으
러 들어왔느냐?”하고 길을 가로막으니 어떤 기생은 “네, 점고 맞고 나갑니다.
" 하고 해해 웃고 어떤 기생은 “점고는 엊그저께 초하룻날 맞았습니다. " 하고
입을 비쭉하였다. “나 없는 틈에 왔다 나가! 이년들, 자 나하구 같이 도루 들어
가자. " 봉학이가 두 팔을 벌리고 들어오니 기생들은 하나씩 둘씩 살짝 살짝 옆
으로 빠져나갔다. 봉학이가 간신히 기생 하나를 데리고 방안에 앉아서 이야기하
다가 봉학이를 보고 이야기를 뚝 그치었다. “옳지, 한 마리는 남아 있구나. 네
년은 가두 좋다. " 하고 봉학이가 붙들어 가지고 오던 기생을 놓아버렸다. “자
네 술취했네 그려. " 예방비장의 말에 “네, 술을 많이 먹었소. " 고개를 끄덕하
고 또 “혼자 다니며 잘 먹었다? 어디 보자. " 형방비장의 말에 “내가 한턱 낼
까. " 껄껄 웃고 봉학이는 방에 들어와서 턱 드러누우며 “자네 무릎 좀 빌리게.
" 하고 기생의 무릎을 끌어당겼다.
봉학이가 잠깐 잠이 든 동안 기생이 무릎 대신 퇴침을 베어 주고 살며시 일어
나서 봉학이의 벗어버린 갓을 말코지에 집어 걸고 예방, 형방 두 비장에게 눈으
로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기생은 이름이 계향이니 전날 전라감영의 행수
기생이던 계랑의 친 동생이다. 계랑은 젊으신 실록포쇄관의 간장을 녹여서 서울
까지 이름이 났던 명기였으나 계향은 자색과 가무가 형에 미치지 못하고 고임성
과 붙임새가 형만 같지 못하여 형의 뒤를 이을 만한 명성은 없을망정 그 대신에
사람이 침착하고 단정하고 기생으로 기생티가 없어서 보는 사람의 눈을 따라서
는 일대 명기 형보다 가취할 장처가 도리어 많았다. 전 등내 김감사 적에 병방
비장이요, 중군이던 사람이 양기 좋은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던 왈짜이었는데,
어느 때 여러 기생을 데리고 쾌심정에 천렵을 나가서 천어회로 술을 먹고 취한
김에 호기를 내어서 남들 보는 데서 기생들을 모조리 행실내러 들다가 셋째 기
생에게 개행실이라는 욕을 먹고 흥이 깨어지도록 풍과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때 셋째 기생은 다른 사람이 아니요, 곧 계향이었다. 계향이가 술취한 중군에
게 맞고 채이고 머리를 줌으로 뽑히었건만 끝끝내 항거한 까닭에 그 뒤로 지조 있
는 기생이란 칭찬도 듣고 다기진 계집이라는 지목도 받게 되었었다. 이 때 계향
의 나이 스물이 넘어서 지각은 더 날 나위 없이 다 나고 눈은 가당치 않게 높아
서 문벌좋고 지모 비상한 감사 이윤경 외에는 천하 명궁이란 이비장 봉학이를
인물로 칠 뿐이고 다른 비장은 안중에도 두지 아니하였다.
