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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27)

카지모도 2024. 6.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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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복이는 노상 그렇게 말했다. 만약에 그것이 그냥 해 보는 말이었다면 장가를

가도 열 두 번도 더 갔을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고개를 흔들어 버린 중매 자리

를, 나중에는 아예 말도 못 꺼내게, 춘복이는 듣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알었다. 오냐, 이 빌어처먹을 놈아. 장개도 못 가 보고 죽으먼 몽달구

신이 된다는디, 인자 너 알아서 허그라. 니 멋대로 히여."

끝내는 그렇게 말을 해 버리고 말았지마는, 그래도 저러다가도 돌아설 날이 있

겄지, 싶은 마음을 공배는 버리지 않았다.

"그런디, 옹구네는 멋 헐라고 그렇게 춘복이 궁뎅이만 바싹 따러 댕기는가 모르

겄소. 치매 자락을 꼬랭이맹이로 흔들어댐서."

그렇지 않아도, 새얌가에 앵두꽃 핀 날 아침, 비얌굴로 떠나는 새각시 얌례가

꽃 옆에 서서, 안녕히 계시라고, 아리짐작 고운 얼굴로 하직 인사를 할 때, 어

떻게나 아깝고 애석한지 저도 모르게 공배는

"인자, 보고 자와서 어쩌끄나."

그 말만 겨우 하고는 마음이 미어져

"가서 잘 살그라잉."

하는 소리도 못하고 말았었는데, 그 심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이 가물어 새

암 바닥이 벌겋게 뒤집히던 여름, 꼴같잖게 옹구네가 춘복이한테 다리를 걸고

넘어진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참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에이그으."

못마땅한 기색을 누르지 못하고 공배는 그 때 애꿎은 담뱃대만 빨았었다.

"호랭이 물어갈 노무 것들."

그런데 한 술 더 뜨는 것은, 춘복이란 놈이 그런 옹구네를 공배 보는 앞에서라

도 면박을 좀 주었으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이건 또 별 말 없이 그냥 두고 보는

시늉이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춘복이 순한 거 인자 알았그마. 하이고, 그 성질에, 지 맘에 거실리먼 우아

래도 없고 남녀도 안 개리는 사램이, 딴 디 가서 모질게 허디끼 왜 못히여, 긍

게. 콱 무질러서 언감생신 나분대들 못허게 해야제."

"엥기다 말테제. 저라고 생객이 없겄어? 그 독한 놈이?"

"생각대로 되간디? 그런 일이? 구렝이맹이로 칭칭 감는디 항우 장사라고 빠져

나와요? 총객이 과부한테 걸리면 뻬도 못 추스리게 녹아서 필경에는 병든 껍데

기만 남는다등만. 아니 왜 해필이먼."

"어 거 참, 시끄럽그만. 예펜네가 못헐 말이 없네 기양."

공배가 큰소리를 해버리는 바람에 공배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얌례를 놓친

것은 공배가 더 아까워하고, 춘복이 일은 공배네가 더 애가 닳아 발을 굴렀다.

하루 이틀에 달리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행태 때문에 두 내외는 도

무지 속이 편치 못했다. 허나 막상 드러나게 무엇을 어쩌는 것은 또 아니어서

"당신 춘복이한테 머라고 말을 좀 해 뵈겨."

하는 공배네에게

"눈으로 직접 보도 안헌 일을 갖꼬 어뜨케 나서겄어. 짐작뿐인디. 또 이렁 것은

부지지간에도 말허기 조심되는 거일텐디 말이여. 막말로 춘복이는 내 속으로 난

자식도 아니고. 매급시 잘못 건드렀다가는."

하고 말았다. 그런 낌새가 있다 해서 춘복이가 공배 내외를 대하는 것이 예전과

다르게 섬서해진 구석은 없었다. 마치 잉걸이나 불씨를 담은 화로위에 재를 덮

어 놓듯이, 서로의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입 밖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덮어 두

고는, 이 밤에도 화롯가에 둘러 앉아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화롯불에는

반드시 재를 덮어야만 한다. 그래야 불씨가 죽지 않고 오래 산다. 활짝 핀 숯불

이나 불땀 좋은 아궁이의 불덩이를 만일에 그냥 알몸이 드러나게 담아 두면 그

것은 금방 불기운을 다하고 시들어 버린다. 그러나 벌겋게 이글거려 꽃같이 난

만한 그 불씨 위에 다 타버린 재를 도둠하게 덮어 주면, 불씨는 무참하게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가 불씨를 품어 주어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다.

