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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34)

18 평토제  흰 옷을 입은 집사자들이, 옻칠을 한 제기에 높이 괴어 올린 제수들을 조심스럽게 받쳐들고, 청암부인의 신주를 모신 영좌 앞의 제상에 공손히 진찬한다. 살감이 살아 생전에 받는 밥상과는 달리 다리가 휘엇하니 길고 상면이 높은 제상은 마치 허공에 소슬하게 걸린 선반 같았다. 그 검은 상에 나무 그릇의 둥근 굽 닿는 소리가 명부의 음향으로 울린다. 솜씨를 다하여 굄새를 뽐낸 음식과 과일들을 얼른 보아 무슨 잔칫날의 큰상이나 다를 바 없는데, 이미 유명을 달리한 혼백을 위한 음식이라 그러한가, 그 위에는 적막한 기운이 감돈다."나 죽은 다음에는 동네 사람들을 후히 먹이라."고 했던 청암부인은"이제 나 죽고 나서 제사가 돌아오거든 모쪼록 음식을 걸게 하여 아끼지 말고, 술도 많이 빚고, 떡도 많이 ..

혼불 4권 (33)

그것은 하도 엄청난 일이어서 옹구네의 심사 따위는 너무나 하찮아. 이 일에 어디 비집고 끼여들 여지가 없다는 것을 그네는 감지한 것이다. 참말로 그런 일을 이 사램이 저지를랑가.옹구네의 가늘게 좁혀진 눈이 춘복이 옆얼굴을 사려본다. 위로 뼏친 춘복이의 쑤실쑤실하고 숱 많은 칼눈썹이 꽁지에서 날카로운 회오리같이 매암을 돈다. 그 눈썹은, 강실이를 이 농막의 이 방안에 데려다 앉혀 놓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여지없이 내려피고 잘라내 버릴 기세로 거칠게 솟구쳐 있었다. 무서라. 옹구네는 그 서슬에 저도 모르게 살갗이 오도르르 일어선다. 알 수 없는 소름이 온몸을 훑는다. 이미, 저지를 일만 남었구나. 이게 어제 오늘 마음먹어 재미로 불쑥 해 보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옹구네는 확실..

혼불 4권 (32)

"불도 좀 쓰고."그러나 춘복이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도 있으면 속이 조금 트일 것 같아서 옹구네는 어느결에 식은땀이 배어난 손으로 더듬더듬 등잔대를 찾는다. 마음이 허공에 떠서 헛손질을 여러 번 하다가 손 끝에 잡힌 부시통을 당기는 옹구네를 젖히며, 일어나 앉은 춘복이가 거칠게 부식돌을 친다. 번척 번척. 빛이 튀는 부식돌이 쑥잎 말린 부싯깃보다 먼저 옹구네 바싹 마른 가슴속에다 휘르르르 불을 붙인다. 허이그흐으. 내, 이런 날이 올 지 알었다. 매캐한 쑥내가 번지면서 방안이 침침하게 밝혀지자 옹구네는 한숨을 뿜어 냈다. 가슴을 내리누르고 있던 어둠의 덩어리가 한숨에 섞여 터져 나온다."이 잡을 일 있소? 불은 쓰라고 그러게."옹구네한테서 엇비슥이 고개를 돌린 춘복이가 부시..

혼불 4권 (31)

그리고는 저 이불과 요대기를 깔고, 덮고, 년놈이 한자리에 기고 뒹굴었을 것을 생가하니, 우억, 더러운 살내가 숨에 끼쳐들어, 그네는 그것에 손을 대 보기는커녕 두 번도 더 안 쳐다보고 그냥 방에서 나오고 말았었다."대관절 그거이 꼬랑지 아홉 개 달린 여시냐, 비얌이냐."공배네는 옹구네의 도톰하고 동그람한 낯바나대기가 떠오르자 콱 무지르듯 머리 속에서 쫓아내 버리며, 이번에는 춘복이를 탓하였다."에라이, 천하에 못난 놈. 지멋에 지쳐서 거러지 서방을 얻는단 말도 있기는 허드라만, 그래 어디 지집이 없어서 그 얌전헌 시악시 다 마다허고, 기껏 골르고 골라서 자식 딸린 홀에미도 홀에미 나름이제. 어쩌다 저런 옹구네 같은 것한테 걸려 갖꼬 벵신맹이로 빠져 나오들 못허고, 소 발에 개 다리 꼴을 허고 앉었냐, ..

혼불 4권 (30)

17 덜미 "불이나 써 바. 캉캄헣게. 불 쓰고 말히여. 일어나 앉어서."정작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어금니로 눌러 옥문 채로, 목소리를 차악 낮추어 옹구네는 말했다. 마디마다 똑똑 끊어 가며 찰지게 다잡는 음성이다. 그것은 지금 옹구네의 머리꼭지까지 분이 받쳤다는 표시다. 부아통이 터지거나 누구하고 싸울 일이 생길 때, 다른 사람 같으면 우선 앞 뒤 없이 흥분하여 있는 대로 악을 쓰기 쉽고, 그러다 자칫 상대방의 머리 끄뎅이나 멱살을 쥐어틀며 뒤엉키게 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그네는 결코 그러는 법이 없었다. 성질이 화덕 같아 열이 많은 옹구네가 씨근씨근 분을 못 이겨 낯바닥이 벌겋게 달아오르면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왠지 주춤해지는데, 드디어 익어 터지게 화가 치밀면 그네의 얼굴에는 붉은 쇠에 놀디..

