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이 끝난 뒤에 노밤이가 행장을 수습하여 내버리고 가기 아까운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로 많아져서 부담상자 하나가 뚜껑이 잘 덮이지 않도록 쑤시
어 넣고도 옆에 붙이고 위에 얹을 것이 많이 남았다. 구중에 돗자리와 기직자리
는 함께 돌돌 말았으나 길이가 있어 거추장스럽고 입쌀과 서속쌀은 한 자루에
올망졸망 넣었으나 무게가 묵직하여 이 두가지를 노밤이는 졸개에게 떠맡길 생
각으로 “자네 짐은 내 짐버덤 휠씬 가볍지?”하고 졸개에게 말을 붙였다. “왜
그래? 가벼우니 짐을 바꾸어 줄까?” “자네가 그런 선심이 있다면 제법이게.
건너다보니 절터가 환한걸.” “내가 난생 처음 선심을 좀 써볼랬드니 제법 소
리가 듣지 창피해서 고만두겠네.” “짐을 바꾸면 자네는 선심 있는 사람 되구
나는 염의 없는 사람되니 내가 곱는 속 아닌가. 자네가 바꾸어 준대두 내가 바
꾸지 않네. 그런데...” “그런데 어떻단 말이야?” “우리 둘이 대장을 뫼시구
가는데 내가 무거운 짐을 지구 허덕거려서 길이 더디어지면 그게 황송하지 않은
가.” “그렇기에 누가 짐을 무겁게 만들라나? 다 내버리구 맨몸으루 가세그려.
” “짐에 더 넣어 좋을 것은 많이 있지만 짐에서 도루 빼놓을 것은 하나두 없
네.” “그러면 무거운 짐을 지구 가는 게지.” “우리 둘이 무거운 짐 가벼운
짐 돌려 지구 가면 어떻겠나?” “그건 내가 싫은걸.” “우리가 인제는 한집안
식군데 그걸 싫단 말이냐. 사람의 자식이 인정머리가 그렇게 없어선 못쓴다.”
“골을 내면 내가 얼른 그렇게 하자구 할걸.” “싫다는 걸 누가 치사스럽게 조
르겠나. 고만두게.” “고만두라면 겁나는데.” “자리 뭉치하구 쌀자루나 자네
맡게.” “그건 왜 맡으래?” “자리는 대장 깔아 드릴 게구 쌀은 길양식이야.”
“대장께서 분부나 하시면 모를까 자네가 맡으래선 못 맡겠네.” 노밤이가 꺽정
이를 바라보고 “분부 좀 해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을 꺽정이가 “너희끼리
의논해서 하려무나.”하고 들어주지 아니하니 노밤이는 다시 졸개를 보고 “의
논해서 하라시니 우리 의논하세. 내 짐은 무겁구 자네 짐은 가벼우니 자네가 더
져야 사리가 옳지 않은가.”하고 바로 의논성 있게 말하였다.
“나는 내 짐 외에 지푸래기 하나두 더 지구 갈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
” “내가 자네더러 아저씨라구 할 테니 더 지구 가세.” “아버지라구나 한다
면 생각해 보지.” “아버지라구 하면 꼭 지구 갈 텐가?” “그래 보지.” “그
럼 아버지라구 함세.” “아버지라구 불러봐라.” 노밤이가 졸개더러 호부까지
하고 필경 자리 뭉치와 쌀자루를 떠맡겼다.
