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이청준]]
<눈길> <내가 네 사촌이냐> <병신과 머저리>
<눈길>
-이청준 作-
***동우***
2015.08.10.
황석영 선정 한국명단편 101.
이청준(李淸俊: 1939~ )의 '눈길'
그날 새벽의 눈길.
몰락한 집안.. 절망.. 이제부터 세파를 스스로 헤처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운명의 자각..
그날 새벽의 눈길은 아들로서는 끄집어내고 싶지않은 기억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눈길의 그 기억은 버젓한 옛 집을 잃은 서러움과 집을 찾아온 아들에게 따뜻한 집안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 부끄러움, 그리고 아들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점철된 말할수 없이 애틋한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노인'이라 칭(稱)합니다.
<'나는 죽은 형이 남겨놓은 장남의 짐까지 짊어지고 고군분투하면서 홀로 살아왔다.'>
자꾸만 대차대조표를 끄집어 내어 자신은 어머니에게 빚이 없음을 뇌이는 아들입니다.
<애초의 허물은 그 빌어먹을 비좁고 음습한 단칸 오두막 때문이었다. 묵은 빚이 불거져 나올 것 같은 불편스런 기분이 들게 해 오는 것도 그랬고, 처음 예정을 뒤바꿔 하루만에 다시 길을 되돌아 갈 작정을 내리게 한 것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내게 빚은 없었다. 노인에 대해선 처음부터 빚이 있을 수 없는 떳떳한 처지였다.>
그러나.
필경 아들은 뜨거운 것을 숨기기 위해 눈꺼풀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내처 잠이 든 척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불빛 아래 눈을 뜨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마비된 듯 가라앉아 있는 때문만이 아니었다. 졸음기가 아직 아쉬워서도 아니었다.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 오르는 것을 아내와 노인 앞에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대문이었다. 아내는 이번에도 그러는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보, 이젠 좀 일어나 보세요. 일어나서 당신도 말을 좀 해보세요." 그녀가 느닷없이 나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그녀의 음성은 이제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래도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뜨거운 것을 숨기기 위해 눈꺼풀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내처 잠이 든 척 버틸 수밖에 없었다.>
벚이여.
아래, 브레히트의 詩 한편 읽어보시라.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브레히트 '나의 어머니'->
여의고 나서야... 그리하여 늙어보니 조금 헤아려집디다.
'치사랑'의 왜소함으로는 도무지 파악할수도 깨달을수 없는 '내리사랑'의 규모를.
이청준의 '눈길'
내 눈자위에 홍건하게 고여있는 눈물, 크리넥스 한장 뽑아 닦았습니다.
벗이여, 어버이 살아계실적 효를 하십시오.
효가 별거리까.
살가운 한마디 말이라도 늙은 부모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된답니다.
아래는 신경숙의 수필입니다.
더불어 전에 포스팅한 것 있으니 마루야마 겐지의 '버스 정류장' 일독을 권합니다.
그것도 너무 좋은 소설입니다.
++++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
-신경숙-
오늘 아침에 나는 이런 시를 읽었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브레히트라는 시인의 「나의 어머니」라는 시입니다.
무심코 펼쳐든 옛날에 읽던 시집에서 발견한 이 시 때문에 나는 온종일 허둥거렸습니다.
바로 코앞에 떨어진 일들을 해결하느라 늘 분주한 생활 속에서 툭 던져지듯 읽게 된 시.
내 주변엔 시에 대한 얘기를 할 만한 대상이 없어 얼굴도 모르는 당신께 이렇게 매일을 쓰고 있습니다.
····· 때로 그렇잖아요.
자신의 내밀한 어떤 얘기를 잘 아는 사람에겐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요.
지금 내가 그런 모양입니다.
나는 이 시를 오늘 한 번 읽고 다 외워버렸습니다.
물론 언젠가 읽었을 시이기 때문이겠지요.
가만히 보면 4행밖에 되지 않는 이 짧은 시에는 한 여인의 생애가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사실 잠깐만 집중하면 흐름으로 인해 쉽게 외워집니다.
그러나 외우는 것엔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한 번 읽자마자 시를 쭉 외우게 된 것은 특이한 일이긴 하죠.
당신에게 메일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고
브레히트의 시를 외우고 있습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고.
그리고 절실히 깨닫습니다.
예전에 이 시를 무심코 지나왔던 이유를.
그렇군요. 그랬어요. 그때는 나의 어머니가 아주 젊은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브레히트라는 시인은 대체 이 시를 언제 썼는가 찾아봤습니다.
1920년대더군요
시집 뒤의 그의 연보를 다시 뒤져보니 1920년에 어머니 장례식 치름···· 이라고 되어 있네요.
아마도 시인은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온 밤에 이 시를 쓴 모양이지요.
그래요. 어머니란 존재는 시인도, 시인이 아닌 나도 이 세상에 있게 한 시작이지요.
시인은 그의 어머니를 묻고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고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라고 쓰는 그 순간의 시인은 어땠을까요.
읽는 자의 마음이 이리 흔들리는데 쓰는 자는 어땠을지.
시를 읽는 사이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사춘기 시절에 어머니 곁을 떠나 도시로 나왔지요.
