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서는 곡식 넣은 단지를 문종이로 봉하여 왼새끼로 둘러 묶고, 그 위에
널빤지를 얹어 놓았다. 오류골댁 웃목에도 수천댁 웃목에도, 또 누구네 웃목에도
집집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조상단지는 앉아 있었다. 또 어떤 집에서는 안방
의 시렁 위에 올려 모시기도 하였다. 무심히 보던 그 단지를 그때부터 눈여기며,
단지 속에 앉으신 조상님의 모습을 혼자 상상해 보는 강실이에게, 오류골댁은
"오늘은 떡을 했으니 조상신한테 드리자."
하며, 조신하게 두손으로 떡 접시를 받들어 단지 위에 덮인 널빤지에 놓았다. 그
것이 조상신의 밥상인가 보았다. 식혜를 하여도, 찰밥을 쪄도, 아니면 그 무슨
조그만 별미만 하여도 오류골댁은 그렇게 올리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서 무엇 무엇을 조금 하였삽는데, 맛을 먼저 보옵소서."
하고 나직이 고하였다. 그리고 행여라도 그 단지를 다칠까 보아 방을 훔칠 때나
들고날 때 치맛자락을 모두고 발걸음을 조심하였다.
"그저 집안이 무사 태평하게 해 주옵시고, 금년 농사 풍년 들어 함포 고복 화락
만당하게 해 주옵소사."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이면 오류골댁은 으레 정화수 한 사발에 밥과 떡, 삼색나
물을 제물로 차려 그 앞에 올리며 빌었다.
"술이나 고기는 쓰는 것 아니다."
오류골댁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철이 되어 새 곡식을 갈아넣게 되면, 조상단
지에서 비워 낸 묵은 곡식으로는 밥을 지어 자기 식구끼리만 갈라 먹었다.
"이 밥은 남 주면 안되는 것이다. 꼭 제 식구만 먹어야지. 남한테 주면 그 준 만
큼 복이 달아난단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밥만큼은, 한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한테도 안 주는 거야."
이 외에도 장독 위에 청수 담은 물그릇을 올려 놓은 칠성신, 뱀이나 구렁이, 두
꺼비, 족제비들을 '업'으로 모시어 집안의 재운을 비는 일이며, 집안 곳곳 처처마
다 계시는 온갖 가신들을 공손히 모시고 위해 드리는 것이 가모 부녀의 귀중한
소임이라고, 오류골댁은 항상 강실이에게 일렀다.
"한 집안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남자의 국량과 양명 여부에도 달렸지마는, 그러
한 것조차도 다 안에서 살림 맡은 안주인이 이 모든 가신들을 정성으로 섬기고
잘 받들 때, 후손도 복을 받고 가세도 창성하여 집안이 크게 일어나는 법이다.
어느 고을 누구네, 하면 다 알 만한 집안에는 반드시 이런 가모, 부녀가 있느니
라. 너도 인제 남의 식구 되어 갈 사람이고, 그 집안으로 들어가면 네 할 일이
이것이니 명심해 두어. 큰집에 청암 할머님 일거수 일투족 거동을 하나도 놓치
지 말고 늘 눈여기어 속에다 새겨 두고. 우리 문중 이씨 집안, 그저 공 없이 내
려온 집안 아니다. 누대의 할아버님들 학덕에 힘쓰실 때, 누대의 할머님들은 온
집안 구석구석 한 곳도 빈틈없이 가신을 섬기고 모시면서, 성주님에 빌고, 대문
신, 외양신, 뒷간신에 빌었으니, 그래서 우여곡절 다 겪으면서도 이 집안 이 가
문이, 그 정성 공덕으로 이만큼 내려온 것이다. 집안에 훈김 나고 냉기 도는 것
은 다 여자 할 탓이란다. 무엇보다 여자의 마음속에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
고 이 우주 만물 삼라 만상에 대한 공경심이 있어야 하고. 경박하고 교만한 것
이상으로 큰 여자의 흉이 없니라. 솜씨 없는 것은 때로 순박하게도 보이지만 고
쳐 보이지만 고쳐 보지 못할 것은 그 두 가지니. 살림 까불어 먹고 식구 흩어지
게 하며, 남에게 척을 지어 적을 삼고 화를 입는 집안에는, 꼭 이런 여자가 틀어
앉어 있는 법. 경계, 명심해야지."