계향이가 나간 뒤에 봉학이가 잠은 곧 깨었으나 술이 아직 덜 깨어서 감사께
도 가 보입지 못하고 저녁밥도 변변히 먹지 못하였다. 봉학이가 그대로 형방비
방 처소에 눌러 있다가 저녁문안 때에 여러 비장 틈에 섞여서 선화당에를 올라
갔다. 감사는 봉학이의 술취했던 것을 알고 있는 터이라 봉학이를 보고 “오늘
잘 놀고 왔는냐?” 하고 물은 뒤에 “술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되 너무 과히
먹고 실태가 있어서는 못쓰는 법이다. " 하고 말을 일렀다. 봉학이가 황송하여
고개를 숙이고 섰다가 다른 비장들과 같이 물러나올 때 예방비장이 “내 방에
좋은 술이 있으니 같이들 가서 한잔씩 먹구 헤어지세. " 하고 여러 사람을 끄는
데 봉학이만은 싫다고 사양하였다. “자네는 해정으로 먹어야 하네. " “사또께
서 과도하게 먹지 말라구 분부하셨으니까 낮에처럼만 먹지 말게. " “자네 안 가
면 우리까지 못 얻어먹기 쉬우니까 자네가 한턱내는 셈으루 같이 가세. "
이 비장 저 비장이 받고채기로 지껄이는 것을 봉학이는 낮에 술에 곯아서 먹
을 수 없다고 고사하고 혼자 처소로 와서 불을 켜놓고 잠시 앉았다가 잘 채비를
차리려고 할 때, 예방비장 이하 여러 비장이 술과 안주와 잔과 술 데울 그룻을
통인과 방자들에게 한 가지 두 가지씩 들려가지고 떼를 지어 몰려왔다. “하나
를 빼놓고 먹을라니 맛이 있어야지. " “이렇게 가지구까지 왔는대두 안 먹을 텐
가. "“술을 어서 데워라. " “상을 여기 갖다놓아라. " “이놈아, 너는 왜 어리
둥절하구 섰느냐. " “초롱불을 꺼라, 이애야. " 여러 사람이 떠드는 바람에 호젓
하고 휘휘하던 방이 갑자기 후끈하고 들썩하였다. 봉학이가 여러 비장에게 부대
끼다시피 하여 수십 배 좋이 먹고 술에 감겨서 “인제 나는 고만 못 먹겠소. "
하고 자리에 쓰러지니 예방비장이 통인 방자들 시켜서 기명 등속을 모두 거두고
방까지 대강 치운 뒤에 여러 비장과 함께 일어섰다. “우리 가네. " “잘 가게. "
“일어날 거 없네. " 여러 사람들이 다 간뒤에 봉학이가 정신을 차려 이불을 끌
어덮고 불을 끌려고 할 때 장지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하얀 계집의 얼굴이 눈앞
에 나터났다.
봉학이가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고 장지 틈의 하얀 얼굴을 바라 보다가 “네가
추월이냐?” 하고 소리질러 물으니 입을 가로 벌리고 웃는지 이를 앙상거리는
하얀 이가 보일 뿐이요 대답은 없었다. “왜 대답을 않느냐?” “내가 추월이요.
겁나지 않소?” “쥐 밑구녁 같은 소리 마라. " “내가 사십여 년 동안 사내다운
사내를 못 만났더니 인제 잘 만났소. " “잘 만났으니 수청을 들 테냐?” “나리
같은 사내에겐 수청들어도 좋지만 우선 이야기할 일이 있으니 좀 일어나 앉으시
오. " “이야기 할 일이 있다? 지금은 내가 곤해서 자야겠는데 내일 밤에 다시
오너라. " “자고 싶거든 자구려. 누가 말리겠소. "
촛불이 바람에 후려서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중에 하얀 얼굴 뒤에 똑같은 하
얀 얼굴 하나가 나왔다 들어왔다 하는 것을 봉학이가 바라보고 “네 뒤에는 또
누구냐?” 하고 물었다. “내 뒤에요?” “네 뒤에 얼굴바닥이 하얀 년은 누구
냔 말이냐. 네 동무냐?” “아이구머니. " 계집 하나가 새된 소리를 지르고 아랫
간으로 뛰어들어오며 누위 있는 봉학이를 덮쳐누를 듯이 주저앉았다. 봉학이는
계집이 처음 윗간에 나타날 때보다 도리어 더 놀라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
으며 계집을 떠다밀었다. 계집이 뒤로 밀려났다가 다시 앞으로 대어들며 두 손
으로 봉학이의 손을 잡는데 차기가 얼음장 같았다. “귀신의 손은 정말 차구나.
" 봉학이가 손을 뿌리치려고 하니 “나리, 나는 귀신이 아니요. " 계집은 더욱
단단히 달라붙었다. “귀신 아니구 무어냐?” “사람이오. 계향이오. " “계향이?
” 하고 봉학이가 계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옳지 알았다. 어젯밤에 네 무
릎을 비고 잤지. "“어젯밤이 무어요, 아까 저녁때요. " “내가 술이 취했어두 정
신은 멀쩡하다. 네가 어젯밤에두 왔었지, 무슨 소리냐!” “안 왔어요. " “그래
어젯밤에 나하구 같이 자지 않았어?” “아니오 아니오. " “아니라면 고만둬라.
내가 우기기 싫다. 오늘 밤부터 같이 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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