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저녁을 두 번 먹어둘까요?” 서림이는 소리를 내어 웃고 꺽정이는 빙그
레 웃었다. 꺽정이가 불출이를 불러들여서 불을 켜놓고 저녁상을 내오라고 일렀
다. 불출이가 청심박이 대초에 불을 당겨서 촛대에 붙이는 중에 꺽정이가 불출
이더러 “그 동안에 어느 두령이 왔다 갔었느냐?” 하고 물으니 불출이는 초를
얼른 다 붙이고 일어나서 “그 동안에 황두령과 곽두령이 오셨는데 곽두령은 곧
도루 가시구 황두령은 지금 안에 기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외에는 왔
다 간 사람이 없느냐?” “대장쟁이 박가가 왔다 갔습니다.” “철편을 가져왔
더냐?” “철편이 아직 조금 덜 되어서 내일 갖다 바치겠다구 말씀 여쭈러 왔다
구 합디다.” “어제는 오늘 가져온다구 말하던 놈이 또 내일이야.” “너무 무
거워서 드다루기가 어려운 까닭에 일이 맘대루 되지 않는다구 중언부언하옵디
다.” “고만 안에 들어가서 밥상이나 내오라구 일러라.” “서종사 진지두 차려
내오라구 이르오리까?” 꺽정이가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었다. 얼마 뒤에 안팎
심부름하는 졸개들이 칠첩반상 옳게 차린 외상 둘을 내오고 또 반주상까지 따로
내와서 꺽정이와 서림이가 밥상은 각각 받고 반주 소주는 잔 하나로 돌려먹었
다. 밥을 다 먹고 상을 물리고 나서 꺽정이가 다시 불출이더러 “능통이가 오거
든 밖에 세워두구 너는 밥 먹구 박가에게 가서 철편을 내일 해안으루 가져와야
망정이지 만일 또 안가져왔다간 볼기에 살이 남지 않을 테니 알아 하라구 말을
일러라.” 하고 분부하였다. 불출이가 녜 대답하고 나간 뒤에 서림이가 “철편은
길두령 주실겝니까?” 하고 물으니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막봉이더
러두 말 안한 것을 용하게 아는구려.” 하고 말하였다. “길두령이 철편 노래하
는 걸 수차 들은 까닭에 짐작으루 여쭈어 봤습니다.” “막봉이가 이번 같이 오
는 길에 저두 무슨 특별한 병장기를 하나 만들어 갖구 싶다구 말하기에 내가 철
편을 일러주었소. 내가 오던 이튿날 바루 박가를 불러서 만들라구 일렀는데 어
제 가져오마구 안 가져오구 또 오늘 가져오마구 안 가져오는구려.” “길두령이
힘은 장사지만 철편을 잘 쓸까요?” “곽오주 쇠도리깨 쓰듯 하
겠지.” “곽두령은 본래 도리깨질을 잘했답디다. 그러니까 법수 없이라두 능란
하게 쓰지만 길두령이 철편을 쓰자면 십팔반무예 아는 사람에게 좀 배워야 할걸
요.” “십팔반무예가 대체 무엇무엇이오? 알거든 좀 주워 쳐보우.” “제가 전
에 평양에 있을 때 진서위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그 동안 잊지나 않았는지 모르
겠습니다.” 하고 서림이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일궁 이노 삼창 사도 오검 육
모 칠순 팔부 구월 십극 십일편 십이간 십삼과 십사수 십오차 십육파두 십칠금
승투색 십팔백타.” 하고 무예 이름을 주워 외는데 간간이 떠듬떠듬하였다. “지
금 외운 것이 무슨 주문이요, 병장기 이름을 쳐보라니까 알아듣지두 못하게 그
게 무슨 소리요?” “저두 병장기 이름을 어디 잘 압니까?” “모르거든 진작
모른다구 하지.” 서림이는 무료하여 앉았고 꺽정이는 밖을 내다보며“거기 누
구있느냐?”하고 소리를 쳤다.꺽정이의 사람부르는 소리가 한번나자 곧 여러 대
답 소리끝에 불출이가 다시들어왔다.“능통이는 그저 안왔느냐?”“안 와서 부
르러 보냈읍니다.”“너 밥 먹었는냐”“능통이 온 뒤에 먹으려구 아직 안 먹었
읍니다.”“이두령께 사람을 보내서 얼른 오시라구 하구 다른 두령들두 오시는
대루 들어오시게 하라.”“녜.”꺽정이가 이봉학이를 부르러 보내는 것은 사람
소명한 봉학이에게 관군 피할 일을 상의하려는 것이거니 서림이는 지레짐작하고
“이두령두 관군과 접전되기를 바랄걸요.”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한참 만에 “
그렇기 쉽지.”하고 대답하였다.“이번 저의 계책을 여러 두령과 상의해서 결정
하시려면 말썽이 여간 많지 않을 것입니다.”“내가 한번 결정하면 고만이지 누
가 말썽을 부린단 말이오.”“만일 상의하신다면 말이올시다.”“상의할거 없는
걸 상의할 까닭두 없구 상의하다가두 하기 싫으면 고만두지.”“그렇다뿐입니
까. 한번 결정해서 말씀하시면 누가 감히 두말하겠습니까.그런데 이천 광복으루
가시겠단 말은 아직 뉘게든지 말씀 마십시오. 그말이 미리 밖에 나가면 재미 적
습니다.”“재미적으면 말 안하지.”얼마 뒤에 이봉학이가 와서 마루에 올라가
기침하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꺽정이는 가만히 앉아 있고 서림이는 일어나서 꺽
정이앞에 자리를 사양하고 아래로 내려앉았다. 꺽정이가 이봉학이를 바라보며“
내가 물어볼것이 있어서 불렀네.”하고 말하니“무얼 물어보실 것이 있습니까?
