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변동천하
"긍게 사명당이 원효대사 제자라."
사람의 몸이 나이 들면 그 외양이나 근력이 작년 다르고 올 다르다더니, 이번 겨
울, 눈도 별로 내리지 않은 깡추위에 삐쩍 마르고 오그라들어 완연 늙은이 형용
이 되어 버린 공배는, 주름골이 깊이 패인 양쪽 볼따구니가 훌쭉하게 들어가도록
곰방대를 빨며 말했다. 곰방대는 댓진이 뻑뻑하다. 결이 갈라진 그의 음성에도 댓
진이 끼여 있다.
"그게 누구간디요?"
묻는 것은 평순네다.
"잉? 그게? 시님이제. 이조 유명헌 시님 아니라고? 둘다. 참 몇 백 년 몇 천 년
만에 한번이나 나는 출중허신 냥반들인디."
"이것 조께 잡사 뵈겨."
"머이여. 이게?"
말 중간에 공배네가 옆에서 막 깎은 무를 보기 좋게 토막 내어 공배 앞으로 밀
어 놓는다. 대가리가 파릇하고 속이 시리게 흰 무다. 어석. 소리가 나게 한 입
베어 문 공배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것 한 번 먹어 보라고 손짓을 한다.
"아이고, 시언하다. 매옴허니. 속이 다 내리가네 기양. 끄어억. 무시 맛은 그저
동지 섣달 엄동 설한에 눈은 쌯이는디 밤은 짚우고, 모다 둘러앉어서 이얘기허
고 놀다가잉, 얼음뎅이맹이로 찬 요런 놈을 속 덜덜 떨어감서 먹어야 지 맛이
여. 요런 때 먹는 요런 무시는 나주 배허고 안 바꾸제잉."
어석. 공배는 물 많고 단단한 무를 맛나게 다시 한 입 벤다.
"아재가 머 언제 나주 배를 잡사 보기나 허곘소? 암만허면 달고 연헌 배가 맛나
지 매운 무시가 맛나까? 배 고픈디 빈 속에 먹으면 속이나 할키고."
방 한쪽 귀퉁이에 놓인 허드레 자루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은 춘복이가 불
퉁스럽게 한 마디 박는다.
"먹어 바야 알간디? 안 먹어 보고도 다 알어. 야 야, 그게 내가 지어낸 말이 아
니라 입맛 개리는 양반들도 다 허는 소리단다."
양반. 그 말에 춘복이 눈썹이 쫑긋 일어선다. 터럭이 뻣뻣하고 쑤실쑤실하면서
칼 끝처럼 거세게 뻗친 양쪽 꼬리 부근에 마치 한 번 꼬아서 올린 것 같은 소용
돌이가 있는 눈썹이다.
"아이, 야. 춘복아, 너는 눈썹에도 가매가 있다잉? 어디 보자."
어렸을 때부터 남의 눈에 뜨이게 뚜렷한 눈썹이라, 공배네는 그 가까이 눈을 대
고 들여다보곤 했었다.
"쌍가매는 장개를 두 번 간단디, 눈썹에 있는 것은 어쩐 거잉가아?"
공배네는 그것을 염려하기도 했었다. 그 눈썹을 두고 전에 기표는 이기채에게
상당히 신중하게 말한 일이 있었다.
"춘복이 저놈, 아무리 봐도 눈썹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동안 가만히 눈여겨봤는
데 성질이나 허는 짓이 제가 본 관상에서 과히 어긋나지 않는 것 같애요."
큰살림 하며 사람 많이 부리려면 웬만한 관형찰색은 할 줄 알아야 하고, 그에
따라 미리 짐작하거나 대처해 둘 일이 있는 것인지라, 이기채도 기표의 말을 귀
담아 들었었다.
"저놈 눈썹이 칼눈썹이라. 검미, 첨도미라 허는 것이, 제 속은 따로 두고 남한
테는 드러내지 않는데다 성질이 사납고, 포악하고, 성급허고, 또 고집이 있어
놔서 제 마음에 한 번 먹은 것은, 신념이랄까, 만용이랄까, 그걸 기어이 관철하
겠다고 죄충우돌 거칠게 부딪치니, 화합은 어렵고 다툼은 많아서 결국 스스로
제 몸을 극하는 상 아닙니까. 그것만 해도 흉상인데 꽁지에 가서 선모까지 있으
니 설상가상이요. 선모미형은 성격이 일정치 않아서 변화가 많고, 특히 반골 기
질이 강한 법인즉. 겉으로는 수그려도 속에서는 반발이 치밀어 역겨운 생각에
욱성으로 무슨 엉뚱한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저놈 언동을 늘 주시
해 두십시오. 근본 없고 미천한 놈이 자칫 세상 변헌 것 믿고 날뛰면 물인지 불
인지 아무 분간도 못허고 치닫기 쉬운 법이니까요. 뺨 맞고 잘못했단 말 들으면
무엇합니까. 당헌 다음에 덕석말이 한다 해도, 한번 당해 버린 일은 물릴 수가
없는 것. 저런 넘한테 무단히 방심했다 허를 찔리지 말고 미리 단속하셔야 헐
겁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기응도 함께 있었는데, 본디 성품이 순후 질박하고 잔꾀가 없
는 그는, 자르듯이 말하는 기표와는 달리 고개를 갸웃하며 한마디 하였다.
