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그렁갑다, 그렇구나, 허먼 그렁 거이여."
"그러먼 시방 있는 우리 아배는 또 누구여?"
봉출이는 정쇠를 떠올리며 머뭇머뭇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 아배도 아배제잉."
우례는 한숨을 쉬며 탄식같이 대답하였다. 왜 이렇게 나는 몰르겄으까아. 어미
우례는 봉출이가 아부님과 너무나 똑같이 닮아서 하늘 아래 누구라도 한 번 보
면 두 말을 더 못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막상 봉출이는 그 아부님을 똑바로 뵈
온 일이 없어서, 그리고 제 얼굴도 본 일이 없어서,
"누가 부자지간 아니라께미 원 저렇게도 판백이로 같으까잉."
하는 옹구네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느님이, 이렁 걸 보먼 꼭 지신단 말이여. 하늘이 무심치 않으싱게로 설웁고
속 아픈 꽃니어매, 불쌍허고 가련헌 우례 신세, 사람 보고는 어따 대고 말도 못
허는 처지를 하늘이 어찌 그리 굽어 살펴, 내가 대신 말해주마, 그러고는 일부러
그럴래도 그러기는 에럽게 탁이잖에? 수천샌님허고."
"참말로 어쩔 때는 혼자 앉었다가도 사참허그만요. 철모를 때 당헌 일이지만, 자
가 얼굴조차 그 어른을 안 태았드라먼 억울헌 내 속은 얼매나 씨리고 애리이까.
칼로 싹 비어낸 가심에다 소곰 뿌링 거맹이로, 나야 기왕으 씨종의 자식으로 났
이니 종이 되야 마땅허지만, 내 자식, 양반이 분명헌 내 자식 아부지를 내가 왜
못 찾어 주능고. 아니요, 아부지 찾겄다는 욕심도 없어라우, 그저 성씨만. 추가가
아니고 이씨가 분명헌 성씨만 찾아 주먼 나는 에미 노릇 다헌 거이여요. 내가
더 멋을 어뜨케 히여. 불쌍허고 천헌 몸에 누가 나도 날 자식이지만, 그래도 그
자식의 피 반절은 양반이고, 성씨야 본래 아부지 따르능것 아니요. 당연히 그렁
것 아니냐고요. 그러먼 야는 이씨요. 야 좀 뵈겨. 이거이 누구 얼굴잉가."
우례는 봉출이 쪽으로 한 무릎 다가앉으며 그 등허리에 손을 얹었다.
"아 그렁게 하느님이 지시다잖여, 내가. 사람은 감출라고 해도 하늘이 안 감추는
일이 이런 일이여. 그런디 하느님은 지시다가도 안 지싱가아."
옹구네는 봉출이한테서 시선을 거두며 혼자말같이 중얼거렸다.
"무신 말이당가요?"
"요렇게 옮도 뛰도 못허게 드러난 일도 모르는 척 시치미 띠고, 아닝 것맹이로
나는 상관없다아 허능 거이 양반잉게로, 암도 안 보는 캉캄헌디서 너만 알고 나
만 아는 일 해 놓고는, 절대로 표 안 낸는 거이 또 양반일 거이여. 그런디 그게
또 맘대로 안 되능게비여. 대실서방남허고 오루꿀 작은아씨 이애기가 내 귀에끄
장 들온 것을 보먼."
"그렁게 넘들은 시방 벌쎄 다들 안다 그 말잉교?"
"파다허드랑게 그러네이."
옹구네 입술에 미끄러운 기름이 돈다.
"둔덱이에 거멍굴에, 고리배미에, 오수,임실서도 아는 사람은 다 알걸, 아매? 내
가 오직허먼 요러고 와서 귓속말을 해 주겄능가. 온 천지에 소문이 나고 뒤꼭지
에다 손구락질을 해도, 등잔밑이 어둡다고 매안에 이씨 문중서만 몰르고 있을
수도 있고. 매안서도 암암리 속새로는 수군수군 험서나 차마 본인 당사자 집안
으다가는 말 못허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렁게, 야야, 봉출아, 너 콩심이한테 오늘
들은 이얘기 살째기 해 주어라, 잉? 가마안히 눈치바갖꼬 히여. 매급시 외장치지
말고. 오수 가디끼 우둑박구로 뎀비기만 허먼 되는 일이 아니다이? 내가 대실
아씨 뵈옵기 민망해서 안 그러냐. 알고 당허능 것허고 모리고 당허능거이 달르
그더엉. 내가라도 가서 말씸 디리고 자와도 어서리가 없잖냐. 에러와서 어디 면
대허고 이런 말 허겄다고? 방자허다고 싸두고 맞을랑가도 모리고. 내가 나이할
라 더 먹은 상것이 머라고 머리고 허먼, 아씨 맴이 얼매나 더 상허시겄냐이? 그
렁게 내가 그러드라고는 말고 니가 콩심이한테 찔러 주어. 애들이 말허기가 쉽
제. 콩심이는 조전빙게 더더구나. 이런 일은 어른이 나서먼 일만 커지제. 넘의
눈에 뜨이고, 그렁게 우례도 말 못히여."
"아이고오, 큰일나겄네요. 어른 못허는 일을 어뜨케 애들이 헌당가요? 아그들은
그저 재통이나 저질르고 댕기제 무신 씰닥쟁이가 있간디 봉출이한테 그런 말은
허라고. 봉출아, 너 행이라고 그런 소리 입에 담지 마라이, 잉? 들었다 소리도
말어어. 누가 알고 묻드래도."