”하고 이봉학이는 꺽정이의 눈치를 살피었다.“십팔반무예가 무엇무엇인지 다
아나?”꺽정이의 묻는 말말이 이봉학에게만 뜻밖일뿐 아니라 서림이에게도 짐작
밖이었다.대체 꺽정이가 처지의 천한 것은 그의 선생 양주팔이나 그의 친구 서기
나 비슷 서로 같으나 양주팔이와 같은 도덕도 없고 서기와 같은 학문도 없는 까
닭에 남의 천대와 멸시를 웃어버리지도 못하고 안심하고 받지도 못하여 성질만
부지중 괴상하여져서 서로 뒤쪽되는 성질이 많았다. 사람의 머리 베기를 무밑동
도리듯 하면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차마 그대로 보지를 못하고 논밭에 선 곡식
을 예사로 짓밟으면서 수채에 나가는 밥풀 한낱을 아끼고 반죽이 눅을 때는 홍
제원 인절미 같기도 하고 조급증이 날 때는 가랑잎에 불붙은 것 같기도 하였다.
꺽정이가 서림이더러 십팔반무예를 물을때 서림이가 못 알아들을 글 외듯 하는
데 화가 나고 곧 조급증이 발작되어서 십팔반무예를 당장 알고 말려고 이봉학이
를 불러다가 묻게 된 것이었다.“십팔반무예는 왜 갑자기 물으십니까?”“자네
두 잘 모르나?”“왜 몰라요.”“알거든 말해봐.”“칼이 한쪽 날 양쪽날 두가지
요, 창이 여느 창 삼모창 양지창 삼지창 네가지요, 도채가 여느 도채 긴자루 도채
두가지니 칼창 도채가 도합 여덟가지요, 거기다가 활 쇠뇌 철편 철간 방패 작살
몽치 일곱가지를 넣구 또 올가미 치는법, 손질하는법, 발길질하는법 세가지를 넣으
면 모두 여덟가지 아닙니까.그런데 작살과 올가미치는법과 발길질하는법을 빼구
그대신에 철퇴와 사슬낫과 총통이라구 불질하는 기계가 들기두 한답디다.”“인
제 잘 알았네.”하고 꺽정이는 곧 서림이를 돌아보며“서종사두 똑똑히 알았소?
”하고 껄껄 웃었다.그뒤에 황천왕동이가 안에서 나오고 배돌석이와 유복이가
작반해 와서 먼저온 이봉학이까지 두령이 넸이 모였다. 꺽정이와 서림이의 밀담
한 이야기를 듣고 싶기는 네 두령의 마음이 서로 다를것이 없으나 꺽정이와 서
림이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것을 보고는 네 두령의 생각이 각기 같지 아니하
였다. ‘구경은 우리에게 안 알리지 못하겠지.’ 생각하는 것은 이봉학이요 ‘알려주
지 않는것을 지싯지싯 알려구 할것없다.’ 생각하는 것은 배돌석이요 ‘알려줄때까
지 기다려보자.’ 생각하는 것은 박유복이라, 세 사람은 알고 싶어하는 눈치도 별로
보이지 아니하나 황천왕둥이는 얼른 알고 싶어서 몸이 달 지경인데 곽오주와
길막봉이가 안와서 이야기를 못 듣거니 생각하여 “이 사람들은 무어하느라구
아니오나.”하고 혼자 구노리마디나 좋이 하다가 나중에 꺽정이를 보고 “오주
하구 막봉이에게 사람을 안보내셨소?”하고 물었다. “안 보냈다”“그러니까
안 오지요. 아까 오주가 왔다가 사랑에 사람 들이지 말라셨단 말을 듣구 두덜거
리며 갔어요. 오주가 막봉이에게루 놀러갔으니 막봉이에게 사람을 보내봅시다.”
