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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14)

카지모도 2024. 9. 25.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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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채리시오, 작은아씨."

강실이는 제 이마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받으며, 이미 혼백이 되어버린 사람인

양 무게도 부피도 감각도 없이, 다만 모든 것이 멀고 멀어 아득할 뿐인 세상으

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액막이 연이 가물가물 연실을 달고 저 머나먼 밤하

늘의 복판으로 허이옇게 날아 올라가듯이. 아아, 나 좀 잡아 주어. 자신의 몸이

지상에서 둥실 떠오르며 저승의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그네는 역력히 느

끼었다. 그것은 아찔한 현기증이면서, 두렵고 무서운 허기였다. 어머니, 나 좀 잡

아 주어요. 실을 놓친 지상의 어느 손 하나가 허우적이듯 연실 끄트머리 흰 자

락을 잡아 보려 하는 것 같다가 그대로 아물아물, 액막이 연 강실이는 날아가고

있었다. 그 실을 놓친 손은 어머니인가, 아니면 제 육신인가. 아아, 누가 나 좀

잡아 주어요. 그러나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다만 푸른 보라로 죽어

가는 입술에 스치다 잦아드는, 형체 없는 의식의 연기 같은 것일 뿐.

"작은아씨. 저 춘복입니다요. 정신채리시오. 예?"

춘복이는 오직 그 말만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이 무슨 믿지 못할 정황인가, 너

무나 한순간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져, 놀라고도, 어이가 없고도, 또 당황이

되면서, 그 모든 감정을 휩쓸어 덮고도 남는 감격이 치받쳐 춘복이는 아예 강실

이를 부둥켜 안고, 그 얼어서 식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꺼 울기 시작하

였다. 가련한 작은아씨. 왜 그랬는지 춘복이는 그말을 속으로 삼키며, 다만 느껍

게 울고 울었다. 얼음이 다 되어 버린 강실이의 얼굴이며 팔과 다리는 형체의

껍게기처럼 달빛 속에 허옇게 구겨져 있는데. 비록 이미 기진하여 맥을 놓아 버

린 얼음덩이, 그보다는 얼음 그림자. 박빙같은 몸이었지만, 그 실체를 엉겁결에

보듬어 안은 춘복이는, 지금까지 고누고 있던 모든 힘이 일시에 풀리면서 이상

하게도 설움이 북받쳐 뜨거운 눈물을 쏟고 있으니. 기회를 잡기만 하면 솔개가

병아리를 채듯이 후려챌 기세로, 아니면 어떻게든 틈을 노려 겁간이라도 할 기

세로 여기까지 내달아온 그에게, 이것은 정말 너무나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아아, 어쩌야 쓰꼬. 춘복이는 강실이의 차가운 가슴에 이마를 박고 그렇게

울고만 있었다. 만일에 강실이가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린다면 어찌하여, 만일

이대로 목숨까지 놓아 버린다면 또 어찌하랴. 이미 그네는 여리고 느린 심장만

이 톡, 탁, 톡, 탁, 미세하게 뛰고 있었다. 춘복이가 조금만 더 늦게 와서 미처 손

쓸 겨를도 없이, 그네가 이 찬 땅바닥에 몸을 부린 채 쓰러져 있었더라면, 아차

하는 일이 생길는지도 모를 만큼 그네는 위급해 보였다. 한편 당황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이대로 업고 가 버릴가 싶은 욕심이 뒤엉키는 춘복이는, 우선 강실

이를 후미진 곳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펀뜻 들었다. 이대로 있다가 달

맞이 나갔던 이응이나 오류골댁이 돌아오게 되면 모든 것은 낭패다 싶었던 것이

다. 어찌 되었든 강실이를 제 품에 보듬고 있는 이 순간을 어이없이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결코. 절대로. 이것이 어떻게 끌어안은 기회이

냐. 참으로 일월성신이 돕거나 귀신이 돕지 않고서야. 춘복이는 하늘의 저 달이,

매안 선산의 신명들이, 모두 자신을 위하여 이처럼 공교롭고도 절묘하게 일을

맞추어 준 것만 같이 여겨졌다. 작은아씨. 가십시다. 나랑 같이 가십시다. 어디로

든. 춘복이는 강실이를 불끈 안아 올렸다. 강실이는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희푸

른 달빛 아래 흰옷 입은 강실이를 둘러메고, 발소리고 내지 않고 그림자도 안

남긴 채 재빠르게 몸을 옯긴 춘복이는, 쫓기듯 황급히 오류골댁 뒤꼍 토담을 돌

아 대밭 쪽으로 갔다. 이 엄동에도 잎사귀 무성하게 검푸른 대밭은 하늘을 가리

워 달빛마저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늘푸르다 하여도 나무는 나무인지라 낙엽이

있기 마련이어서, 지난 가을 내내 떨어진 댓잎이 마른 잎으로 푹석하여 맨땅의

냉기를 걷어 주고 또 바람까지도 들어찬 대나무 줄기들이 막아주니, 몸을 숨기

기에도, 한기를 덜기에도 이곳은 마침 좋았다. 아까 스스로 기운을 놓을 때는,

무엇인가 아득히 까마득히 몸 속에서 한 가닥 혼백 같은 것이 실 끊어진 연처럼

빠져 나가는 것을 역력히 느끼었는데, 그 끊어진 실 끄터머리를 간절히 붙들고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강실이는 아슴프레 눈을 떴다.