혼불 4권 (29)

"어디만큼 옹게는, 동산이 한나 나오드래. 그래 다리도 아푸고해서 풀밭에 앉었는디. 마침 거그 꺼멍 소 한 마리허고 삘헌(붉은) 소 한 마리가 나란히 엎대어 누워 있어. 배를 깔고. 점심밥 먹고 새김질이나 허고 그러고 있었등가 모르제."그걸 보고 원효 대사가 물었어."너 어뜬 소가 몬야 일어나겄냐?"그렁게 사명당이, 잠깐 지달르시라고 그러고는 괘를 요렇게 빼봉게 화괘가 나와. 불 말이여. 불은 빠알간 안헝가?"옳지."하고는"저 삘헌 소가 몬야 일어나겄소."했단 말이여?"그러냐? 나는 꺼멍 소가 몬야 일어나겄다."스승의 말씀에, 어디 보자, 허고 조께 있응게. 아니 꺼멍 소가 펄떡 일어나네 그려. 아, 이거 웬일이냐, 이상허다, 내가 괘를 잘못 뺐능가."화괘가 나왔으면 뻘건 불잉게 삘헌 소가 몬야 일어나야..

혼불 4권 (28)

"에라이, 빌어먹을놈, 어른이 무신 말을 허면 그렁갑다 허제 꼭 저렇게 어긋장을 놓제. 야 이놈아, 매안에 양반들은 일펭상에 빗은 머리크락, 깎어 낸 손톱 발톱을 하나도 안 내불고 유지에다 싸 둔단다. 그렁 거 다 뽄 보든 못허지만, 알고는 있어야여, 알고는.""헐 일이 그렇게 없다요? 우숴 죽겄네. 그러고오, 그렁 것도 참말로 그랬능가는 모르지만 그랬다고 허드라도 인자 옛날 이애기요. 아재, 수천 양반 못 뵈겼소? 진작에 단벌허고 양복 입고 안 댕기요? 개명해서. 양반 중에 양반이고 종갓집 형제라도 시절이 변허먼 사람도 바뀐당 거, 그것만 바도 알 수 있잖아요? 그것 뿐이간디? 두말 더 헐 거 없이 나랏님이 먼저 상투를 손수 짤렀다는디 머.""나랏님이 그랬다능 건 내 눈으로 직접 보들 안했잉게 머라고 ..

혼불 4권 (27)

춘복이는 노상 그렇게 말했다. 만약에 그것이 그냥 해 보는 말이었다면 장가를 가도 열 두 번도 더 갔을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고개를 흔들어 버린 중매 자리를, 나중에는 아예 말도 못 꺼내게, 춘복이는 듣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았다."아이고, 알었다. 오냐, 이 빌어처먹을 놈아. 장개도 못 가 보고 죽으먼 몽달구신이 된다는디, 인자 너 알아서 허그라. 니 멋대로 히여."끝내는 그렇게 말을 해 버리고 말았지마는, 그래도 저러다가도 돌아설 날이 있겄지, 싶은 마음을 공배는 버리지 않았다."그런디, 옹구네는 멋 헐라고 그렇게 춘복이 궁뎅이만 바싹 따러 댕기는가 모르겄소. 치매 자락을 꼬랭이맹이로 흔들어댐서."그렇지 않아도, 새얌가에 앵두꽃 핀 날 아침, 비얌굴로 떠나는 새각시 얌례가 꽃 옆에 서서, 안녕히 계시..

혼불 4권 (26)

"춘복이 자만치 일 잘허는 일꾼도 흔찮을 거인디. 어디 살림 따순 집이 들어가서 머심이라도 조께 살었으먼, 먹고 자는 거 걱정 없고 지 앞으로 다문 얼매라도 뫼아 놀 수 있고, 갠찮지 않겠소잉?"한번은 공배네가 넌지시 그렇게 말했었다."머심? 조선에 다른 오만 사램이 다 머심을 살어도 가는 못 사네. 머심이랑 거이 거 아무나 사는 거인지 아능게비네. 머심이 꿍꿍 일만 허먼 되는지 알어? 주인 대신해서 그 집 농사 다 맡어 지어양게 농삿속 궁리가 훤해야고, 사람도 부릴지 알어야고, 일도 잘해야고.""춘복이야 왜 그렁 거 못허께미?""허지. 허기야. 맽겨만 노먼 못헐것도 없겄지맹. 그런디, 머심은, 독불장군은 못히여. 그러고, 머심이 얼매나 성질이 자상허고 공손해야 하는지 아능가? 창시 빼서 걸어 놓고 지 ..

혼불 4권 (25)

"그래서 어디다가 멩당을 썼다요?"심드렁한 목소리다. 몸이 방에 있어 이야기를 듣는 중이라 말로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정작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그런 말투였다. 그러고 보니 이 며칠 동안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춘복이였다. 허우대 벌어지고 힘 또한 남의 일 몇 몫은 하면서, 거멍굴의 근심바우 저쪽 동산 기슭에 얼기설기 제 손으로 얽은 농막에 혼자 살고 있는 춘복이는, 부모도 없고, 형제나 일가 피붙이 하나도 없는 떠꺼머리였다. 그러나 말이 떠꺼머리지 나이 서른의 턱에 걸려, 걱실걱실한 생김새에 번듯한 인물을 가지고, 무엇이 모자라 장가를 못 가는가 하여 공배 내외는 애를 많이 태우면서, 몇 번인가는 그 일로 아주 차분이 마음먹고 타이른 일도 있었다."이 썩을 놈아. 너도 인자 늙어 봐라. 너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