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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8권 (22)

카지모도 2023. 7. 1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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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가 망건은 안 쓰고 탕건 위에 갓만 쓰고 웃옷까지 입고도 처네를 두르고

앉아 있다가 손들이 방안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비로소 통인들의 부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서흥부사 김연은 환진갑 다 지난 노인이라 술이

취한 것 같은 불그레한 얼굴에 은실을 늘인 것 같은 흰 수염이 서로 비치어서

풍신이 좋았다. 무과 출신의 일개 수령이로되 풍신은 훌륭한 노재

상과 같았다. 박참봉은 그 풍신 대접으로라도 절 한번 하고 싶었으나, 유도사 하

는 대로 따라 그대로 앉아서 입인사를 하였다. “노형 연기가 올해 몇이시오?”

“내 나인 몇 살 안됩니다. 갓 마흔입니다.” “저 노형은?” “서른아홉입니다.

” “나는 올에 예순일곱이오.” 부사가 하인에게 물어본 나이들을 다시 묻고

또 자기의 나이를 분명히 말하는 속에 나이 자세하는 티가 보이었다. 연치가 이

십세 이상 틀리니 연존장인데 인사할 때 절 않고 입인사하고 자칭을 시생이라

하지 않고 나라고 하는 것이 감사의 친척이라고 방자히 교부리는 것이거나, 그

렇지 않으면 자기를 호반이라고 시삐 대접하는 것이거니 주인은 손들을 미타하

게 여기고 낫살 먹었다고 바로 거드름을 부리는 것이 어쭙지 않고 같지 않아서

손들은 주인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수작이 잘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주인 손 세

