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805

혼불 5권 (8)

촉촉하게 피어나는 꽃잎도, 향훈도, 우거진 잎사귀도, 꽃보다 더 곱다는 단풍도 이미 흔적 없이 사라진 대지의 깡마른 한토에, 나무들은 제 몸을 덮고 있던 이파리를 다 떨구어 육탈하고 오로지 형해로만 남는 겨울. 겨울은 사물이 살을 버리고 뼈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그래서 제 형상을 갖지 않는 물마저도, 흐르고 흐르던 그 살을 허옇게 뒤집어 뼈다귀 드러내며 얼어붙는다. 그뿐인가, 바람 또한 경의 뼈를 날카롭게 세워 회초리로 허공을 가르며 후려치니, 날새의 자취도 그치고, 사람도 다니지 않으며, 짐승 또한 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는 혹독한 추위 속에, 사위를 둘러보아 그 무슨 위안이나 온기 한 점 얻을 길 없는 삼동.헐벗은 잿빛으로 앙상한 골격을 뻗치고 있는 낙목한천에, 겨울 달은 얼음처럼 떠오른다. 그래..

혼불 5권 (7)

2.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무엇 하러 달은 저리 밝을까. 섬뜩하도록 푸른 서슬이 마당 가득 차갑게깔인 달빛을 밟고 선 채로, 아까부터 망연히 천공을 올려다보던 강실이는, 두 손을 모두어 잡으며 한숨을 삼킨다. 함께 삼킨 달빛이 어두운 가슴에 시리게 얹힌다. 싸아 끼치는 한기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그네의 여읜 목과 손등, 그리고 바람조차 얼어붙어 옷고름 하나 흔들리지 않는 희 저고리와 흰 치마 위에 달빛은 스미듯이 내려앉아 그대로 서걱서걱 성에로 언다. 그 성에의 인이 교교하게 파랗다. 마치 숨도 살도 없는 흰 그림자처럼 서 있는 강실이의 머릿단에 달빛이 검푸르게 미끄러지며, 그네의 등뒤에 차가운 그림자로 눕는다. 달빛이 너무나 투명하고 푸르러, 그림자는 그만큰 짙고 검다. 먹빛이다. 사립..

혼불 5권 (6)

누군가는 '설'이란 말이 본디 '시린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고, '서럽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했다는데, "새해 첫날, 몸을 삼가지 않으면 일년 내내 슬픈 일이 생긴다."는 뜻에서 그런 말이 생겨났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이날은 너나없이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조심하며 궂은 것은 멀리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웃는 얼굴로 덕담만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기채는 새해의 첫들머리에 앉아 깊은 한숨을 토하니. 일룽이는 불빛에 그림자 지는 그의 얼굴은 깊이 패인 근심으로 검누렇게 보였다. 강모의 일이 아니라도, 엄둥에 거친 베옷 굴건 제복을 입고 있는 상주에게 해가 바뀐대서 무슨 희색이 있으리요만,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는 마음이 너무나 사무쳐서 날마다 산소에 오르내리며, "..

혼불 5권 (5)

효원은 강모가 이 집을 떠나 만주로 갔다는 그 말을 들은 날로부터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이 조왕에 정화수를 올린 다음에는, 갓 지어 푼 밥을 강모의 밥그릇에 담아, 조왕단의 정화수 앞에 노았었다. 그 밥이 곧 강모였던 것이다. 먼 곳에 가서도 부디 배 곯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 따뜻한 이 밥을 식기 전에 먹기 바라는, 마음 지극한 정성이 오붓하게 담긴 밥그릇. 그것은 출행한 가장이나 가족을 둔 집안의 아낙이 조왕에 반드시 갖추어 올려야 하는 기도 의례였다. 몸인 밥. 조왕님. 올에는 할머님이 작고허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방이 어둠침침하여 동이 트지 않은 섣달의 스무나흗날 새벽, 효원은 복받치는 설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세정을 ..

혼불 5권 (4)

콩심이는 고개를 옆으로 꼬고 안서방네는 웃기만 한다. "체를 이 그녁 뚫린 체를 걸어 노먼 되야. 마당 가운데다가 지드란헌 장대를높으댄허게 세워 놓고이. 그곡대기다가 이 체를 딱 둘러씌워 놓는 거여. 벙거지맹이로. 될 수 있으면 구녁이 아조 촘촘허고 많은 놈으로." "크면 더 좋것네? 쬐간헌 것보돔." "하아, 그렇제이." "근디, 체가 왜 야광귀 막는 비방이다요?" 그런 이야기는, 철재를 무릎에 앉힌 율촌댁한테서도 나왔다. 집안의 주부로서, 바깥에서 주재해야 하는 일은 효원의 몫이었고, 방안에서 이루어지는 마른 일은 율촌댁이 하는 까닭에, 율촌댁은 손자를 데불고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잠시 재롱을 보는 것이다. "저도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자면 먼 길이라 다리가 아프지 않겄냐. 그래서 마당에 내려앉기 전에 어..

