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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28)

카지모도 2024. 8. 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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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실이가 초사흘을 넘기고 동계어른 이헌의에게 세배를 하러 갔을 때. 마침

한 무리의 집안간 동종들이 먼저 왔다 돌아가고 그의 재종 이징의만이 헌의와

사랑에 대좌하여 담소하고 있었다.

"그래 올에는 부디 몸도 충실허고 마음먹은 대로 모든 소원을 다 성취허도록

해라."

세배를 받는 이헌의는 그 앞에 다소곳이 앉는 강실이를 보고 고희를 넘긴 지

여러 해 된 노안에 실뿌리같이 드리워진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 머금은 음

성으로 덕담을 해 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붙였다.

"꼭 시집도 가고."

이 말에 강실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수그렸다.

"가만 있자. 네가 인제 올에 몇 살이더라? 무슨 생이던고?"

나이를 묻던 그는 손가락을 짚어 보고는 잠시 침묵하였다.

"농사도 때가 있고 인사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실기허면 좋은 결실을 보기가

어려운 것은 세상의 이치가 다 똑같지. 옛날 같으면 혼인의 때를 무단히 넘기는

사람은 중벌을 엄허게 다스렸느니라. 향약에도 그것은 명시돼 있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음양이 만나 우주 질서 속에 조화를 이루고 사람이 사람 된 자신의 존재

에 대해서 책임을 행해야 헐 때를 무슨 퍼치 못헐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것은 게으름뱅이 아니면 말썽꾸러기 아니겠느냐. 그런 까닭에

향약에서도 벌을 받는 게지.

그게 바로 인륜지대사 아니냐. 대사

사람이 일생 동안 살아서 허는 일 중에 제일 크고 중한 것이 바로 이일이라.

사람은 누구라도 반상. 고하를 막론하고 때가 되면 남녀에 만나 이성지합 혼인

을 해야만 그제야 비로소 유아를 벗고 성인이 되어 한 몫의 사람으로 완성되는

것인데 그것을 제때 못허고 있으면 아무리 사십 오십을 먹어도 미완성이다. 아

그래서 십여 세 유소자라도 장가들어 상투를 틀었으면 어른이고 다 늙어 꼬부라

져 머리 허얘도 미장가인 사람은 아직 아해라. 그 늙은이가 상투 튼 어린 사람

한테 어른에 대한 공례를 바치는 게야. 지금이야 어디 그러냐만.

그래서 부모는 반드시 때를 놓치기 전에 자식의 혼인을 서두르고 그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무세하여 그런 일을 추릴 만헌 사람이 못될 적에는 문중이나 마

을에서 부모 대신 그 일을 맡어 가지고 합심해서 혼사를 주선허는 것이 상례이

다. 거기서조차 한미해서 성사를 시키지 못헐 때에는 고을 관장허는 원이 나섰

지. 원은 그 고을 백성의 어버이로서 그 일을 염려허고 주선허는 게지. 그래 원

이 중매를 서서 책임지고 혼인을 시켰느니라. 그만큼 혼인이란 게 중헌 일이라

는 것 아니냐. 지금은 시절이 그전 같지 않어서 너나없이 암담 혹독헌 세월을

사노라고 언제 남 돌아볼 겨를도 없이들 이러고 지낸다마는 너 그러고 있는 것

이 네 탓이 아니라 네 부모 탓이고. 또 우리들 탓이다. 네 종조모님 살어 계셨더

라면 좀 달렀을 것인데."

그럴 생각은 아니었을 테지만 말이 청암부인에게로 번지자 그의 음성이 무겁

게 갈라졌다. 덕담 끝이 침중해진 것이다. 징의도 입을 다문채 상체를 좌우로 조

용히 미동할 뿐 말이 없었다. 강실이는 앉은 그대로 고개를 수그린 채 가슴 밑

바닥으로 밀려드는 무거움을 가까스로 가누고 있었다. 그녀의 낯빛은 창호지 같

았다.

"아이구. 인제 우리 강실이가 처녀가 다 되었구나. 시집가야겄다."

그것은 열다석 살 되던 해의 설날이었던가.

청암부인이 모반에 엿을 담아 내주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세배 온 강실이의

손을 잡았다. 강실이는 손을 잡힌 채 고개를 외로 돌리며 얼굴을 붉히었다. 그네

의 검은 머릿단 끝에는 검자주 제비부리 댕기가 곱게 물려 있고. 수줍음에 물이

든 귀와 흰 목의 언저리에는 살구꽃빛이 아련히 돌았다. 그리고 거기에 몇 오라

기의 잔머리가 애잔한데 장지에 은은히 비쳐드는 밝은 햇살을 등지고 앉은 그네

의 둥근 어깨 너머로 완자 살창은 햇빛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연분홍 치

마에 연노랑 명주 저고리를 입은 강실이는 무지개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여위고 파리해진 얼굴에 수심이 깊어 희푸른 빛이 서리고 마른 목은 머리를

지탱하기 겨워 보였다. 그리고 단정히 빗었으나 윤기 없어 까칠한 머릿단이 좁

은 등의 한가운데를 검은 고랑처럼 타고 내려가다가 시르르 멈춘 모습은 당혼한

처녀로서 한참 피어나야 할 나이라기에는 누가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너 어디 아프냐?"

오류골댁은 몇 번이나 그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묻곤 하였다. 그때마

다 강실이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가로저었다.

"안 그래도 시름시름 기운 없는 것이 이번에 할머니 돌아가시고는 더 눈에 띄

게 축이 났으니. 저 애가 점점 왜 저러는지 모르겄소."

밤이 이슥해졌을 때 오류골댁은 강실이 듣지 않는 곳에서 기응에게 낮은 소리

로 말하였다.