꺽정이가 졸개와 노밤이를 데리고 영평 도덕여울서 떠나서 포천 솔모루 와서
중화하고 일 마장 가량 길을 왔을 때 바른손편 갈림길에서 초립동이 하나가 무
엇에 쫓긴 것같이 엎드러지며 고꾸라지며 뛰어왔다. 노밤이가 맨 앞에 오다가
먼저 보고 괴상히 여겨서 걸음을 멈추고 섰는 중에 초립동이가 허둥지둥 쫓아오
더니 가슴에 안기려는 것같이 앞으로 달려들며 밑도끝도없이 “어머니 좀 살려
주세요.”하고 소리질렀다. 노밤이가 초립동이를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면서
“어머니가 어디 있어?”하고 물으니 초립동이는 숨이 턱에 닿아서 입을 벌리고
헐떡거리다가 얼마 만에 우는 소리로 “석문령 고개서 도적을 만났세요.”하고
대답하는데 울음 반 말 반이라 말이 똑똑치 못하였다. “어느 고개서 도적이 났
어?” “석문령 고개요.” “그래 그 고개서 어머니가 도적에게 잡혔단 말인가?
” “녜.” “도적이 어머니를 죽이려구 하든가?” “죽이려구 하는 건 못 봤세
요.” “그럼 어떻게 하든가?” “붙들구 끄는 것만 보구 왔세요.” “어머니가
나이 젊은 걸세그려.” “얼른 가서 어머니 좀 살려 주세요. 그 동안 벌써 어떻
게 됐는지 모르겠세요.”
노밤이가 뒤에 와 섰는 꺽정이를 돌아보며 “어떻게 할까요. 가봐 주는 게 좋
겠지요?”하고 의향을 묻는데 꺽정이는 노밤이의 말을 대답 않고 초립동이 보고
말을 물었다. “도적이 여러 눔이드냐?” “한 놈이에요.” “단 한눔이야? 너만
큼 큰 자식이 어미를 도적 한 눔에게 뺏긴단 말이냐!” “어른인걸요. 제가 어떻
게 당해요.” “못 당할 듯해서 어머는 내버리구 혼자 도망해 왔느냐?” “가라
구 발길루 차는 걸 어떻게 해요.” 초립동이가 발명같이 말하는 것이 꺽정이 비
위에 거슬려서 “너 같은 못생긴 자식은 어미를 뺏겨두 싸다. 얼른 네 집에 가
서 네 아비더러나 말해라.”하고 언성을 높여서 꾸짖으니 초립동이는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노밤이가 초립동이의 등을 뚜덕뚜덕 두들기며 “이 사람 울지 말게. 울면 어
머니 죽네. 어머니가 살아야 젖을 먹지.”하고 농조로 달래다가 “집이 어딘가,
여기서 가까운가?”하고 물으니 초립동이가 양편 손으로 눈물을 이리 씻고 저리
씻고 하면서 “비선거립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비선거리서 어디 가는 길인
가?” “포춘읍내 외가에 가는 길입니다.” “그럼 얼른 포천읍내 가서 외가 사
람을 데리구 오게.” “그 동안에 어머니는 죽으라구요?” “자네 어머니가 죽
지 않을 건 내가 담보할 테니 염려 말구 가게.” “싫어요. 나하구 같이 가서 어
머니를 살려 주세요.” 초립동이는 또 엉엉 울면서 노밤이에게 매어달렸다. 노밤
이가 꺽정이를 돌아보며 “이걸 어떻게 합니까. 불쌍하니 잠깐 가봐주시지요.”
하고 사날 좋게 권하듯 말하니 꺽정이는 얼굴에 미타한 기색을 보이면 고개를
외쳤다. 노밤이가 꺽정이를 보고 “그까지 좀도둑놈 한 놈쯤 저의만 가두 넉넉
합니다. 잠깐 여기서 쉬십시오. 저의 둘이 얼른 갔다오겠습니다.”하고 말한 뒤
곧 졸개를 보고 “우리 둘이 잠깐 가 봐주고 오세.”하고 말하니 졸개는 꺽정이
의 기색을 보고 “난 싫다. 갈라거든 네나 혼자 가거라.”하고 역시 고개를 외쳤
다. 노밤이가 혼자 석문령을 갔다 오겠다고 나서는 것을 꺽정이가 못 가게 금하지
아니하여 노밤이는 저의 짐을 길가에 벗어놓고 졸개 짐에 붙인 자리뭉치 속에서
환도를 꺼내서 몸에 지니고 초립동이를 데리고 갈림길로 나갔다. 졸개가 노밤이
와 초립동이의 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꺽정이 앞에 와서 “석문령 고개가 예서
멀진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전에 다녀본 가량이 있어서 “아마 삼
마장쯤 될 게다.”하고 대답하였다. “삼 마장이나 되면 갔다만 오재두 한참 될
텐데 밤이놈이 제멋대루 지체하구 오면 길이 여간 늦지 않겠습니다.” “오늘
당일 서울 대가기는 이왕 틀렸으니 길이 늦어두 낭패될거 없다.” “여기서 기
다리시렵니까?” “길가에 앉았느니 어디 양지바른 잔디밭으루나 가자.”