“저의들이 오구 싶으면 오겠지.”“우리는 언제까지든지 기다리고 있나요?”“
기다릴 일이 무어 있느냐?”“오늘밤에 이야기 안하실테요?”
“무슨 이야기를 안 한단 말이냐?”“무슨 이야기라니요? 관군 막을
이야기를 낮에 중등무이하구말지 않았어요.”꺽정이가 대답을 아니하여 황천왕
동이는 또다시 다그쳤다.“형님이 서종사하구 상의해서 결정하신다구 말씀하셨
지요.”“아직 결정 안했다.”“서종사가 해 지기 전에 왔다는데 캄캄하두룩 상
의하시구 결정을 못하셨단 말이오? 한패루 나가느냐,네 패루 나가느냐 결정하기
가 그렇게 어려울까요.”“다른 계책을 이야기했다.”“다른 계책이 무슨 계책이
오?이야기 좀 하시우. 사람이 속이 답답해 못 견디겠소. ”황천왕동이의 조조히 구
는 것을 꺽정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리가 이번에 관군을 피해서 어디루
가는 것이 좋겠다구 이야기했다“. 하고 말하니 황천왕동이는 ”형님두 실없은
말씀 하시우.“ 꺽정이보고 말하고 이봉학이는 ”참말루 삼십육계의 상책을 생
각했소?“ 서림이보고 물었다. 꺽정이가 ”내가 너 데리구 실없은 말을 할 리가
있느냐!“ 하고 황천왕동이를 나무라고 서림이가 ”삼십육계의 상책이라구
하는 것이 지금 우리게두 상책이 될 줄압니다“. 하고 이봉학이에게 대답한 뒤
네 두령은 서로 돌아보며 어이없어 하였다. 황천동이가 서림이의 앞으로 바짝
가까이 다가앉으며 ”서종사, 종일 생각한 것이 그 따위 계책이요?“ 하고 시비
조로 말을 내니 서림이는 천연스럽게 ”오늘 종일뿐 아니라 전부터 생각한 것이
요.“ 하고 대답하였다. ”관군 온단 말 듣기 전부터 겁을 집어먹구 있었단 말이
요?” “겁나서 그런 계책을 생각한 것이 아니오.” “겁 안나면 왜 도망하자
우?” “얼마 동안은 관군을 슬슬 피하는 것이 좋을 줄 나는 믿소.” “대체 관
군을 슬슬 피하는 까닭이 무어요?” “이번 관군을 쳐서 물리친다면 우리 힘으로
당할 수 없는 관군이 곧 뒤쫓아 대어들 것이오. 경기도·황해도·평안도·강원
도·함경도 오도 군사가 우리의 뒤를 짜르구 앞을 막구 좌우를 찌르면 우리는
몰사죽엄하게 되거나 풍비박산하게 될 것 아니오.” “그게 겁쟁이 생각이 아니
구 무어요?” “우리 앞에 큰일이 있으니까 지금은 조심해야 하우.” “큰일이
란 게 무어요? 서울루 잡혀가서 능지 당할 일이요?” 꺽정이가 별안간 화를 내며
“소견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하고 소리를 꽥 질러서 황천왕동이가 고만
입을 다물뿐 아니라 다른 세 두령도 역시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이튼날 식전 조
사 끝에 꺽정이가 군령판을 들이라고 하여 군령을 내리는데 꺽정이의 말을 서림
이가 글로 받아 썼다. “대소인원은 3일 내에 타처로 반이하도록 일제히 속장하
되 속장할 물건은 경세한 것에 한하라. 너희 대소인원은 나 하나를 믿고 영을
순종하라. 영하에 고의로 헌화하거나 야료하는 자는 물론이요, 영의 가부를 의론
하는 자도 영을 순종치 않는 자라 마땅히 군율의 엄한 것을 알리리라.” 서림이
가 군령판에 쓰기를 마치고 한번 내려 읽어서 꺽정이는 말한 것과 대의가 틀림없
는 것을 안 뒤에 영을 내돌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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