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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25)

카지모도 2024. 8. 3.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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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뜬 놈은 책상다리 점잖허게 개고 앉아서 발부닥 씰어 감서 공자왈 맹자왈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노래를 부름서. 글이요, 정신이요. 허능 거이여? 시방.

양반은 즈그 문짜로 글 읽어야 살고. 정신 갖춰야 살겄지마는 상놈은 상놈대

로 젓사라고 외어야 사능 것을 살자고 지르는 소리를 패대기쳐? 여그가 어딘디?

그래. 여그가 어디냐. 여그가 어디여? 사람 사는 시상이다. 사람 사는 시상에 사

램이 사람끼리 이렇게 서로 틀리게 살어야니. 이게 무신 옳은 시상이냐. 뒤집어

야제. 양반은 글 읽어서 머에다 쓰고, 그 좋은 정신은 시렁에다 뫼셔서 무신 생

각을 허능고? 상놈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암서. 왜 그렁 것을 몰라? 무단

히 공부라고 헛짓하고 있능 거이제.

춘복이는 그 이야기 속의 샌님을 새우젓 장수처럼 방죽에 처넣어 흠빡 젖은

참혹한 몰골로 허우적이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그리고

"왜 양반은 양반으로만 살어야능가는 내비두고, 어째 상놈은 한 번 상놈으로

나먼 내리내리 대물려서 상놈으로만 살어야능가. 그 이얘기 좀 해 보시오."

그 얼굴에 대고 물었다.

나는 상놈 껍데기를 벗고 싶다.

나도 사람맹이로 살고 싶다.

나는 절대로 상놈 자식은 안 날랑게.

아아. 작은아씨. 내 자식 하나 낳아 주시오.

달님. 작은아씨를 내 여자가 되게 해 주시오.

작은아씨가 부디 내 자식 하나만 낳게 해 주시오.

춘복이는 달을 향하여 뻗쳐 올린 두 팔을 모두어 내리며 그대로 바위 위에 무

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깊이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그의 조아린 이마에 막 떠오르는 달빛이 비친다.

달빛 속에 강실이가 어린다.

예부터. 희고 맑아 아리따운 얼굴을 월용이라 하고. 꽃같이 어여쁜 얼굴에 고

운 자태는 화용월태라 하여 그 모습을 달에 비기었다. 그리고 여인이 덕이 있고

어디에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절세의 미인일 때 월궁 항아라 하였다.

이는 여인이 곧 달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춘복이는 강실이의 얼굴을 제대로 본 일이 없었다.

다만 먼 발치에서 옷자락인 듯 그림자인 듯 아니면 그저 무슨 빛깔인 듯. 언

뜻 스치며 본 것이 전부였으니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대도 달

같은 그네의 모습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도렷하고 선연하였다.

아아. 작은아씨

춘복이는 터지는 한숨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 것으로 맨들리라.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의 눈앞이 누우렇게 덮치듯이 밝았다.

그 불잉걸같이 이글거리는 누우런 빛에 부딪친 순간 춘복이는 너무나 악연하

여 질린 채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것은 거대한 달이었다. 온전하게 둥그런 얼굴로 검은 파도처럼 첩첩한 산

능선을 발 아래 치맛자락같이 거느리면서 떠오른 보름달은 놀랍게 크고 너무나

가까웠다. 무엇만이나 하다고 해야 할까. 춘복이는 그렇게 큰 달을 이렇게 가까

이서 본 일이 없었다. 얼른 보면 커다란 방죽만 한 것 같지만 누우런 황금빛 용

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빛의 물살을 끝없이 뒤채는 이 달에는 어림없는 말이었

다.

보통 때 무심코 올려다보면 둥그렇게 눈 안에 들어오던 그 조그만 달이. 지금

은 그의 두 팔을 벌린 아름으로는 당치도 않게 거대하여 그것은 떠오른다기보다

는 흥건하게 무거워서 금방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달은 그의 머리 위에 뜬 것이 아니었다.

싯누렇다 못하여 화광을 받은 것처럼 붉은 주홍빛을 머금고 있는 그달은 바로

춘복이의 눈앞에 바짝 들이밀려와 있었다. 마치 놀라 바라보는 춘복이를 그대로

덮쳐 한 입에 삼켜 버릴 듯한 기세로.

가슴패기 맞닿게.

그는 숨이 질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얼른 다물지를 못하였다.

달은 거대한 빛의 아가리였다.

그 아가리의 빛이 장마진 붉덕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회오리 돌았다. 한

번 빠지면 못 나오는 늪이 용틀임으로 뒤집히는 아가리.

그것은 두렵고 무서웠다.

춘복이의 등줄기를 써늘한 소름이 훑어 내렸다.

저 달의 어디에 대고 인간의 소원을 빌어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갈피에 고인 시름과 눈물을 서럽게 위로해 주기는커녕. 아무것도 용서

하지 않고 빨아들여 빛으로 덮쳐 버릴 것 같은 그 붉누런 빛의 밀물을 칼로 도

려낸 듯 차갑게 뚜렷한 원으로 삼엄하게 가두는 달의 서슬에 몇 날 별빛마저 무

색하게 지워져 버린 겨울 밤 하늘은 속이 시린 궁청빛으로 깊어 더욱 시퍼렇다.

그 앞에 홀로 마주선 춘복이는 한 점 티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달빛에 휩쓸리면 그 심연의 수렁 속으로 말려 들어가 다시는 헤어나오

지 못할 아니면 그 물살에 떠밀려 곤두박질치며 떠내려 갈.

달은 무서운 기세로 점점 가까이 부딪칠 것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견고한 빛의 바위덩이 암벽 같기도 하였다.

아아. 차라리 저 달에 부딪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죽고 싶다.

춘복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달을 향하여 가슴을 내밀고 온몸으로 버티고 마주섰다.

달은 아까보다 숨막히게 더 가까웠다.

가까이 온 달은 다시 싯누렇게 뒤집히어 붉덕물을 일으키면서 거뭇거뭇 멍든

골짜기로 춘복이를 빨아들여 삼키려 하였다.

내가 너를 삼키리라.

어금니를 물고 주먹을 부르쥔 그의 두 다리가 후드르르 떨린다.

그는 다리를 엉버티어 굳게 딛고 단전에 힘을 모으며 달을 뚫어지게 노려보았

다. 그의 부릅뜬 눈방울에 달빛이 비쳐 번들거리고 동자 한가운데로 달이 들어

와 박힌다.

춘복이는 입을 크게 벌리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달의 싯누렇게 뒤집히며 붉덕물을 일으키는 소용돌이 달빛

을 깊이깊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목으로 빨려들어오는 달빛은 가슴을 깎으며

아프게 비집고 내려가 다시 폐장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가슴이 벌어져 쪼개질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잠시 숨을 멈추었지만. 그곳에 뼈다귀처럼 걸린 달빛을 아

랫배로 밀어내리고 다시 무서운 기세로 흡월을 하였다. 머리꼭지 정수리에서 어

깨뼈와 가슴팍. 그리고 단전과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터질 만큼 차 오르도록 달

빛을 들이켜는 춘복이의 몸은 둥그렇게 부풀어 올랐다.

내가 너를 삼키리라.

그는 드디어 달빛에 딸려 오는 달이 덩어리째 삼켜질 때가지 그렇게 사나운

짐승처럼 서서 흡월을 할 작정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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