길 좌우편이 모두 논밭이라 앉아 쉴 만한 잔디밭이 없어서 꺽정이는 노밤이의
짐을 들고 졸개는 저의 짐을 지고 갈림길로 들어서서 한참 늘어지게 오다가 산
기슭 양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숭물스러운 밤이눔이 어떤 짓을 하나 슬
그머니 가보구 올까요?” 졸개가 말하는 것을 꺽정이가 허락하여 졸개는 노밤이
의 뒤를 쫓아서 석문령으로 오게 되었다.
노밤이가 초립동이를 데리고 석문령 고개 위에 돌아서서 “도적난 데가 어딘
가?”하고 초립동이를 돌아보니 초립동이가 소나무 많이 들어선 곳을 가리키며
“조기 조 솔밭 앞입니다.”하고 말하였다. 노밤이가 초립동이더러 멀찍이 따라
오라고 이르고 솔밭 가까이 내려오며 바라보니 솔밭 속에 너푼거리는 흰옷이 눈
에 뜨이었다. 도적이 여편네의 사지 잡아맨 것을 풀어주느라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중에 노밤이가 환도를 빼들고 솔밭에 들어서며 “이 개 같은 못된 놈아!”
하고 큰소리를 지르니 도적이 얼른 허리를 펴고 서서 노밤이를 뻔히 바라보았
다. “인두겁을 쓴 놈이 백주대로에서 개 같은 짓을 한단 말이냐!” “네놈이 웬
놈인데 남의 일에 참견이냐?” “하늘이 높은지 땅이 낮은지 모르구 이놈 죽일
놈 같으니.” “이놈아, 남의 일 참견 말구 어서 너 갈 길이나 가거라.” “너
같은 놈을 살려두면 우리네 이름까지 더러워진다. 얼른 나와서 칼 받아라.” “
네가 대체 어디서 온 놈이냐?” “뉘 손에 죽는지나 알구 죽으려느냐? 나는 임
꺽정이다.” 적이 임꺽정이란 성명을 듣더니 대번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인제 내가 누군지 알았느냐?” “양주읍내서 사시든 장사십니까?” “그렇
다.” “장사신 줄 모르구 말씀을 불공스럽게 했습니다. 제가 다시는 이런 짓을
안할 테니 이번 한번만 용서해 줍시오.” “내가 초립동이의 청을 받고 너를 죽
이러 왔다.” “그저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봐하니 나이 새파랗게
젊은 놈이라 불쌍해서 특별 용서할 테니 빨리 도망해라. 초립동이가 울구 매달
리면 난처하다.” 도적은 몇 번 허리를 굽실거리고 솔밭에서 뛰어나가며 곧 쏜
살같이 고개 밑으로 내려갔다. 여편네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고 죽은 사람같이
자빠져 있는데 초립동이가 달려들어서 어머니를 부르며 몸을 흔들어 보다가 “
아이구 어머니 죽었네.”하고 혼감스럽게 울음을 내놓았다. 여편네가 겁과 분과
독을 못 이겨서 기함되었던 것이다. 노밤이는 이것을 짐작하고 “내가 침을 잘
놓네. 침 한 대루 자네 어머니를 살려낼 수 있으니 울지 말게.”하고 초립동이를
달래었다. “얼른 침을 놔주세요.” “가만 있게. 맥이나 좀 보구 침을 놓세.”
