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철원 일은 모르겠구려." "무슨 일을 모른단 말이오?" "무슨 일이든
지." "고향에서 사는 형님네와 왕래가 잦은 까닭에 고향일이 쇠배 어둡진 않소."
"임꺽정이란 사람이 철원 땅에 산다는데 철원 어디서 사는지 혹시 아우?" "임꺽
정이라니 도둑놈 아니오?" "그렇다는갑디다." "집두 절두 없는 도둑놈이 붙백여
사는 데가 어디 있게소." "도둑놈이라두 몸담아 있는 곳은 있을 것 아니오." "바
위 밑에 굴을 파구 굴 속에서 산답디다. 가까이 있으면 한번 찾아가서 힘겨룸
좀 해볼 생각이 있소." "힘겨룸할라구 일부러 도둑놈을 찾아간단 말이오? 별 양
반 다보겠네." "철원 가서 물으면 임꺽정이 있는 굴을 알 수 있겠소?" "그놈이
올 봄에 살인하구 관채에게 쫓겨서 타도루 도망했다는데 그때는 황해도루 갔단
말이 있더니 요새 들으니까 이 골 경내에 와서 숨어 있단 말두 있습디다." "그럼
지금 철원 땅에는 임꺽정이가 없소?" "임꺽정이가 없어진 덕에 올에는 철원 경
내가 조용했다우." "똑똑히 아우." "내 말을 못 믿거든 철원 거서 물어보구려."
꺽정이는 철원과 영평을 거쳐서 서울로 가려고 생각했었는데 그 집 주인의 말을
듣고 철원은 이 다음 다시 알아보고 가기로 속마음에 작정하였다. 이튿날 꺽정
이가 촌가에서 일찍 떠나 짧은 해에 길을 나우 걸어서 연천읍 이십여 리 밖에
와 자고 그 다음날 해가 한나절이 훨씬 기운 뒤에 영평 도덕여울을 대어왔다.
꺽정이가 졸개더러 짐짝을 길가에 벗어놓고 쉬라고 이른 뒤에 이리 어슬렁 저리
어슬렁하며 애꾸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승석때가 다 되도록 기다려도 나오지
아니하여 꺽정이는 슬며시 홧증이 났다. 졸개가 여울가에 누워 자는 것을 꺽정
이가 와서 보고 "이눔아 무슨 잠이냐!" 하고 소리를 지르니 졸개는 건공잡이로
벌떡 일어나며 곧 가서 짐짝을 짊어지려고 하였다. "짐은 왜 지느냐?" "가자시는
줄 알았습니다." "누가 가재!" 꺽정이가 졸개를 꾸짖는 중에 등 뒤에서 "거기서
떠드는 놈이 누구냐!" 불호령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과연 애꾸눈이 한 놈이 길
옆 숲 앞에 칼을 짚고 나섰다. 꺽정이가 애꾼눈이 앞으로 오면서 "오, 너 나왔느
냐! 내가 너를 오래 기다렸다." 하고 말을 붙이니 애꾸눈이 당황한 모양으로 외
눈을 둥그렇게 뜨고 꺽정이를 바라보며 "넌 날 아는가 부다만 난 너 같은 놈 꿈
에도 본 생각이 없다." 하고 말한 뒤 곧 다시 "내 앞으루 오
지 말구 게쯤 섰거라. 네가 청맹과니 아니면 이것이 눈에 보이겠지." 하고 칼을
앞으로 내들었다. 꺽정이가 곧 쫓아 들어가서 칼을 뺏어버리려다가 어떻게 하는
꼴을 좀 두고 보려고 발을 멈추고 서니 애꾸눈이가 당황하여 할 때와 딴판으로
바로 큰기침을 하면서 "내 손에 칼이 있으면 호랭이에 날개 돋친 셈이야. 팔도
군사가 눈앞에 몰려와두 눈꼽재기만큼 겁낼 내가 아니다." 하고 흰소리를 내놓았
다. 흰소리를 듣고 꺽정이가 빙그레 웃으니 애꾸눈이는 다시 떨떠름하게 여기는
눈치로 고개를 몇 번 가로 흔들고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면서 "네가 대체 날 왜
기다렸느냐?" 하고 묻는데 묻는 말은 건정이었다. "네가 내 앞에서 내뺄 생각이
냐!" 꺽정이가 소리를 지르니 애꾸눈이는 얼른 뒷걸음치던 것을 그치고 "누가 뉘
앞에서 내뺀단 말이야! 네가 아마 내뺄 생각이 나는게다." 하고 입을 실쭉하였
다. "내가 네게 물어볼 말이 있다." "물어볼 말이 있어? 무슨 말?" "네 성명이 무
어냐?" "선성을 미리 듣구 온 줄 알았더니 성함두 아직 모르느냐! 성씨는 임씨시
구 함자는 꺽자 정자이시다. 네 성명은 무엇이냐?” “내 성명이 무엇이냐구?
