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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24)

카지모도 2024. 5. 28.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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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구네는 언젠가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고, 그 내우법잉가 화초댐잉가 허능 것, 그렁 것도 다 머이 있을 때 허는

이얘기제에. 울도 담도 없는 방 한 칸에 돼야지들맹이로 오글오글 삼서, 어따가

안채를 짓고 어따가 사랑채를 짓는당가, 거그다, 머? 누가 못 보게 내우벽을

쳐? 꾀 벗고 장도칼을 차는 꼴이제."

"동냥치 박적에 수실을 달고?"

옹구네가 두고 쓰는 말이어서, 옆에 있던 평순네가 앞질러 뒷말을 미리 받고는

속으로, 둘러다 붙이기는. 사람의 도리란 거이 머 가진 것 있다고 챙기고, 없다

고 팽개치는 거이간디? 매급시. 지가 허고 댕기는 행실이 있응게 누가 머라고

허께미 미리 입막음 허니라고. 하이고오. 울도 없고 담도없응게 그렇게 허구한

날 넘의 떠꺼머리 방으로 밤마실 댕기는가? 하면서도 겉으로는 별 내색을 하지

않고 말았었다. 말을 꺼내 보아야 옹구네 찰진 입심을 당할 재주도 없었거니와,

아무리 이웃 간에 오랜 세월 묵은 사이라고 해도 그런 일만은 내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이기 ㄸ문이었다.

각자 저 사는 속내야 어떻든, 마주치면 제 성질대로 부딪치기도 하고 또 참기도

하면서, 여름이면 마당의 멍석 위에, 겨울이면 오두막의 부들 방자리 위에 한

모둠으로 모여 앉아, 웃고, 이야기하고, 강냉이와 무를 노나먹는 것이 이 사람

들에게는, 한숨 많은 세상에 그나마 위안이고 또한 재미였다. 이렇게 모여 앉으

면, 자식 없는 공배 내외나, 부모 없는 춘복이, 그리고 서방 없는 옹구네, 평순

이 아비 있다 하나 한쪽 팔이 마르고 꼬부라져 아예 못 쓰는 곰배팔이라 늘 낯

빛이 근심스럽고 누렇게 무거운 평순네들도, 웬일인지 별로 외롭지 않고, 세상

사는 일 또한 그렇게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비록 금이 가고 귀 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테를 매어 쓰는 질화로에 재를 덮인 불기운이 뭉근하게 차 있듯이, 비천

하고 고달픈 거멍굴 사람들이 낱낱으로 부서져 흩어지지 않고 테 맨 것처럼 한

동아리로 살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속에 담고 있는 한줌의 여윈 정이 온기를 머

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배네가 숟가락만한 부삽으로 다독다독 질화로

의 재를 누른다. 화로야 어디엔들 없으랴. 흙으로 빚은 질화로말고도 곱돌, 무

쇠, 놋쇠로 조각을 하고 모양을 내서 만든 화로는, 아침, 점심, 저녁에 밥 짓고

국 끓이고 쇠죽 쑨 아궁이의 불덩이를 수북수북 담아 내어, 부엌에서부터 마루,

안방, 건넌방, 사랑방, 머슴방, 그리고 안팎의 마당이나 대문간, 그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아무 곳이나 갖다 놓으면, 천연스럽게 자리잡고 앉아서 제 온기로

주변을 훈훈하게 해 주었다.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늦가을 서리 내린 두의 논일,

밭일에 곱은 손을 쪼여 가며 가을걷이를 할 수 있도록 들판으로 가지고 나가기

도 하며, 수로라 하여 먼 길 가는 가마나 수레에 싣고 가기도 하는 화로. 마움

없는 사란이 없듯이 화로 없는 겨울은 생각 할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뼛속

까지 얼음이 끼치는 엄동의 한 추위와 살이 터져 나가게 모진 광막풍을 막아 볼

그 무엇 한가지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헐벗은 겨울의 복판에서 붉은 몸을 떨

며 찾는 화로는, 정말로 그것이 목숨일 때도 있는 것이었다. 얼매나 다행헌 일

이냐. 공배네는 생각하였다. 비록 보잘 것 없는 황토 흙집에 바람벽은 갈라지

고, 방바닥은 다 떨어진 부들자리 거칠지마는, 그래도 질화로 하나 있어 도레도

레 둘러 앉을수 있으니. 이 화롯가에 앉으면 추위를 저만큼은 물러나게 할 수

있고, 때갈로 낱낱이 흩어져 궁글던 사람들이 식구같이 가깝게 어울어져 시름조

차 잠시나마 잊게 되는 것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랴. 공배네는 잿불을 다독여

놓고 그 옆에 자꾸 까부러드는 등잔불의 심지를 들여다본다. 몇 수십 년이나 썼

는지 모를 나무 등경걸이는 손때와 기름이 깊이 절어들어 칠을 한것같이 반드러

웠다. 그것은 아직 나이 한창이던 공배가 소나무를 깎아서 만든 투박한 물건이

었다. 그러니 이 밋밋한 등경의 가슴패기에 기름 종지를 얹어 놓고 그 안에 무

명실 심지를 힘없이 드리워, 그 허구한 날의 어둠을 간신히 까물까물 지나온 셈

이었다. 한번도 환하게 타지 못하고 늘 반절은 어둠을 머금어 가무롬한 주황색

으로 번지던 불빛은, 등잔 옆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낯을 붉게 비춘다. 불빛은

얼굴과 옷갈피와 살 속으로 스며들어 그 등뒤에 커다란 그림자로 걸러진다. 그

래서 방안에는 구시렁구시렁 그림자들이 천장까지 가득 들어찬 것처럼 보였다.