"작은 아씨."

이것이 누구일까. 혼미한 중에도 정신을 가다듬어 모아 보려 하였으나, 그네는

다만, 웬 낯선 이의 품에 제 몸이 안기어 있는 것만 남의 일처럼 감지될 뿐, 손

가락 마디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이 허깨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요. 그네는 속으로

만 그렇게 가까스로 물었다. 그리고는 나 좀 잡아 주어요. 아아, 나 좀 잡아 주

어요. 저만큼 빠져 나간 혼백의 가느다란 실끝을 잡으려고 간신히 뻗어 보는 그

네의 손을, 투박하고 뜨거운 손이 덤뻑 쥐어 잡는다.

"가련허신 작은아씨."

목쉰 음성이 귀곁에 젖는다. 이 사람이 누구던가.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더 생각하기도 겨운 강실이는 정신이 혼미해지며 그 대답을 못 좇는데 제 손을

쥐고 있는 손의 온기가 따뜻하여, 손에 눈물이 돌았다.

"작은아씨. 저요. 춘복이요."

아아, 춘복이. 그 거멍굴 놈. 큰집에 늘 일하러 오던.

"작은아씨. 정신채리시오."

춘복이가 강실이 가슴에 억센 대가리를 묻고 운다. 그 눈물의 더운 기운이 성에

어린 저고리 시린 앞섶을 녹이며 가슴 살까지 그며든다. 그런데 왜 울고 있으까.

이 사람은. 가물가물 한 가닥 실마리를 잡으려고 강실이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

는데, 춘복이는 울음을 쏟고 있다.

"작은아씨. 지 자식 하나 낳아 주시오."

놓쳐 버린 정신이 희미하게 멀리서나마 드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일까, 모르고 하

는 말일까. 춘복이는 주문처럼 그 말을 중얼중얼 수도 없이 뇌었다. 그러면서 강

실이의 언 발과 언 손과 언 뺨을 제 두 손으로 감싸서 녹이다가, 부비다가, 다시

또 감싸다가, 문지르다가,

"작은아씨, 지 자식 하나만 낳아 주시오, 소원입니다."

빌었다. 그것은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절실함, 신불앞에서 소원을 비는 절실함

을 너무나 간곡하고 엄숙하게 담고 있어서, 해괴하게 들리지 않고 오히려 애절

하게 들렸다. 어찌 그리 그 일이 소원이시오. 강실이는 그토록 눈물이 나게 빌고

빌며 자기의 발과 손과 얼굴과 온 몸을 더운 손으로 부비는 춘복이를, 검은 대

그림자 속에서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속으로 물었다.

"아들 낳아지이다."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여인들이 주먹만한 돌을, 부처바우라고

불리던 꼭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에 종잇장이 되도록 갈고 갈며 빌던 그 모습

이, 강실이 뇌리에 스치어 지나갔다. 그것은 노적봉의 호성암에서 몇발짝 안 떨

어진 산 비탈에 천연으로 박힌 바위였다. 그 바위를 갈던 여인은 눈을 감고 오

직 경건 절박하게 빌었었다. 춘복이는 마치 강실이 몸이 아닌 부처바우를 보듬

고 부비는 것 같았다.

"작은아씨. 이 불쌍헌 놈 소원 좀 한 번만 들어주시오."

몸에 온기가 돌아오는 강실이를 조심스럽게 부둥켜 안으며 춘복이는 말했다. 그

음성에도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어찌 나를 그렇게 소원하시오? 나도 그처

럼 소원하던 이가 있었소?. 그 소원이 내 평생에는 다시 이루어지지 않으리다만.

강실이 눈귀에서 시름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춘복이는 그 눈물에 제

뺨을 대고, 울컥울컥 눈물을 토해 냈다. 그래. 그리움을 버리자. 평생에 다시 못

올 그리움, 부질없는 이 그리움을 버리고, 오라버니를 놓아 드리자. 내가 이대도

록 애오라지 오라버니 그리워하고 있으면 끝내는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되리라.

허나 어이하면 이 그리움 버릴 수가 있으리. 나는 정녕 아무런 방도를 모르니,

오직 자격을 잃어버리자. 자격을 잃으면 이제 다시는 기다리지 않겠지. 기다릴

수 없겠지. 강실이는 언제인가. 차라리 내가 죽어 나를 놓으리이까. 베갯머리 흥

건히 젖도록 울던 날을 돌이키며, 다시금 시름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였

다. 얼어붙은 몸이 녹으니 눈물로 흐르는 것일까. 강실이는 춘복이에게 창백한

몸을 맡긴 채 하염없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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