혼불 5권 (3)

그래서 머리를 빗을 때는 이 빗접을 넓게 펼치어 쓰고, 다 빗은 다음에는 다시 접어 간편하게 밀어 놓는 것인데, 혹 어디 출행할 일이 있을때는 메고 다닐 수 있도록 다회를 친 매듭끈까지 달린 것이다. 빗접의 뚜껑에는 한복판에 색지를 접어 가위로 오린 녹색 꽃이 탐스럽고 정교하게 피어 있고, 둘레 네 귀퉁이에는 노랑.주황.보라.남색의 매미와 잠자리들이 솜씨 있게 오려 붙여져 있었다. 이기채는 결코 아무 데서나 머리를 빗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집안의 누구보다 맨 먼저 일찍 일어나는 그가 온 집안이 카랑카랑 울리게 기침 소리를 내면, 아직도 머뭇머뭇 검푸름한 빛으로 뒤안이나 헛간 모퉁이에 고여 있던 어둠은 깜짝 놀라 무색해지고, 그 기침 소리를 들은 방방에서는 황급이 인기척이 부시..

혼불 5권 (2)

우주 천리가 이럴진데, 한 나라의 운명이나 사람의 일생도 이에서 다를 것이 없을게다. 그래서 천자문 뒤풀이에도 자시생천 하늘 천, 축시생지 따 지, 인기인 사람 인, 하지 않으냐. 자시에는 태양이 땅밑에 드니 만물이 어두워 오직 하늘만이운행하고, 축시에는 동쪽으로 당겨 가니 동방이 벌어져 땅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인시에는 더 밝은 기운이 터올라 날이 새는지라, 날 새면 자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므로, 인시부터는 사람의 시간이라 하는 것이다. 어둠이 물러가고 사람이 세상을 주재하는 그 인시에 이르도록까지는 여전히 어둠의 새상이라. 그러니 사람도 그 동안만은 세상을 어둠한테 내주고 죽은 둣이 자지 않느냐. 그것이 순리니라. 물론 이와는 반대로 하루에 태양이 가장 밝아 온 천지에 어두운 곳이 없이..

혼불 5권 (1)

1. 자시의 하늘  자시가 기운다. 바람끝이 삭도같은 섣달의 에이는 어둠이, 잿빛으로 내려앉는 겨울 저녁의 잔광을 베어 내며, 메마른 산과 산 능선 아래 움츠린 골짜기로 후벼둘고 헐벗은 살이 버슬버슬 얼어 터지는 등성이와 소스라쳐 검은 뼈대를 드러낸 바위 벼랑 허리를 예리한 날로 후려쳐 날카롭게 가를 때, 비명도 없이 저무는 노적봉은 먹줄로 금이 간 몸 덩어리를 오직 묵묵히 반공에 내맡기고 있었다, 어둠의 피는 검은가. 휘이잉. 칼날의 서슬이 회색으로 질린 허공에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노적봉 가슴패기에 거꾸로 꽂히자, 그 칼 꽂힌 자리에서는 먹주머니 터진 듯 시커먼 어둠이 토혈처럼 번져 났다. 바람이 어둠이고, 어둠이 난도였다. 어지러이 칼 맞은 자리마다 언 산의 생살이 무참히 벌어지고, 어둠은 그 틈..

혼불 4권 (完,47)

"허나, 이런 이야기도 있잖습니까? 공자께서 일찍이 무리와 더불어 천하를 주유하실 때 , 난을 만난 나라의 변방에 이르셨는데, 아비규환으로 피비린내 자욱한 마을이 온통 적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창칼에 도륙이 되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려. 그 와중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손에는 어린 자식, 앞에는 늙은 부모, 잡고 끌고 아우성인데, 저만큼 어떤 사람이 두 아이를 양팔로 붙안고 사뭇 섧게 섧게 울더니만 단호히 한 아이를 떼어 놓고 아이만 데리고 피난을 가더랍니다.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보면 차마 갈 길을 갈 수 없어 그랬겄지요. 공자가 제가를 시켜 남겨진 아이한테 가서 그 연유를 물어오라 했습니다. 다녀온 제자는 아내도 없는 처지의 그 사람이 데리고 간 아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