"눈썹이 가다가 빙 돌아도 왜 나선미라고, 눈썹 끝이 달팽이 모양 도르르 말려
있는 것은 좋다고 안 그러던가요? 그런 눈썹은 복록이 면면해서 끊이들 안허고,
영웅이나 무관에 이런 눈썹이 있으면 천기를 받게 된다고 그러드마는. 그게 역
심 먹을 반골의 선몬지 천기를 얻을 영웅의 나선민지 우리야 알 수 있어야지."
"보면 알지."
"보면?"
"일언이폐지허고 그놈의 어디에 복록이 면면헌 구석이 있는가? 복 있는 놈이 그
러고 살어?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그 눈썹 가마는 달팽이가 아니라, 회오리여,
회오리. 기골 장대헌 놈이 저 날 데 가서 못 나고 울분 많은 데 가서 나 놓으먼
반골,역신 되는 것은 천하에 정헌 이치지."
기표는 그렇게 말끝을 눌렀었다. 춘복이는 그 눈썹을 찡기며 말했다.
"양반이사 아침 저녁 사시 사철 산해진미로 맛난 것만 골라 먹고 상게, 어쩌다
먹어 본 무시가 벨미였등게비지. 없어서 먹어도 맛나까?"
"있어 먹으나 없어 먹으나 내 맘 먹기에 달린 거이다잉?"
공배가 음성을 누그럽게 하며 도닥이듯 말하고, 춘복이는 대꾸 대신 와삭. 크고
두툼하게 내민 입으로 하나가 되게 무를 베어 물었다. 그 옆에서 고개를 배톨침
하게 틀고 앉아 말참견을 하려고 입술을 옴질거리던 옹구네가 춘복이를 한번 힐
끗 보더니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춘복이가 다른 곳에 눈을 두고 있는 탓이
었다. 더르르르. 문짝을 긁는 소리로 풍지가 울더니 시리게 찬 바람이 끼쳐 든
다.
"하앗따아, 바늘 구녁으로 황소바람 들온다드니. 날이 엥간히 추운게비다. 방
안에 가만 있어도 코 떨어지겄네 기양. 으그흐윽."
공복네가 소름을 털어 내며 어깨를 털자 춘복이가 웃었다.
"나주 배보다 맛난 무시 잡사서 더 안 그러요?"
"긍게 말이다. 아이고호."
공복네는 팔짱을 끼듯이 가슴을 보듬으며 어깨를 한 번 더 떨고는, 엉거주춤 허
리를 구부려 부들자리 방바닥의 온기를 더듬더듬 짚어 본다. 아까 지펴 둔 군불
기운에 아직은 그래도 방바닥이 따뜻하다. 그것은 방 가운데 놓인 질화로의 밍
근한 잿불 기척만이나 하다 할까. 그래도 이만한 온기가 있어, 삭풍이 메마른
겨울 밤의 캄캄한 허공을 회초리로 후려 치며 베폭 찢는 소리로 울 때, 비록 여
러 해를 두고 갈지 못하여 장색으로 절어든 방바닥이지만, 이 남루한 부들자리
위에 사람들은 마실 와서 둘러 앉는 것이니. 하찮은 부들잎과 그 줄기를 결어서
엮은 방자리는, 매캐한 모깃불을 피워 놓고 모여 앉아 은하수를 올려다보던 여
름밤의 멍석이나 한가지였다. 범절이 엄중하고, 격식을 갖추어 사는 양반들은,
이렇게 남녀가 섞이어 상하, 노소 오부룩이 앉아 허물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정경을 무어라 할 것인가. 상없다 할 일이었다.그들은 한식구 부부간이라 할 지
라도 남,여는 각기 사랑채와 안채에 따로 방을 정하여 기거하기 마련이었으며,
그 두 집채 사이에는 반드시 담을 치고 문을 닫았으니, 만일 그 문을 닫아 걸어
버리면 한 집안에서도 이쪽과 저쪽은 별개의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점잖
은 집안의 사랑 어른은 물론이고, 작은사랑의 젊은 주인이라 할지라도, 남이 보
거나 알게 안방으로 가서는 안되는 일이어서. 그가 안채의 부인 방에 들려고 할
때는 깊은 밤중 아무도 모르게 왔다가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사랑으로 나가
야 했다. 혹시라도 낮에 무슨 볼일이 있어 안방에 들르면 부인이 당황하여 "아
랫것들 보기 부끄럽다." 고 서둘러 내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부부사이에
도 이렇게 지낼 때, 식구 아닌 다른 사람들하고야 더 말하여 무엇 하리. 외부인
은 누구를 막론하고 안채에 출입하는 것은 엄금되었으며, 심지어는 흘낏 바라보
는 것조차도 안되어서, 그 시선이 이르는 것을 막으려고 중문간의 안채쪽 마당
에 '내외벽'이나'내외담'을 치고, 또는 늘푸른 잎사귀의 나무를 심어 '화초담'
을 만들기도 하였다.
"지랄허고 자빠졌제. 호강에 겨우면 무신 짓을 못히여? 내우법 좋아 허네. 쥐도
새도 모르게 넘 못헐 짓은 즈그들이 더 험서나. 그렇게 눈 개리고 아웅이여.
다, 들어오는 도척이 열은 막어 내도 안에서 난 도적 하나는 못 막는다는 거여.
그게 무단헌 말이겄능가잉? 아, 멀리 갈 거 머 있어? 매안에 대실 서방님허고
강실이 일만 바도 그렇제. 우숩네. 우스워. 상놈, 상놈, 허지마는 우리 같은 상
것들은 머 뽄낼 것도 슁길 것도 없어 생긴 대로 상게는 즈그 볼 ㄸ는 천허다고
허겄지만, 우리는 그래도 거짓꼴은 안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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