내가 임꺽정이다” 애꾸눈이는 입을 딱 벌리고 말을 못 하다가 잠깐 동안 지난
뒤에 헤헤 하고 억지웃음 웃으면서 “참말이오? 무얼 거짓말이지. 저것 봐, 웃는
걸 보니까 거짓말이야”하고 어린아이 응석하듯이 말하였다.
“미친눔이루구나” “대체 무슨 일루 날 보러 왔소?” “너를 버릇 가르치러
왔다” “버릇을 어떻게 가르칠라우? 다 큰 놈을 종이라 때릴라우?” “이눔아,
네 모가지를 돌려앉힐 테다” “모가지를 돌려앉히면 앞을 못 보라구” “이눔
이 나를 씨까슬르지 않나”하고 꺽정이가 주먹 부르쥐는 것을 애꾸눈이가 보고
“잠깐 가만히 서서 말 한마디만 들어 주우”하고 사정하듯이 말한 뒤 무슨 말
을 할 듯이 헛기침을 한두 번 하더니 “나는 가우”하고 휙 돌아서며 숲속으로
도망질을 쳤다. “이눔, 네가 어디루 도망할 테냐!”하고 꺽정이가 애꾸눈이의
뒤를 쫓았다. 쫓기는 애꾸눈이와 쫓는 꺽정이가 잠깐 동안 숲속에서 숨바꼭질하
듯 하다가 꺽정이가 바싹 가까이 대어들며 “이눔아!”하고 고함을 지르니 애꾸
눈이는 얼른 칼을 내버리고 꺽정이 발 밑에 꿇어앉아서 가쁜 숨을 돌리면서 “
인제 버릇 배웠습니다. 용서합시오”하고 두 손으로 빌었다.
꺽정이가 애꾸눈이를 내려다보며 “네가 내게 항거하고 대들었다면 혹시 용서
해 줄 생각이 났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칼을 가지구두 쓰지 못하구 날 잡
아잡수하는 못생긴 눔은 용서해 줄 수 없다. 너 같은 못생긴 눔이 내 이름을 더
럽혔으니 그 죄가 백번 죽어 싸다”하고 호령하였다.
“제가 원체 생각이 좀 부족한 놈인데 그런 말씀을 진작 해주시지요. 지금 칼
을 도루 집어가지고 와서 항거해 보겠습니다”하고 애꾸눈이가 새삼스럽게 일어
서려고 하는 것을 “별 우순 눔 다 보겠다”하고 꺽정이가 발끝으로 걷어차서
뒤로 벌렁 자빠졌다. 애꾸눈이가 걷어차인 가슴을 부둥켜안고 “아이구 가슴이
야! 아이구 죽겠네!”하고 엄부럭을 떠는데 꺽정이가 머리맡에 와 서서 “너 같
은 눔은 손댈 것도 없이 발루 짓밟아 죽일 테다”하고 한편 발을 들먹거리니 애
꾸눈이가 얼른 두 손을 내밀어서 그 발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꺽정이가 한 손으
로 옆에 섰는 나무를 붙들고 발을 앞으로 들고 뒤로 채고 또 좌우로 휘둘러서
애꾸눈이는 몸뚱이가 끌려나가고 끌려들어오고 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하
였으나 붙잡은 발목은 죽어라구 놓지 아니하였다.
“발목 놓고 일어나거라.” “이만큼 항거하면 용서하실랍니까?” 애꾸눈이가
꺽정이의 발목을 놓고 일어나며 곧 꿇어앉았다. “그만하구 용서해 주시는 것두
감지덕지하외다.” “내가 언제 너를 용서해 준다드냐?” “용서해 줄 테니 일
어나라구 하셨습지요.” “이놈 보니 거짓말이 난당이구나.” “거짓말이든 참말
이든 용서만 해줍시오.” “용서 못 하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다
시 발목을 잡구 매달리오리까?” 애꾸눈이의 말하는 것이 우스워서 한옆에 와
섰던 졸개가 낄낄거리고 웃는 것을 애꾸눈이는 바라보고 “여보, 웃는 양반이
뉘신지는 모르지만 웃지 말구 이리 와서 용서가 내리두룩 말씀 좀 해주구려.”
하고 사정하였다. 졸개가 더욱 낄낄거리다가 꺽정이에게 꾸지람을 받으니 애꾸
눈이는 이것을 보고 “죽을 곳에 든 사람을 가엾이 생각 않구 웃기만 하더니 아
이구 잘코사니야”하고 말하여 이번에는 꺽정이까지 빙그레 웃었다. 웃음빛 떠
도는 꺽정이의 얼굴을 애꾸눈이는 치어다보며 “제발 덕분에 죽이지만 말아 줍
시오.”하고 애걸하였다. 꺽정이가 바른손을 주먹 쥐어 내밀면서 “그럼, 이 주
먹으루 세 개만 맞아라”하고 말하니 애꾸눈이는 생각해 보는 것처럼 고개를 기
울이디가 말고 “주먹을 한 개 맞구 제가 죽으면 두 개에 두 번 죽음하구 세 개
에 세 벌 죽음하지 않습니까. 그런 속임수는 쓰지 맙시오.”하고 두 손을 얼굴
앞에 내들고 흔들었다.