죽은 재가 산 불씨를 살게 하는 것이다. 앙걸불이나 잿불이거나 그 어둠의 재

속에 묻혀야만, 바알간 꽃눈을 뜨고 있는 것이니. 이 재를 헤적여 놓으면 화로

의 불은 그만 꺼져 버리고 만다. 사람의 정도 그렇고 세상의 이치도 그렇겄지.

"그냥 우선은 모른 척 덮어 두어. 무슨 일에 알어도 안 물어 보는 거이 다 낫을

수도 있응게."

공배의 말대로, 속으로야 어떻든 겉으로는 별 내색을 안하고 철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 다시 동지 섣달을 맞이 하였는데.

지난 며칠간 춘복이는 혼자 무슨 일을 궁리하고 있었는지, 그 아무도 없는 농막

에 외지게 틀어 박혀 코빼기도 비끗 안하더니, 오늘 밤에는 부시시 마실을 온

것이었다. 굳이 마실이라고 할 곳도 없이 이 공배네 오두막을 제 집처럼 이무럽

게 여기어 드나드는 춘복이었으니, 며칠간 얼굴 안 보인 것이 외려 이상한 일이

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그의 얼굴색은 얼핏 푸른 빛이 도는 것 같았다. 그

리고 말이 없었다. 그런 춘복이 쪽으로 고개를 배톨침하게 돌린 옹구네가 허리

까지 낭창하니 휘어 틀고 앉아, 도톰한 아랫입술 가운데 검댕이 슬쩍 스치듯 찍

힌 점을 웃니로 물었다 놓았다하며, 말곰말곰 춘복이 얼굴을 바라 보았다. 눈두

덩이 소복하면서 꼬리가 깊은 옹구네 검은 눈에 붉으스름한 주황 불빛이 그득

차 오르며 번들거린다. 하이고오, 예펜네. 꼭 무신 알록이 비얌맹이로 서리를

홰애 틀어 감고 앉아서, 대그빡 쳐들고는 눈구녁으로 춘복이 입맛 다시고 있는

것 점 바라. 저 눈구녁 깜박거릴 때 마동 비얌 쌔바닥이 날룽, 날룽, 허는 것이

기양 훤히 뵈이네, 뵈여. 수악허구라. 자식끄장 있음서 왜 저러까. 저노무 예펜

네는 도대체 머엇으로 생겠간디 저렇게 넘으 이목도 상관없고, 체면도 개리잖

고, 사나 소쯩이 들었능가. 원, 이런 사람 같으먼 어디... 허라고 멍석을 깔아

줘도. 평소에 모진 소리 잘 안하는 평순네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온몸에 기름

불빛이 미끄러지며 흘러내리는 옹구네가 검붉은 살덩어리같이 보여, 그네는 역

겨운 낯색을 감추지 못한다. 춘복이는 옹구네 시선 같은 것에는 아무 괘념도 하

지 않는다는 듯 짐짓 골이 난 사람처럼 부루퉁한 얼굴로 공배의 입시울만 바라

보았다.

"귀찮시러서."

한 날은 미련없이 떠꺼머리를 잘라 버리고 나서

"야 야, 너 꼭 벌초 안헌 묏동맹이다이? 대가리가. 수건이라도 짬매든지 해야

지, 풀머리 쏟아져서 어디 쓰겄냐? 이마빼기도 허전하고."

하며 아무래도 눈에 설어서, 높이 쳐버린 머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던 공배한테

춘복이는

"아재도 그께잇 거 기양 깎어 부리시오. 시언허게. 머리크락이 무신 신주단지라

고 한펭상을 이고 살어? 무거운디, 이만 끓고."

하고 말했었다.

"저 말허는 것 좀 바라. 머리크락이 왜 하찮은 거이간디? 그게 다 부모한티 물

려 받은 천금 같은 몸이여. 암만 요새는 세상이 바꼈다고 허지마는, 그래도 그

거이 무신 종(파나 마늘 줄기)인지 알기나 허고 대가리를 뻗든지 깎든지 해야

제, 무단히 사돈이 장에 간다고 거름통 지고 따라 나서는 꼴이 되까 싶다잉?"

"앗다, 오지게 큰 것 받었고만요? 부모 둔 덕에. 그것말고는 또 머 받은 거 없

소? 노비 전답이나 허다 못해 다 떨어진 짚신짝이라도? 몸뗑이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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