사람이 한참씩 덤덤히 앉아 있었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우두머니 앉았는

것이 싱겁기가 짝이 없어서 유도사가 사처로 나가겠다고 말을 내니 부사는 주인

된 체면에 안되었던지 “술들이나 한잔씩 자시구 나가시지. 나는 감기루 먹지

못하지만.” 대작 않고 술을 먹이려고 하였다. 부사가 옆에 섰는 통인더러 약주

한 상 차려 드리게 하라고 이르는 것을 유도사가 고만두라고 말하고 박참봉과

함께 일어났다. 이튿날 식전에도 부사가 전갈 한번 아니하였다. 유도사가 하인

을 보내서 이방을 불러다가 “너의 원님께 가서 상목 십여 필만 우리를 꾸어주

시면 우리가 서울 가서 부쳐 드리거나 해주 감영에서 보내 드리두룩 하마구 말

씀 좀 해라. 용처는 말씀 안해두 좋겠지만 평양 가서 쓸 것이다.” 토색을 하였

더니 이방이 관가에 들어가서 한동안 늘어지게 있다가 서총대 무명 다섯 필을

가지고 나와서 “상목 십여 필은 갑자기 변통할 수가 없어 못 보내 드리니 미안

합니다구 이것이 약소하나마 노비에 보태 씁시사구.” 부사의 전갈을 하자마자,

곧 유도사는 큰소리로 하인들을 불러서 이방을 맨땅에 잡아 꿇리고 “우리가 너

의 골에 비럭질을 왔더래두 대접을 이렇게는 못할 게다. 너는 죄가 없지만 매를

좀 맞아라. 그러구 너의 원님께 가서 죄없이 매맞았다구 하소연해라.” 하고 꾸

중한 뒤 하인들을 호령하여 이방은 멍석말이 매로 매를 십여 개 치고 서총대 무

명은 이방 보는 데서 짓밟아 버리게 하였다. 유도사가 이방을 사이에 넣고 부

사를 욕보인 뒤 바로 서흥서 떠나서 봉산으로 향하였다. 칠십 리 길이 그다지

멀지도 않거니와 늦게 떠난 가량 하고 길을 조여온 까닭에 봉산읍에 들어올 때

해가 아직 높이 있었다. 장터 길가집 하나를 골라서 사처를 정하고 이때까지 해

온 전례대로 하인을 관가에 들여보내서 저녁 후에 군수를 찾겠다고 선성

을 놓게 하였더니, 하인이 나올 때 아전 하나가 따라나와서 문안하고 저의 말로

안전께서 지금 아무 일도 없으시니 곧 들어가서 만나시는 게 좋겠다고 하여 유

도사와 박참봉이 그 아전을 앞세우고 저녁 전에 관가로 들어왔다. 군수 윤지숙

이 얼굴은 깨끗하게 생겼으나 왼쪽 광대뼈에 고약을 붙여서 육냥이 틀려 보이었

다. 초면의 인사 수작들이 끝난 뒤에 군수가 유도사를 보고 해주서 오느냐, 봉산

을 처음 오느냐, 서울집이 어느 동네냐, 서울 누구를 아느냐 모르느냐, 이런 말

을 대답하기 성가시도록 가지가지 물어서 유도사는 대강대강 대답하고 군수의

묻는 말이 그친 틈에 “얼굴에 고약을 붙이셨으니 면종이 나셨소?” 하고 물으

니 군수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단친 않으나 뼈끝이 되어서 잘 낫지 않는구

려.” 대답하고 더 캐어묻지 못하게 하는 의사인지 얼른 다른 수작을 꺼내었다.

“사처를 조용한 처소로 옮기면 어떻겠소?” 군수가 묻는데 “옮겨두 좋구 안

옮겨두 좋소.” 유도사가 두통싸게 대답한즉 군수는 옮기라고 더 권하지 않고

수통인을 불러서 “내가 아까 이른 말 있지? 그대루 지휘해라.” 하고 분부하였

다. 밑도끝도 없는 군수의 분부가 다담상을 미리 일러둔 것이려니 유도사는 지

레짐작하였더니, 다담상은 소식이 없고 방안은 어두워서 촛불을 켜게 되었다. 유

도사가 박참봉을 돌아보며 사처로 나가자고 말하니 군수가 손을 내저으며 “가

만히들 기시우. 좀 이따 나하구 같이 새 사처루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새

사처라니?” “사처를 옮겨두 좋다구 하시지 않았소?” “글쎄, 옮겨두 좋지만

인제 언제 옮기겠소.” “내가 새 사처를 정하구 행구를 옮기라구 일러놓았소.”

군수의 하는 짓이 좀 건방지나 후의인 것은 틀림없는 듯하여 “우리가 절에 간

색시 꼴이 되었구려.” 하고 유도사는 웃었다. 거미구에 수통인이 들어와서 저의

원님께 “분부대루 거행했소이다.” 하고 여쭈니 군수가 고개를 끄덕인 뒤 유도

사와 박참봉을 보고 “새루 정한 사처가 어떤가 우리 같이 가봅시다.” 하고 먼

저 일어나서 유도사와 박참봉도 군수를 따라 일어섰다. 새로 정한 사처란 동헌

뒤에 있는 책실인데 방 둘, 마루 하나 있는 조용한 딴채집이었다. 깨끗한 새 자

리를 깔고 청심박이 대초를 켜놓은 책실 큰 방에 들어와서 군수가 유도사와 박

참봉을 돌아보며 “사처방이 어떻소? 맘에들 드시우?” 하고 물은 다음에 “관

청 음식두 맛깔지 않지만 그래두 장터 음식버더는 좀 나을 듯해서 사처는 이리

옮기구 하인들만 먼저 잡은 사처에서 묵게 하려구 맘을 먹구 들어오시기들 전에

미리 일러두었었소.” 하고 말하여 유도사는 웃으면서 “손들을 편하게 해주는

건 후대지만 손들을 놀리듯이 속인 건 박대니 치사해야 옳소, 원망해야 옳소?”

하고 우스개로 대답하였다. 군수가 뒤따라온 통인더러 저녁상을 곧 들이라고 말

하여 얼마 아니 있다가 저녁밥 두 반상이 들어와서 유도사와 박참봉이 먹기 시

작한 뒤 군수는 동헌으로 올라갔다. 저녁 후에 군수가 올라오라고 청하여 유도

사와 박참봉이 동헌에 와서 보니 기생이 여럿이 있었다. 주인과 손이 정당한 담

화를 하는 것보다 기생들과 섞여 허튼 수작을 많이 하는 중에 어느덧 밤이 들었

다. 군수가 기생들을 시켜서 주안상을 들이게 한 뒤 주인과 손이 다 같이 의관

을 파탈하고 술을 먹기 시작하였는데, 술과 안주는 평산 폭만 못하면 못하지 나

을 것이 없으나 시중드는 계집들의 희고 보드라운 손이 술맛을 돋아서 유도사와

박참봉은 마음이 흐뭇들 하였다. 얼굴 반주그레한 기생 둘을 하나는 유도사에게,

또 하나는 박참봉에게 수청들라고 군수가 일러서 그 기생들이 유도사와 박참봉

에게 각각 특별히 친근하게 굴었다. 박참봉은 마음이 흐뭇한 중 일층 더 흐뭇하

였으나, 유도사는 자기에게 돌아온 기생이 눈에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자기 마