오류골댁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강실이에게 몇 번이고 그토록 일렀다. 집안에
못된 잡귀 범하지 말라고, 기응이 잘라 온 엄나무 가지를 가시에 질리면서도 낯
빛 하나 찡그리지 않고 방문 위에 걸 때나, 외양간의 암소가 새끼를 낳으려 하
면 그 앞에 불을 밝히고 백설기를 해다 바치며 빌던 때도, 오류골댁은 엄숙 정
중하게 두 손을 비비었다. 그러나 강실이는 아직 그 오류골댁을 닮지 못하였다.
그네는 아직 가모가 되지 못한 까닭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
할머니, 그리고 그 윗대 현조할머니와 그보다 더 윗대의 할머니들이 어느 성씨
어느 가문에서 아리땁게 자라나, 이곳 이씨 매안 문중 지붕 아래 꽃씨들처럼 날
아와서, 곱게 자리 잡고 뿌리 내리어 떡잎 나고, 줄기 나고, 잎사귀도 무성하게
우거져, 혹은 한 떨기 수국도 되고, 혹은 한 포기 모란도 되고, 혹은 풀꽃, 혹은
느티나무,정자나무도 되고, 아니면 청청한 대나무 푸른 서슬 곧은 나무도 되면서
여기까지 오시어 강실이도 생기었건만. 강실이는 그 거대한 숲과 꽃밭의 한쪽
귀퉁이에서 삭은 채로 얼어붙은 제 그림자처럼, 한자리에 그렇게 서 있기만 하
는 것이다. 그네의 허전한 가슴에 문득 베갯모 하나가 홀연 떠올랐다. 그것도 아
마 아홉 살 때였을 것이다. 수천댁과 주당각시 이야기하며, 오류골댁이 강실이를
보고 처음으로 제 저고리를 지어 보았노라고, 바느질 이야기를 하던 무렵이었을
터이니.
"강실이가 베갯모에 수를 놓았는데요."
오류골댁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베갯모?"
"헝겊을 달라길래,어디 그럼 여기다가 베갯모 수나 한 번 놔 봐라, 그러고는 마
침 비단 자투리 요만한 것이 있어서 내줬지요."
그래. 그것은 청,홍의 손바닥만한 비단 조각 두 장이었다. 참 곱기도 했었지. 손
바닥에 닿는 감촉은 어린 손보다 더 보드랍고도 톡톡하였다. 이비단에 수를 놓
아 베개를 만들어 보자. 강실이는 혼자서 궁리를 하다가, 집안 뒤안이며 마을 언
저리에 바람소리 새파랗게 솟구치는 대나무를 수놓아 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리고는 묵지를 대어 무늬를 꼼꼼이 그린 뒤에, 수를 놓기 시작하였다. 날렵하게
뻗은 봉황새 혓바닥 같은 댓이파리와 곧은 줄기, 강건한 마디. 옆에다 동무나무
세워서 이 가지와 저 가지가 다정하게 어우러지도록 이파리를 놓아 나가고, 마
디를 푸르게 뻗쳐 올리었다가 동그랗게 고부리어, 강실이는 올 하나 트지 않은
수를 놓았다. 콧등에 땀이 송송 맺히도록 공을 들여 놓은 수를 며칠 걸려 다 마
치고 나서, 강실이는 수줍고 자랑스럽게 오류골댁 앞에다 그것을 내 밀었다. 푸
른 비단 붉은 비단의 네모난 조각이 영롱한 광채로 빛나는데, 어린 손으로 수놓
은 대나무는 금방이라도 바람 소리를 일으킬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든
오류골댁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었다.
"?"
"아이, 장하다."
고 칭찬 받을 줄 알았던 강실이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대나무가 아니라 난초로구나. 난초 같은 대나무야."
강실이는 의아하여 어머니를 한 번 보고, 제가 놓은 수를 들여다보고, 무슨 말인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안하여 얼굴이 발그레 물들고 말았다.
"강실아. 아가, 대나무는 이렇게 쪽 곧아서 쭉 뻗친 것 아니냐. 밑둥부터 나무 꼭
대기 끝까지 구부러지거나 옆가지 안 나는 것이 대나무란다. 일편 단심, 한 줄기
로, 외로 서서 하늘을 창대같이 찌르는 것이 대나무지. 네 대나무는 잘 트다가
그만 끄터머리가 요렇게 낭창낭창 모두 난초잎같이 휘어져서 꼬부라졌지 않으
냐. 참 아깝네. 수는 아주 잘 왔그마는, 이렇게 휘늘어져 꼬부라진 대나무는 없
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머니 오류골댁은
"난초 대."
라고 그것을 이름붙여 주었다. 수천댁한테 그 이애기를 하며 강실이를 가운데
놓고 동서간에 서로 웃었던 일이, 왜 이 순간에 그다지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
일까.