"이얘기허시다 말었잖에요? 그 시님을 머엇을 어쩠능가?"

평순네가 여남은 살 먹은 딸년 평순이가 들고 있던 부젓가락을 뻇어 화로에 꽂

으며 공배한테 말했다.

"응, 그리여. 그 사명당이 인자 속환으로 나와 갖꼬 집집마동 탁발을 허로 댕기

다가, 하로는 어뜬 사람 묏자리를 하나 써 줄 일이 생겠드란 말이여, 어디가 갠

찮으끄나아, 허고 터억 둘러봉게로 저그만큼 황우도강, 누우런 황소가 유유히

강을 건네는 혈이 눈에 들으와. 하, 거 좋거든? 그래서 인자 그 자리를 자알 겨

냥해 갖꼬는, 어디다 뫼를 써 줬능고니."

공배는 손에 들고 있던 무 조각을 입에 넣어 버리고, 두 손을 주먹 쥐는 시늉으

로 오므리더니 검지손가락만을 오그당히 세워, 흰 터럭이 부숭숭한 머리빡 양쪽

에 갖다 대니, 그가 등지고 앉은 허름한 바람벽에 영락없이 뿔 달린 형상으로

금방이라도 걸어나올 것 같은 황소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드리워졌다. 그림자는

옷고름이 거꾸로 늘어진 저고리와 무명 치마, 그리고 구깃구깃한 핫바지들이 섞

여 걸린 대나무 횃대를 거멓게 덮고, 그 옆에 응긋응긋 일룽이는 사람들의 머리

통이며 어깨로 무슨 산봉우리 능선마냥 아어진다. 따가락 따가락. 문고리를 흔

들다가 지게 문짝을 날카롭게 두드리며 찢어진 풍지를 헤집고 들어오는 동짓달

한풍에, 방안을 간신히 채우고 있는 등잔의 불빛이 오르르 떨리자, 벽에 어린

그림자들도 따라서 우줄거린다. 그 그림자 동아리 어깨 위로 순간 귀때기를 세

우고 주둥이를 벌리어 캉 카강 카강 카앙. 짖는 개의 그림자가 비친다. 강아지

를 막 벗었는가, 한 손으로 만든 조그만한 그림자는 머뭇머뭇 서투르게 짖더니,

이번에는 두 손을 맞잡아 들어 올려 큰 개의 모양으로 둔갑을 한다. 컹 커겅 커

겅 컹. 이상하다. 마당이나 마루 밑. 길가 고샅에서 자고 새면 마주치는 강아

지, 누렁이, 삽살개 들은 돌맹이나 한가지로 흔하고 범상한 것이어서 조금도 신

기할 것이 없는데, 이렇게 등잔불에 비추어 손으로 만드는 그림자 개는 신기하

고도 주술적이다. 단순한 손 동작 몇가지로 귀때기 검고 눈구녁이 허연 짐승의

형상이 그림자로 드리워져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그 흉내내는 사물의 혼백이

그렇게 가볍고 검은 그림자로 비치는 것도 같았다. 그림자는 미묘한 귀기마저

느끼게 한다. 본 일 없이 낯설고 먼 세상이, 불빛 받는 바람벽에 홀연 불려 와

비친 것도 같고 손 대면 만져지는 살 가진 것들의 형상 속에서, 순간, 낯설고

먼 세상으로 넋이 비밀스럽게 빠져 나간 것도 같은, 그림자. 나훌 나훌 나훌.

황소의 구부러진 뿔다리 위로 이제는 나비가 된 개의 넋이 소리 없이 날아가 앉

는다. 그러다가 나비는 소리개가 된다. 불에서 멀리 있던 손이 등잔불 가까이로

다가들자, 소리개는 주황의 하늘을 다 뒤덮을 듯이 아주 천천히 날개를 세우며

돈다. 이것은 어른들 턱밑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추켜 들고 있던 평순이가,

심심하여 무심코 해 본 짓들이다. 아까부터 어미 평순네의 치마 꼬랭이를 손가

락으로 꼬아 감으며 어미한테 제 몸뚱이를 비비대다가, 또 화로에 담긴 잿불을

부젓가락으로 쑤셔 보다가,

"불 노락질 허지 말어. 꺼진다. 자다가 오짐 싸고."

공배네한테 한 소리를 듣고는 무색하여 어미의 등 뒤에 낯바닥을 붙이고 있던

평순이가, 문득 바림벽에 나타난 황소 그림자를 보고, 조막만한 손을 들어 손바

닥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제가 흉내낼 줄 아는 그림자를 하나씩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평순네는 평순이가 하는 짓을 내버려 두고, 다른 사람들도 이번에는

그만두라 하지 않는다. 느슨하게 앉아서, 날아가는 솔개 옆에 달아나는 닭 한

마리를 시늉해 주던 춘복이가 공배한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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