음대로 고르라지 않고 몫을 지어 주는 것이 마음에 시쁘었다. 군수가 술이 거나

하게 취한 뒤부터 같지 않은 흰소리를 많이 하여 듣기에 괴란할 지경이나 극진

한 대접을 받는 처지에 구태여 무안 줄 것이 없어서 유도사는 한손 놓고 흥흥

코대답하였다. 군수가 건방진 수작도 많이 하고 실없는 소리도 간간이 하되 평

산부사 장효범과 같이 허교는 청하지 아니하므로 유도사가 먼저 “여보게, 우리

벗하세그려.” 하고 말한즉 군수는 선뜻 대답을 아니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내

가 이때까지 문관이나 남행하구 벗한 일이 없는데 자네들하구는 벗하겠네. 나루

는 파격일세.” 하고 대답하였다. “자네가 문관과 남행을 나삐 보나?” “피장

파장이지.” “왼 세상이 다 호반을 나삐 보는 걸 자네가 혼자 높이 보면 높아

지나?” “호반이 어째 나쁜가? 까닭 모를 일이니 까닭을 알거든 말 좀 해보게.

” “호반에 사람 같은 것이 없는 까닭이겠지.” “무엇이야? 호반

에 사람이 없다니! 그런 말 함부루 못하네. 우리 태조대왕께서두 여조 호반이실

세.” “누가 고려 적 일 말하나. 지금 세상 말이지.” “근세루 말하더래두 우

선 정국원훈 평성부원군이 호반이 아닌가. 올 사월에 돌아간 장판윤장이 어떠한

인물인 건 자네들 들어라두 알겠지. 그러구 지금 양산 군수 장필무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잘 모르지만 일대인걸일세. 그런데 오십지년에 일개 군수루 썩네 썩어.

그 외에두 남치근 남포장이며 김세한 김병사며 호반에 인물 많지. 문관이나 남

행을 두름을 엮으면 그런 인물 하나를 당할 줄 아나? 호반에 사람이 없다니 그

게 말인가, 무언가.” 군수는 얼굴에 핏대를 올리고 떠드는데 유도사는 웃으며

듣다가 “윤지숙 윤봉산두 그 인물 틈에 한몫 끼겠네그려.” 하고 조롱하여 말

하니 “이 사람이 누굴 놀리는 셈인가.” 하고 군수가 골을 펄쩍 내었다. “주인

이 골을 내면 손이 미안스럽지 않은가.” “조롱을 받구 골 안낼 사람이 어디

있담?” “조롱이 무슨 조롱인가. 자네가 그래 인물루 남치근이나 김세한이만

못하단 말인가?” “내 말을 거기 얹을 까닭이 무언가?” “자네루 해서 말이

났거든.” “호반을 보구 호반에 사람이 없다구 말하니 그게 사람을 파깡청이

맨드는 수작이 아닌가.” “나두 호반 명색일세.” “아니 자네가 투필했단 말인

가?” “그랬네.” “그러면 그렇지. 자네 같은 사내다운 사내가 호반 출신이 아

니라면 변이지. 그런데 내가 서울 있을 때 자네 말을 영 못 들었어. 하여튼 우리

가 만나기가 늦었네.” 군수의 얼굴에 화기가 가득하여졌다. “자네들 여기서 며

칠 놀다 가게. 나두 도임한 지가 얼마 안 돼서 아직 구경을 못했지만 이 골에

좋은 경치가 많다네.” “평양에다가 가마구 기별한 날짜가 있어서 곧 가야겠네.

” “딴 소리 말게. 못 가네.” “아니야. 곧 가야해.” “내일 하루만이라두 더

묵어가게.” “그럼 내일 좋은 경치나 구경시켜 주게.” 유도사와 박참봉은 봉

산서 하루 묵기루 작정하고 이날 밤 닭 울녘까지 군수와 같이 술들을 먹었다.