"저를 좀 귀애허셨던가. 그립고 슬픈 마음에 그러겄지."

"허기는."

건넌방에서 내외가 근십스럽게 주고받는 말이 어느 때는 무망간에 커져서 오

밤중에도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강실이의 귀에까지 들리는 날도 있었다. 안

채와 사람을 따로 둘 수 없는 형편이어서 보자기만 한 대청 한 칸을 사이에 둔

건넌방을 기응이 거처하는 사랑으로 쓰고 있는 오류골댁인지라. 안방에서는 모

녀 함께 잠들지만 가끔 무슨 의논할 일이 있을 때면 오류골댁이

"먼저 자거라."

강실이한테 이르고는 건넌방으로 가서 밤이 깊어지도록 양주가 두런두런 이야

기를 하곤 하였다.

"집안이 흥헐하면 가장이 실해야 허고 가문이 흥헐라면 큰집이 잘 돼야 헐 것

인데. 청암 백모님 저렇게 하루아침에 별세를 하시고 율촌 형님 강단은 놋쇠 같

지만 상중에 근력이 도무지 전 같지 않으신데다. 강모란 놈 불효자식으로 일자

소식을 돈절헌 채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허고 사는지 풍편에도 연락이 없으니 도

대체 울 없는 한 데 같어서 어디. 큰집이 이렇게 수수롭고 산란헌데 누구한테

강실이 혼인말 의논해 보기도 난처허고 내가 무슨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것

을 어서 여워야 나도 한 시름을 놓겄구마는."

"아따 전에는 내가 그렇게 강실이 혼사 근심을 해도 태평이시드니."

"이리 늦을 줄을 누가 알었는고?"

"그러니 미리 때 늦기 전에 서둘러야지. 남의 논에는 나락 패는데 그제서야 모

내기 헌다고 놉 얻으러 다니는 꼴 안되었소 그래."

"속 터지는 데다 불 붙이는가."

"부모 속이 이럴 때 제 속이라고 온전허겄소? 내놓고 말도 못허고 저것이 자

꾸 저렇게 패로와지는 것도 다 그런 속이겄지요."

"이노무 인연이 어디 가서 있는가. 없든 안헐 것이고."

오류골댁이 답답한 심정으로 길게 내뱉는 한숨 소리가 어두운 밤의 중치에 얹

히고 그 짓누르는 한숨에 대고 기응이 부싯돌 치는 소리가 따악. 들려왔다. 이윽

고 마른 쑥 부싯깃에 옮겨 붙는 불티에서 연기가 매캐하게 일어나듯 오밤중에도

잠 못 이루고 있는 강실이의 숨죽인 폐장에 미어지는 연기가 자욱이 차 올랐다.

그 암연하고 매운 기운에 그네는 기침을 토하듯 참지 못하고 하염없는 눈물을

토하였다. 그눈물은 몸의 마지막 진기를 다하며 배앝는 무슨 진액 같기도 하였

다.

눈물은 방안에 가득 밀려와 고인 어둠을 무겁게 흡수하고 있는 베갯머리에 소

리없이 어리면서 검은 아교로 엉기었다. 그 엉긴 눈물은 방안을 아까보다 더욱

무겁게 하면서 검은 웅덩이를 이루고 웅덩이를 이루고 웅덩이는 어리고 엉겨드

는 눈물을 빨아들이면서 밑 모르는 늪의 밑바닥으로 강실이를 잡아당기는 것이

었다.

질기고 깊어라.

강실이는 손가락 하나 들어올리지 못하게 누르는 어둠과 귀신의 손아귀처럼

잡고 놓아 주지 않는 늪의 캄캄한 끈끈이에 잡히어 삼키는 울음으로 부르짖었

다.

오라버니 나를 놓아 주시오.

아아 나를 제발 놓아 주시오.

차라리 내가 죽어 나를 놓으리이까.

그 눈물. 그 어둠. 그 늪의 이름은 강모였던 것이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오류골댁은 속 모르게 여위면서 시름시름 겨우 제 몸을 추

스리는 딸의 행색을 애가 마르게 안타까워만 하고 있었다. 옹색한 살림에도 손

끝이 야물고 음전 규모 있는 오류골댁은 좋은 나이를 놓치면서 고운 때가 가시

는 딸의 모습에 어미 못난 것을 탄하며 지난 섣달 세안에도 마을로 들어온 방물

장수한테서 반달로 사람 옆모습을 그린 상표의 '가오루'화장 비누 한 곽을 사 반

닫이에 소중하게 넣어 두었다. 강실이의 혼수였다.

없는 형편에 명주 비단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강실이 나이가 열다섯을

넘기면서부터는 금방이라도 어디서 낭재가 나타나 혼사를 치르게 될 것만 같아.

알게 모르게 한 가지 한가지씩 힘 닿는 대로 마련해 온 혼수는 치마.저고리.두루

마기 옷감에 다홍.초록 이불감. 그리고 오밀조밀한 살림 세간이며 반짇고리와 화

장품들이었으나, 그것들은 해가 가고 바뀌어도 여전히 반닫이 속에 쌓이기만 할

뿐 아직도 쓰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게 언제 나간다냐. 이것들도 갑갑허겄다. 어디 바람이나 한 번 쐬어 주자.

무엇이 얼마나 들었는지 구경도 좀 허고."

하루는 오류골댁이 강실이를 부르며 반닫이를 열었다. 청.홍에 노랑. 연두. 분

홍 감들을 차례차례 꺼내 활짝 펼쳤다가 다시 접으면서 거풍을 시키던 그네는

색동 보자기에 싸 놓은 화장품을 풀어 보며 문득 미소를 머금었다.

"이쁘지?"

이번에는 강실이도 고개를 끄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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