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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15)

그러나 그는 타고난 기를 죽이지 않고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가,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로부터 시작하여, 세조의 특채로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세조 14년 무자년에 문과 급제 장원을 하였다. 문과 급제후, 그의 벼슬은 자꾸 올라가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성종 24년 팔월에는 예조판서, 대사헌을 지낸 명신 성현과 더불어 악학궤범을 편찬, 완성하였다. 이렇게 조정에 굳은 기반을 가진 기성 세력 훈구파의 한 사람이었던 무령군 유자광은 영남 출신인 사림파들과 항상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결국 연산군 4년에는 무오사화를 일으키어 사림파를 한 손으로 쓸어 무참하게 죽이니, 조야에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일신으로만 본다면, 이일로 감히 누가 그 뜻을 어기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큰 위세를 떨치게 되어 큰..

혼불 4권 (14)

"오만 일을 다 우리가 허는디, 새비맹이로 등쌀이 꼬브라져 갖꼬 모심고, 김매서, 추수끄장 다 해 줘도, 우리한테 떨어지능 것은 품삯 맻 전이여.""공으로 일해 중가. 밥 먹고, 새참 먹고, 담배 술 다 줘서 먹고, 품삯도 받고, 놉이란 게 그렇제 그러먼."볼멘소리를 누르는 것은 그보다 나이 조금 더 먹은 공배다. "있는 양반은 손에다 흙 한 보래기 안 묻히고 그 농사를 다 둘러 먹는디, 떡은 고물이 묻어서 어뜨께 자시능고.""물팍에 앉인 쳅이 백옥 같은 섬섬옥수로 입 속으다 너 디리제.""깍 물어 부러.""멀?""손구락을.""아야.""아야? 아나, 아야. 시방 참말로 속 아푼 것은 우롈 꺼이네, 우례. 그거이 시방 막 이쁠 때라 기양 날로 씹어도 빈내 한나 안 나게 생곘등마는, 아이고. 어디다 대고 말..

혼불 4권 (13)

뙤약볕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들의 등뒤에서 키녜와 돔바리는 광주리에 그릇과 숟가락들을 챙겨 담고, 물담살이 붙둘이는 밭으로 논으로 새물을 길어다 동이에 부어 주었다. 논에서도 일꾼들은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보리 단술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고는 얼근해져서 쌈지를 꺼내 곰방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밭일은 주로 여자가 하였지만 논일을 하는 것은 주로 남자들이었다. 살림과 농사가 큰 집에서는 상머슴, 중머슴, 담살이를 다 두고 부리지만, 보통은 하나 아니면 둘을 두는데, 담살이는 그 중 나이가 어려 열두어 살부터 열일곱 정도의 사이에 든 소년 일꾼으로, 땔나무를 장만하거나 소를 먹이고 꼴을 베는 깔담살이, 물 긷는 일을 전담으로 맡는 물담살이가 있어, 주인집에서 먹고 자며 옷을 얻어 입고, 새경으로는 한 해에 쌀..

혼불 4권 (12)

동네 사람들은 오례 잡아 서리쌀, 풋돔부, 풋콩 까서 밥을 짓네, 송편 하네, 창 앞에 대추 따고, 뒤안에 알밤 줍고, 논귀에서 붕어 잡고, 두엄에 집장 띄워 먹을 것 많건마는, 가련한 우리 신세 먹을 것 바이 없네. 세상에 죽는 목숨 밥 한 덩이 누가 주며, 찬 부엌에 굶는 아내 조강인들 볼 수 있나, 철 모르고 우는 자식, 배를 달라 밥을 달라, 무엇으로 달래 볼까. 우리는 저 박을 타서 박 속은 지져 먹고, 박적은 팔어다가 한 끼 구급하여 보세. 하고는 탄식을 하며, 동네 도끼를 얻어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박꼭지를 찍어 마당에다 내려놓고, 하도 큰 박이라 동네 대목의 큰 톱을 얻어다가 박통을 켜는데, 기껏 부린 욕심은 박 속이나마 배불리 먹고, 바가지는 쌀도 일고 물도 떠먹는다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혼불 4권 (11)

중로 이하의 사람들로 신분이 미천하고 가진 재주 없는데다가, 집도 절도 없이 궁박한 처지여서제 살림은 그만두고 목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의 상민들이, 어느 양반의 행랑이나 혹은 그 집 발치에 붙어 살면서, 종도 머슴도 아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주인네 일을 하는 호제들이 사는 집도 '호제집'이고, 혼인한 노비들이 저희 식구끼리 나와 사는 집도 '호제집'이라고 두루 불렀다. 살림이 근동에 울리는 대갓집이라면, 남노여비에 호제들, 그리고 상머슴, 중머슴과 소 먹이고 꼴을 베는 깔담살이, 물만 긷는 물담살이들을 욱근욱근 불리었지만, 같은 문중의 양반 집안이라도 물려받은 것 여의치 않고 처지가 곤란한 집에서는 잘사는 일가의 집으로 가서 안팎일을 거들기도 하였다. 매안 고을 이씨 문중의 종가 이기채의 솟을대문 ..