구경 다닐 공론이 처음 났을 때, 유도사가 기생들더러 어디 구경이 제일 좋으냐

물었더니, 혹은 봉황대가 유명하다고 말하고 혹은 양익봉이 기특하다고 말하고

또 혹은 수동이 신기하다고 말하고 그 외에도 나한동 경치가 좋다, 영천 약물이

좋다, 부엉바위 용추가 좋다, 좋다고 말하는 데가 하도 많아서 하루에는 다 구경

할 가망이 없었다. 군수는 구경을 숫제 그만두고 환취루에서 하루 놀자고 하는

것을 유도사가 이왕이니 어디든지 구경을 가자고 말하여 휴류성과 신룡담을 구

경하고 봉황대까지 나가서 대 아래서 천렵하고 놀다가 오기로 작정들 하였다.

이튿날 아침 전에 군수가 이날 공사를 대강 마치고 아침이 지난 뒤, 봉황대

아래서 천렵하고 점심 먹도록 준비를 차려놓으라고 분부하여 아전, 사령, 관노,

관비 십여 명 사람을 봉황대로 바로 보내는데, 술시중할 기생들과 심부름할 통

인들도 먼저 가서 등대하고 있으라고 함께 보내고, 군수는 유도사, 박참봉 두 손

과 같이 말들을 타고 마부, 하인 육칠 명을 데리고 휴류성으로 향하였다. 군수의

말은 부연 털에 손바닥 같은 붉은 점이 듬성듬성 박힌 얼룩인데, 귀가 뾰족하고

눈이 모진 것이 열기가 있어 보이고 다리가 날씬하고 굽이 높은 것이 걸음을 잘

하게 생겨서 말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누가 보든 탐낼 만하고, 유도사의 말은 절

따요, 박참봉의 말은 백따인데 절따는 잘생기진 못하였어도 그대로 탈 만하지마

는 백따는 모색만 깨끗할 뿐이지 몸이 질둔하게 생긴데다가 서흥서 봉산으로 오

는 길에 길을 보지 않고 한눈팔다가 돌 사닥다리에서 굽 하나를 몹시 접질리더

니 그 굽을 아직도 아껴 딛고 안장까지 제 것이 아니라 등에 잘 맞지 않는지 몸

을 연해 뒤흔들었다. 읍 밖에 나온 뒤부터 탄 사람들이 모두 자견을 하여 말들

이 견마잡이에게 성가심을 받지 않게 되니, 얼룩이가 절따, 백따와 한데 섭쓸려

가기 창피하다는 듯이 들고 달아나서 절따는 쫓아가려고 가탈걸음을 걷다가 네

굽까지 놓고 백따는 허덕허덕하다가 고만 지쳐버려서 까맣게 뒤떨어졌다. 군수

가 손들과 하인들을 뒤떨어뜨리고 혼자 쮜가는 것이 체모에 틀려서 말을 억제하

여 세우고 기다리는 중에 유도사가 쫓아와서 말을 멈추며 곧 “자네 말 나 좀

빌려주게.” 하고 청하였다. “빌리다니 바꿔 타잔 말인가?” “아니 평양까지

타구 가게 빌려달란 말일세.” “내 말은 말을 썩 잘 타는 사람이 아니면 타기

가 어려운걸. 놈이 성질이 순하지 않아서 견마를 잡히면 걸음을 안 걷구 자견을

하면 제어하기 어렵구 사람 애먹이네.” “그건 염려 말구 빌려만 주게.”“그러

구 내가 쉬 감영에를 갈 텔세.”“언제 갈 텐가? 내일 모레는 안 가겠지.” “얼

굴의 고약만 떼어버리면 곧 갈 테야.” “내가 평양 가서 하인 하나를 곧 올려

보낼 테니까 이틀 가구 이틀 오구 넉넉잡구 닷새 동안만 빌려주게.”“빌려준대

두 자네가 잘 탈는지 모르겠네.” “봉황대까지 가는데 나하구 말을 바꿔 타세.

그럼 알겠지.” “어디 그렇게 해보세.”

군수와 유도사가 다 각기 말께서 내릴 때 마부와 하인들이 쫓아오고 다시 얼

마 동안 지난 뒤에 박참봉이 겨우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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