“주먹이 무서우면 매를 맞을라느냐?” “그대루 용서해 줍시오” “그건 안
되겠다” “그대루 용서해 주시면 아들 자식 노릇을 하라셔두 고분고분히 할테
구 종 하인 노릇을 하라셔도 소인 하구 할 텝니다”꺽정이가 애꾸눈이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네가 일평생 나를 따라다닐 테냐?”하고 물으니
“따라다니다뿐입니까. 이생의 일평생은 고만두구 후생까지라두 따라다니겠습니
다”하고 애꾸눈이는 열 번 스무 번 고개를 끄덕거리었다. “네가 성은 임가나?
” “본성은 노가올시다” “저런 눔 봐. 성도 임가 아닌 눔이 내 행세를 했단
말이냐!” “지금이라두 성을 임가루 고치라시면 두말 않구 고치겠습니다” “
미친 눔 같으니, 이름은 무엇이냐?” “원이름은 밤이올시다” “노밤이야. 고만
일어서거라” 노밤이는 녜 하고 일어나서 “새판으루 문안드리겠습니다”하고
꺽정이에게 대하여 허리를 굽실하였다.
꺽정이가 노밤이를 서울로 데리고 가서 남소문 안 한첨지 부자에게 구경시키
려고 생각하고 “너 이번에 나하구 같이 서울을 가자”하고 말하니 노밤이는 선
뜻 녜 대답하고 나서 “다른 데 가시는 길두 아니구 여기까지 전위해 오셨구먼
요. 요전에 서울놈 한 놈을 놔보내구 뒤가 께름하더니 고놈이 가서 고자질했지
요. 고놈이 천생 고자질이나 할 놈으루 생겼습디다. 그때 고놈을 잔뜩 묶어서 이
아래 깊은 소에 집어 처넣으려다가 아버지 살려줍시오, 할아버지 살려줍시오 애
걸하는데 불쌍한 생각이 나서 풀어놔 보냈더니 고놈이 가서 고자질을 했습디다
그려. 서울놈들이란 새알 볶아먹을 놈들이에요. 제가 서울놈들에게 많이 속아봤
습니다”하고 수다스럽게 지껄이었다. 노밤이가 고놈 고놈 하는 서울 사람이 딴
사람이면 모르되 남소문 안에서 왔던 사람이라면 소에 묶어 넣으려다가 불쌍해
서 놓아보냈다는 것이 백판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 꺽정이가 황천왕동이의 이야
기를 들은 간이 있어서 짐작이 없지 않건만 구태여 발기집이서 묻지 않고 다른
말을 물었다.
“네 집안 식구는 몇이냐?” “제 집안 식구는 잠뿍 둘뿐인데 그나마 하나는
그림잡니다” “저눔이 성한 눔인가. 그래 다른 식구가 없단 말이냐?” “녜. 서
발막대 내둘러두 걸릴 데 없이 저 한몸뚱이뿐이올시다” “너같이 수다스러운
눔 처음 보겠다. 이 다음엔 너무 수다 떨면 입을 짜개놓을 테니 조심해라” “
둘이 있어 좋은 눈깔은 하나만 가지구 하나라야 쓰는 아가리는 둘씩 가지면 저
는 무엇이 되라구요” “쓸데없는 아가리 고만 놀리구 네 집에 가서 행장이나
수습해 가지구 나오너라” “지금 해가 다 져가니 제 집에 가서 하룻밤을 드새
시구 내일 어뜩 새벽 떠나시지요” “어쨌든지 네 집으루 가자. 네 집이 여기서
멀지나 않으냐?” “바루 이 숲 뒨데 엎드러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깝습니다” 노
밤이가 꺽정이의 말을 대답한 뒤 졸개를 가르키며 “저 사람은 데리구 오신 짐
꾼이오니까?”하고 물어서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이니 곧 졸개를 돌아보며 “여
게 어서 짐 지게”하고 저의 짐꾼을 부리듯이 말하였다. 졸개가 옆에 놓은 짐을
그대로 두고 몇 걸음 꺽정이에게로 가까이 나와서 “저 애꾸의 집으루 가시렵니
까?”하고 묻는 것을 꺽정이는 대답할 사이도 없이 노밤이가 대번에 혀를 차고
“이 자식아, 구렝이를 똑 구렝이라야 맛이냐. 너같이 뱀뱀이 없는 놈은 생전 남
의 짐이나 지구 다녔지 별조없다”하고 욕설하였다. 가는 말이 곱지 못하니 오
는 말도 고울 까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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