"왜애, 시누대 같은 것들은 바람이 불면 공중에서 쏴아 휘어지기도 허지. 아마
이 애가 그걸 본 모양이로구만 그래."
"'그랬냐?"
수천댁과 엄니의 말에 강실이는 고개를 수그리고만 있었다. 그네의 연한 목덜미
와 귀밑까지도 어느새 발갛게 부끄러운 물이 들었다.
"바람에 쏠려도 대는 대라. 요렇게는 안 휘어질 것이다만. 머 처음 놓는 수 다
그렇지. 에이 잘 왔다. 이쁘게 잘했어. 갔다가 반닫이에 넣어 둬라. 그러고 이 담
에 시집갈 때 갖고 가그라. 나중에라도 두고두고 웃게. 느그 딸내미 너만해지거
든 보여 주면 더 재미있고."
수천댁은 청,홍 비단 헝겊 조각을 강실이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리
고 그것은 정말, 처음 놓은 수이기도 해서 그랬겠지만, 어쩐 일인지 반닫이 속
깊숙이 간직된 채, 이 세월에 이르도록 휘어져 꼬부라진 줄기를 제대로 뻗지 못
하고 있었다. 그것이 생각난 강실이는 문득, 그 대나무가 자신인 것만 같아진다.
대나무는 과연 몇 년을 사는 것일까. 그때 그 쓰지도 못할 베갯모에 수놓은 대
나무가 만일 산 것이었다면, 지금 오늘까지 살아 있을까, 혹은 죽었을까. 창을
깎아 만들게 꼿꼿한 줄기에 견고한 마디로 몸을 세우며, 껍질은 벗기어 대소쿠
리 채반에다 조리를 만들고, 속은 텅 비워 바람을 불어 넣느면 악기로 변하는
이 대가, 창공으로 기개를 뻗치는 대신 땅으로 머리를 쏟는 버들처럼 거꾸로 휘
어져, 아직도 죽지 않고 살고 있을까. 대나무는 꽃이 피면 죽는다고 하였다. 대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은 변고였다. 이 세상의 모든 씨앗과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자 수액을 빨아 올리고 햇빛을 빨아들여, 온 생명을 다 한 정점에서 꽃으로 휘
황하게 터지건만. 대나무는 영락없이 누렇게 죽고 만다. 그 피어서는 안되는 대
나무꽃은 어쩌면 강모였는지도 모른다. 죽은 강수의 망혼을 위한 사혼이 있던
날 밤의 괭괭거리는 징소리와, 뭉글뭉글 담을 넘어 오던 만수향내 아득하고 자
욱한 물맴이 회오리 소게, 무녀져 거꾸러지며, 민들망초 비노리 여뀌꽃 등밑에서
부러지던, 아아, 강모의 이름이 칼날처럼 몸의 한가운데로 궤뚫고 지나가던 그
순간이 어쩌면 대나무꽃 황사 빛깔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나무는 누렇게 말라서 형체만 서 있고, 속은 줄어 허깨비만 허울같이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실이는 휘청 어지러웠다. 그대로 삭은 재가 무너지듯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몸을 가까스로 사립문에 기댄 그네는, 이미 다리와 온몸이 마비
되어 걸음을 떼어 놓기도 어려웠다. 다리에 스르르 힘이 빠지며 마치 무슨 연기
나 안개같이 그 다리가 그러져 없어져 버릴 것만도 같았다. 아아.
"작은 아씨."
사립문을 잡고서도 주루르 미끄러지며 맥을 놓고 그 자리에 주어앉듯 쓰러지는
강실이한테로, 담 밑에 숨어 숨죽이고 서 있던 춘복이가 무망간에 튀어나와 와
락, 달려들었다. 그것은 난폭한 몸짓이 아니라 놀란 것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그
는 쓰러진 강실이를 일으켜 앉혔다. 그네의 여리고 마른 어깨를 잡아 일으키는
그의 손이 와들와들 떨리었다.
"작은 아씨. 정신차리시오."
강실이는 춘복이보다 더 놀랐을 것이언만, 몸에 힘이 없고 입술이 얼어 있어, 무
슨 말을 하려 해도, 그의 몸을 밀쳐내려 해도, 마치 쥐가 난것처럼 옴짝을 할 수
가 없었다. 그네는 너무나 오랫동안 혹한의 달빛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작은 아씨."
춘복이는 거의 울부짖는 소리로 강실이를 불렀다. 그 소리는 오직 저 한테나 들
릴 뿐 밖으로는 되어 나오지 못한 뜨겁고 서러운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춘복이
의 눈에서 이상하게 눈물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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