도적이 여편네의 사지를 네 군데 나무에 벌려 매었다가 두 다리만 풀어놓고
쫓겨간 까닭에 두 팔은 벌려 매인 채 있는 것을 초립동이가 돌아다니며 풀어놓
은 뒤에 “자, 맥을 봐주세요.”하고 청하니 노밤이는 여편네 바른손 편에 주저
앉아서 천연스럽게 맥을 짚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이 근처에 샘이 있나?”
하고 초립동이를 돌아보았다. “샘은 어디 있는지 몰라두 도랑은 가까이 있습니
다.” “얼핏 샘을 찾아가서 물을 좀 떠오게.” “무엇에다 떠와요?” “참말 떠
올 그릇이 없지. 길가에 혹시 깨진 바가지쪽을 내버린 것이 없나 눈살펴 찾아보
게.” “깨진 바가지쪽을 누가 이런 산중에 와서 버리겠세요?” “옳지. 된 수가
있네. 자네 주머니를 찼지?” “네, 찾세요.” “주머니 세간은 괴춤이나 바짓가
랑이에 넣구 그 주머니에 물을 담아가지구 오게." "주머니 안이 더러운걸요." "변
통성 없는 사람이로군. 주머니 안을 뒤집어가지구 한번 북적북적 빤 뒤에 물을
담게그려. 빨리 갔다 빨리 오게." 노밤이가 초립동이를 물 뜨러 보낸 뒤에 한번
싱긋 웃고 여편네 아랫도리에 잘 여미어지지 않은 옷 틈으로 살이 드러난 것을
손으로 덮으면서 "보아 하니 늙두 젊두 않으신 터수에 이런 망신이 어디 있습니
까. 백주에 행길에서 이 망신을 시키다니 그놈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막비
일수 불길한 탓이니 이러니저러니 할 것 있습니까. 이걸 남이 알면 망신에 더
망신이 되실 테라 나하구 자제하구 말을 내지 않아야 할 텐데 자제가 아직 지각
이 좀 부족할 듯하니 말 내지 말라구 단단히 일러두십시오. 이르시기가 거북하
시다면 내가 일러두겠습니다." 노밤이가 정신 잃은 여편네하고 이야기하듯이 시
벌시벌 지껄이는 중에 살을 덮어주던 손이 당치 않게 깊이 들어갔다. 노밤이는
홀저에 그 손을 빼치고 "나는 점잖은 사람이지만 잠깐만 점잔을 떼놓구 이야기
할 일이 있소. 내가 지금 꽃 본 나비 같구 물 본 기러기 같아서 그저 갈 수가
없소. 용서하우." 하고 흡사 귓속말하듯이 속살거렸다. 이때 졸개가 소나무 뒤에
붙어서서 노밤이의 동정을 엿보고 있다가 굵직한 나무 작대기 하나를 어디 가
집어가지고 와서 신발소리 없이 노밤이 뒤로 들어가서 볼기를 한번 되게 후려갈
기고 도망하였다. 노밤이가 일어나서 돌아다볼 때 졸개의 그림자는 벌써 어디로
없어져서 보이지 아니하여 노밤이는 솔밭 밖에까지 나와서 두리번두리번하다가
“그 도둑놈이 안 가구 어디 숨어 있었든가베.”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여편네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졸개가 꺽정이에게 와서 보고 온 노밤이의 지저구니를
자세자세 이야기하고 난 뒤 “그 따위 숭물스러운 놈을 수하에 거두어 두시면
일후에 무슨 낭패를 보여 드릴지 알 수 없으니 여기서 쫓아버리는 게 좋을 듯싶
소이다.” 이런 말로 간언까지 하였다. “밤이눔이 숭물스럽긴 해도 밉상은 아니
다.” “미친 놈같이 시룽시룽하는 것이 밉지는 안하와두 위인이 하두 숭물스러
워서 말씀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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