혼불 4권 (10)

13 서러운 소원은  캄캄한 한쪽 구석에 모로 누워 잔뜩 몸을 움추린 채 꼬부리고 있던 우례는, 어둠이 천장까지 들어찬 방 밑바닥에 깔린 듯 눌리어 물 먹은 사람처럼 더는 참지 못하고, 뭉친 숨을 후우우으 바트게 뱉어낸다. 안 그래도 칠흑인 방안에 우례가 뱉어 낸 바튼 숨이 검은 멍울로 덩어리진다. 그것은 낮은 곳에 무겁게 떠 있다가 들이 쉬는 우례의 숨에 거멓게 엉기며 숨을 막는다. 그것이 갑갑하여 우례는 입을 깊이 벌리며 숨을 삼켜 보려 하지만 오히려 숨은 명치에 걸려 버린다. 댓진 같은 숨이었다. "우례 그거이 애기를 뱄담서.""아이고, 사참해라. 거 무신 소리여? 가는 아작 댕기 꼬리 걷어 올리도 못했는디, 누구 씨를 받었이까잉.""받었능가, 뿌ㄹ능가.""허기는, 가 생긴 거이 반드로옴 헝 거이 ..

혼불 4권 (9)

"지금은 안 뵈이는디 머.""아이고, 저 말허는 것 좀 봐, 꼭. 상전은 눈이 열두 개단다. 본다고 알고 안 본다고 몰라? 두 눈 다 깜고도 속까지 훠언히 알제. 종 부리는 디는 이골이 난 양반들인디."우례의 목소리에 그을음이 스며든다. 눈발 없는 동짓달의 마른 바람이 무겁게 캄캄한 밤 한복판을 베폭 찢는 소리로 날카롭게 가르며 문풍지를 후려 친다. 그 서슬에 놀란 등잔불이 허리를 질려 깝북 숨을 죽인 채 까무러들더니 이윽고 길게 솟구쳐 오르며 너훌거린다. 방안으로 끼쳐든 삭풍 기운에 소름을 털어 내듯 흔들리는 불 혓바닥이 검은 그을음을 자욱하게 토한다."이노무 심지가."우례는 헝겁 보따리를 묶어 웃목으로 다시 밀어 놓고는 귀이개를 뒷머리에서 뽑아 들고 등잔 심지를 건드려 본다. 대가리가 어수선하게 뭉친..

혼불 4권 (8)

대궐의 살림하고야 비길 수 없지만, '살림'이란 대궐이나, 사대부의 집이나, 서민의 것이나, 신분과 재산의 규모와 형평에 따라서 종류는 더 다양하거나 단출한 것이 서로 다르겠지만, 기본 골격 뼈대는 똑같은 것인즉. 노비를 많이 거느리는 집에서는 일의 대소,경중,완급을 따라 세밀하고 규모있게 분담을 할 것이며, 노비가 적은 집에서는 꼭 그렇게 네 일 내 일 가를 수가 없이 자기 맡은 책임말고도 웬만큼은 서로 거들어야 할 것이고, 그나마 단비로 노비가 하나뿐이면 그는 한 몸에 그 일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단비조차 부릴 수 없는 처지의 형세라면 반상을 막론하고 본인이 직접 하나에서 열까지 다 일해야 하지 않겠는가. 동네 사람들은 오례 잡아 서리쌀, 풋돔부, 풋콩 까서, 밥을 짓네, 송편하네, 창 앞에 ..

혼불 4권 (7)

세 번째 재즙을 넣을 때는 끓인 물이 아닌 냉수를 넣은 후에, 끝으로 오미자즙을 알맞게 넣으면 드디어 선명한 홍화색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홍화색을 무명에 들이려 할 때는 먼저 엷고 맑은 담홍색으로부터 시작해서 짙고 깊은 농색이 될 때까지, 뜨거운 온도로 몇 번이고 염색을 하면 되지만, 아무래도 홍화색은 곧바로 젖은 물을 들이는 것보다는 연지로 만들어서 물에 풀어 염색하는 빛깔이 더 곱고 선명하다. 홍화색을 만들 때, 홍화 한 근에 오미자 한 근의 비례로 오미자를 같이 마련하여, 따로 옆에다가 항아리를 하나 놓고, 거기에 연수를 부어 오미자를 담그어 두는데, 날짜는 홍화꽃과 마찬가지로 잡는다. 이윽고 홍화꽃물 밭칠 때, 오미자도 체로 쳐서 고운 물을 항아리에 받아 놓고는, 홍화 두 번째 재즙으로 ..

혼불 4권 (6)

12 그을음 불꽃  "쯧.꽃니야."그을음이 길게 오르면서 일렁거리는 등잔불 밑에 꼬부리고 앉아 붉은 헝겊 조각을 만지고 있던 계집아이는, 여남은 살이나 되었을까, 제 어미가 혀를 차며 부르는 이름에 움찔하여 손짓을 멈춘다. 소리를 누른 어미의 음성에 나무라는 기색이 역력한 때문이었다. 손짓만 멈추었을뿐 그대로 쥐고 있는 다홍색 헝겊말고도 계질아이의 무명 치마 앞자락에는 남색, 노랑, 진분홍, 초록의 헝겊쪼가리가 세모, 네모, 여러 장 놓여 있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제법 길고 넓었지만 아닌 것은 그저 제 손바닥만큼씩이나 자잘하다. 그 색색 가지 헝겊 조각들은 어둠을 머금은 주황의 등잔 불빛을 받아 알록달록 요기를 띠어, 본디 제 색보다 오히려 더 요려하게 보인다. "너 멋 허냐. 시방. 오밤중에. 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