시킬 일이 따로 있제. 펄쩍이나 뛰며 사색이 되는 우례를 옹구네는 헤아리듯 바
라보다가
"그렇기도 허겄네."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우례의 소맷자락을 은근히 이끌어 할 말이
있다는 표시를 하였다. 남의 말을 면전에서 새되게 막은 끝이라 우례는 무안한
마음도 있어 엉거주춤 옹구네를 따라 일어섰다. 이미 먹장 같은 어둠에 쓸리는
바깥, 두 기둥을 거인의 다리같이 버티고 선 솟을대문의 문간에서 옹구네는 팔
짱을 긴 채로 사방을 한범 휘이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례도 그런 생각 안해 보든 안했을 거이그만. 봉출이 말이여."
"무신 생각이요?"
"시상이 꼭 그렇게 억울헌 것만은 아닝게 우례도 인자, 이런 날이 있구나, 싶은
때가 올 거이네. 나는 태생이 상것이라 대갓집 큰살림은 못허지만 벨라 미련허
든 안해. 머 몇 가지 짚어 보먼 틀리든 않고. 그런디, 봉출이가 앞으로는 갠찮을
거이네. 시방은 추가 달고 종노릇 허지마는 아 누구 씨여, 자가? 수천샌님도 알
고 있제. 그런디 그 집이 시방 어뜨케 되야 있능가이? 새터서방님이 외아들 독
잔디 대실서방님이랑 같이 만주로 가서 안 오시잖여? 그게 벌세 언제 쩍 이야기
여? 그러먼 그 냥반들이 언제찜이나 오실 것 같응가. 춘삼월 새봄이 와서 강남
갔든 제비가 돌아오먼 그 제비 따러 오실 것 같응가? 안 오네. 그리 수월케 오
든 못히여. 그러먼 수천샌님은 심젱이 어쩌시것능가이? 아들이 그 하나배낀디.
지달르다 지달르다 다른 아들 찾게 되제. 없다먼 몰라도 있잉게로. 바로 코밑이
가. 등 따시고 베불를 때는 콩밥이냐 퐅밥이냐, 참나무 땠냐 솔나무 땠냐 말이
많지마는, 춥고 배고푸먼, 얼어 죽어도 젓불은 안 쬔다는 양반들도 체신보담 손
이 몬야 나가서 그 불을 쬐는 거이고, 사흘 굶어 넘으 집 담장 안 넘는 장사 없
다고 않등게비. 아숩고 다급허먼 태평헐 때허고는 사램이 틀려징게. 그거이 사램
이여. 양반이라고 사람 아니간디? 수천샌님이 말허자먼 자식을 굶게 되얐다 그
말이여, 내 말은."
옹구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번들 빛났다. 우례는 금방 안으로 들어갈 사람
같은 자세로 서 있는데, 그것은 누구 다른 사람과 마주첬을 때 얼른 이 자리를
뜨려고 하는 은연중의 시늉이었다. 그네는 옹구네한테 홀려들면서도 오싹하게
겁이 났던 것이다.
"아 왜 대문간으가 서 갖꼬. 딴 디도 있을 틴디."
우례는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삼키며 좌우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집안 쪽은
하루 일을 마친 뒷개(설거지)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창호지 장지문마다 등불
빛 배어 나오고, 고샅 족으로는 그보다 더 검은 빛이 엉기어 사람의 그림자 하
나 비치지 않았다.
"모리는 소리 말어. 차라리 이런 디가 귓속말 헤기는 더 존 거이여. 우리 같은
상것들이 헛간 뒤에서 수근수근 허다가는 외나 덜미 잽히게. 누가 혹시 우리를
본대도 저것들이 무신 소리 시시덕거리능고 험서 무심히 지나치제 유심히는 안
볼 거이, 큰일날 비밀 이얘기 대문간에 엉버티고 넘 다 들으라고 허는 사램이
어디 있간디? 안 들킬라고 넘 안보는 디서 숙덱이제. 여그서는 누가 우그리고
서 있도 안허고 대문간이라 들으가고 나가니라고 지나치는 사람들뿐잉게, 넘 허
는 말 살째기 귀담어 엿듣도 안헐 거이고."
"그런디요?"
"결국은 수천샌님이 봉출이를 자식으로 딜이고 말 거이란 이얘기여. 새터서방님
대신으로 미우나 고우나, 내 피 받었잉게."
"관옥 같은 데린님들이 지신디요."
"아 손자 달코 아들 달체. 숟구락허고 젓구락이 한 밥상 한 자리에 나란히 뇌인
다고 씨이능 것도 같응가? 그저 수제는 따로따로 가 아니라 쌍둥이맹이로 꼭 같
이 따러 댕기지마는, 숟구락 들 때 따로 있고 젓구락 들 때가 또 따로 있잖응게
비. 숟구락으로는 밥 떠 먹고 국 떠 먹고, 젓구락으로는 반찬 집어 먹고. 사람
정도 매한가지라. 손자가 암만 이뿌고 귀허대도 그게 아들은 아닝 거잉게."
"상하 신분이 하늘과 땅인디."
"차암, 내내 이얘기 헝게로 어디 귀뚝 속에 들얹었다 나왔능가 딴 소리 허고 앉
었네이? 그게 다 등 따시고 배불를 때 이얘기랑게. 수천샌님이 자식을 굶게 되
얐다고 안 그리여? 내가. 시방은 저러고 소 닭 보디끼 멀뚱멀뚱 무감헌 것맹이
라도, 인자 두고 바아. 내 말헐 거잉게. 틀림없어. 또 설령 안 그런다 허드래도
그렇게 되겄게 해야제."
"무신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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