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4권 (25)

카지모도 2024. 5. 29. 07:03
728x90

 

"그래서 어디다가 멩당을 썼다요?"

심드렁한 목소리다. 몸이 방에 있어 이야기를 듣는 중이라 말로는 그렇게 물으

면서도 정작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그런 말투였다. 그러고 보니 이 며칠

동안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춘복이였다. 허우대 벌어지고 힘 또한 남의 일

몇 몫은 하면서, 거멍굴의 근심바우 저쪽 동산 기슭에 얼기설기 제 손으로 얽은

농막에 혼자 살고 있는 춘복이는, 부모도 없고, 형제나 일가 피붙이 하나도 없

는 떠꺼머리였다. 그러나 말이 떠꺼머리지 나이 서른의 턱에 걸려, 걱실걱실한

생김새에 번듯한 인물을 가지고, 무엇이 모자라 장가를 못 가는가 하여 공배 내

외는 애를 많이 태우면서, 몇 번인가는 그 일로 아주 차분이 마음먹고 타이른

일도 있었다.

"이 썩을 놈아. 너도 인자 늙어 봐라. 너라고 머 펭상 젊을지 아냐? 뼈다구 쇠

토막 같을 적에야 머엇이 부러어? 늙어 봐야 속을 알제. 머, 장개가고 시집가고

자식나서 키우는 일이, 재미야, 재미야, 오져서들 허는 일인중 아냐? 그거 다

그날부텀 고생인 거이여. 고생 덩어리 꽝아리에다 이고, 지게에다 지고, 서로

만나서 고생으로 자식 키우는 게 인생이여. 아, 존 날도 있제 왜 없겄냐. 근디

존 것은 잠깐이고 궂은 날은 한 펭생이여. 우리 같은 인생이 무신 용 빼는 재주

가 있어서 마른 날 깢신을 신고 꽃귀경을 댕기겄냐. 그런디, 또 그거이 다가 아

니여, 아 그런 고생도 같이 헐 동무가 있어야능 거이고, 또, 사람으로 나서 꼭

해야 헐 고생은 해야만이 사램이라고 헐 수가 있는 거여, 알겄냐? 호강허자고

시상사는 거이라먼 진작에 죽지 못 살 사람, 천지에 쌔 부렀다잉? 니가 니 사람

데리다 놓고 이마빼기 비지땀 흘림서 멕에 살릴 일을 밀부터 헛배 빠지게 생각

헐 것이 아니라, 의지 가지 없는 니 처지를 돌아보아. 부부일신이라고 허는디,

인자 니가 한 개가 아니고 두 개가 된다고 갯수를 시어 바라, 갯수를, 좀. 혈혈

단신 혼자 사는 시상허고 그거이 같겄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디. 고생시런

한펭상을 같이 들먼 훨썩 낫제, 서로 짐을 이어 주고, 지어 주고, 도란도란 아

애기도 허고 말이여. 자식도 그려, 그게. 나는 복이 없어 에린 놈 앞세우고 말

었지마는, 쥐새끼도 암구가 짝을 짓고, 개미도 알을 낳느느디. 삼라만상 목심

붙어 있는 거이라면 다 지 새끼 퍼칠 일말고 더 큰일이 없는 거이다. 그거이 이

치여. 너 이놈 맨날 생기도 안헌 자식 두고 모진 소리, 악담, 잘허드라만 그러

는 거 아니다. 사램이 순해야제. 왜 자식 낳기 싫어서 장개 안 간다 소리를 염

불맹이로 외고 공을 딜여, 그렇게. 좋은 자식 주시라고 빌어도 시언찮은 놈이,

이놈아, 자식 없으먼 그걸로 니 놈은 끝이여, 끝. 누구라도. 끝난다고. 없어져

어. 아, 이놈아, 내가 끝이고, 나 끝나먼 천지에서 기양 나는 없어져 불 거인

디, 그 허망헌 인생이 무신 희맹이 있어? 없제. 그렁게 자식이 있어야여. 그거

이 내 끈이그던. 나 짬매 주는 끈. 니가 그런 시정을 모르고 매급시 젊은 혈기

만 맏고 성질대로 궁글어 살다가, 나이 들어 늙어 바라. 농사꾼이 농사 지어 논

거 없이 가실 당헌 것허고 똑같제. 아, 모 숭그고, 지심매고, 뙤약볕에 대그빡

벗겨짐서, 비가 오먼 와서 걱정, 안 오먼 안 와서 걱정, 자다가도 바람 소리에

몇 번씩 일어나 앉는 그런 날을 지새야 나락을 빌제. 공으로 얻는 거이 어딨냐,

세상에. 그런 고생이 싫어서 빈 손 놀렸으먼 빈 지게 지고 굶어야제. 인생도 그

런 거이다. 니가 나만이나 복이 없어서, 일찌거니 부모 잃고 때갈로 살어 놔서,

부모가 머인지, 자식이 머인지, 언제 머 어째 본 일도 없이 나이만 먹어 갖꼬

속 빈 강정맹이로 허우대만 멀쩡헌디, 그 속을 니가 지은 니 정으로 채우그라,

따숩게. 그렇게 늘 부글부글 부아로 그뜩 채우지 말고. 그러고 고생 좀 디 히

여. 젊응게. 고생이 다 거름이여. 고생을 바쳐야 니 인생이 늙어서 갠찮히여.

이놈아, 키워 논 자식도 있어야고."

상놈의 씨, 그것도 고리배미 같은 민촌도 못 되고 팔천 중에 제일 낮은 백정과

당골에 섞여 사는 거명굴 근심바우 아래 태어나서, 크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상

놈 되겠지마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애지중지했던 어린 것이 황달을 앓다가 죽어

버린 뒤로, 먼저 간 놈 대신 내버려진 춘복이를 거두어 기른 정이 애틋한 공배

로서는, 춘복이 하는 일이나 말을 대수롭게 넘기지 못하고 사사건건 잔소리처럼

토를 달고 나서게 되는 것이었다. 저도 그런 정을 알고 있겄지. 공배는 생각하

였다. 춘복이는 본디 소가지가 불퉁스러워 말을 참지 못하는 것이 늘 아슬아슬

하였지만, 그런대로 물 건너 매안의 문중 마을에 가서는 뚝심있게 일도 잘해 냈

는데, 그를 머슴으로 부리겠다는 집은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춘복이 또한, 누

구한테 매이어 코뚜레 값으로 새경 멏 푼 받고 남의 집 농사일을 뼈빠지게 해

줄 위인이 못 되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4권 (27)  (0) 2024.06.01
혼불 4권 (26)  (1) 2024.05.31
혼불 4권 (24)  (0) 2024.05.28
혼불 4권 (23)  (0) 2024.05.27
혼불 4권 (22)  (0) 2024.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