어머니 곁을 떠나온 후 나는 틈만나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갖고 싶어서 다시 도시로 돌아 올 때는 늘 밤기차를 탔지요.
지금도 정확히 기억합니다.
11시 57분 상행선 열차였지요.
어머니는 항상 역까지 나와 나를 배웅해주셨습니다.
나는 그걸 당연히 여겼어요
나는 다시 기차에 오르고 어머니는 차창 밖에 서 있었죠.
내 무릎 위엔 기차에서 먹으라고 어머니가 삶아준 계란이나 귤 같은 것이 놓여 있곤 했죠.
그때의 풍경이 내 기억의 어디쯤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나를 태운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하면 어둠 속의 풀랫폼에 홀로 남아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요.
나는 고개를 뒤로 하고 플랫폼에 남아 있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곤 했죠.
어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요.
오늘 아침 브레히트의 이 시를 읽기 전까지 나의 기억은 여기까지였어요.
내 기억은 항상 거기까지였지요.
그런데 시를 읽는 동안 그때 기차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던 어머니는 어떻게 집에 돌아 가셨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나더군요.
거의 삼십 년 만에요.
내가 태어난 마을은 기차역에서 십 리는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땐 버스가 하루에 서너 번 다니다가 어두워지면 그마저 끊기던 곳이었지요.
나를 태운 기차가 떠난 후 자정이 다 지난 그 시간에 어머니는 혼자서 역을 빠져나가 그 산길과 논길을 걸어서
집에 가셨던 것일까?
삼십 년이 다 지난 나에게 찾아온 그 질문은 벼락같은 것이었지요.
어머니는 정녕 그 어둠 속을 홀로 걸어 가신 것일까?
그때의 젊은 어머니는 그 밤길을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 가셨을까요.
집에 도착했을 때쯤 아마도 어머니의 신발은 밤이슬로 축축이 젖어 있었을 테지요.
그 신발을 벗으며 또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머니 곁을 떠나온 후 십여 년 동안 계속되던 기차역에서의 어머니와의 작별.
그때마다 어머니가 홀로 걸어가야 했을 그 발길을 어떻게 이제야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미워졌습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나도 이 도시에 나의 삶을 갖기 시작했죠.
나의 삶이 새로 생긴 나의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어머니가 계시는 그곳과는 몸도 마음도 멀어졌지요.
처음 어머니 곁을 떠나던 그때처럼 시간만 나면 어머니가 계시던 곳으로 향하던 마음도 옛일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오늘 아침, 브레히트의 시를 읽는 순간에 그때 어머니가 어떻게 집에 돌아 갔는지를 생각하게 됐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동안 단 한 번도 어머니가 그 밤길을 어떻게 돌아 갔을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까요.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과 어머니를 향한 뒤늦은 후회가 남아 이렇게 모르는 당신께 메일을 쓰고 있습니다.
정말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요.
++++
<내가 네 사촌이냐>
-이청준 作-
***동우***
2013.11.01 05:41
지금은 어떨는지, 옛날 문둥병은 천형(天刑)의 역병이었다.
그 천형을 짊어지고 집을 떠나 50년 동안 잊고 살아야 했던 사람, 하나 뿐인 형.
어느 날 그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생면부지의 조카를 맞는 삼촌, 어찌 황망하고 당혹스럽지 않으랴.
문둥이섬(소록도)에서만 성장한 조카, 그 역시 자신을 맞는 핏줄의 대응이 어떤가 얼마나 불안하였으랴.
쭈볏쭈볏...
이윽고 뜨겁고 무참스런 회한에 젖어든 삼촌.
급기야 그 삼촌을 향하여 패악에 가까운 불퉁스러움을 부리는 조카.
실낱같은 관계의 단절감이라는 그 낯 선 공포에 대한 조카의 어쩔수없는 방어기제였을 것이다.
필경 형제끼리의 핏줄인 저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서 50년 한의 통곡을 터뜨렸을 것이다.
아, 그러나 둘러보니 작금의 핏줄은 물보다 그닥 진하지 않은듯 하다.
나남없이 저런 경우 그냥 남남끼리 살고자 했을 것만 같다.
15년(개의 일생)을 함께 한 눈멀고 귀먹고 이빠진 늙은 개가 걱정스러워 어디 여행도 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人情의 절절함이 그러할진대, 핏줄은 인정보다 앞서야 하는 천륜의 문제....
아, 끊는다고 끊어지는 관계인가.
눈물겹도록 끈질긴 것임을....
핏줄이란.
<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作-
***동우***
2016.10.14 04:35
엊그제 '광장'의 작가 최인훈(1936~ )이 서울법대 제적된지 60년만에 명예졸업장을 받는다는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종교를 갖지 못했다거나 거창한 세계관을 성립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보다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훨씬 크다">
우리 시대 가장 지성적인 작가라고 평가받는 최인훈이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감성적인 저 소박한 한(恨)은 어쩔수 없는가 봅니다.
산수(傘壽)넘어 그깟 졸업장 무에 아쉬을까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늙으니 그 마음 이해가 갑니다그려.
'병신과 머저리'를 다시 읽었습니다.
1966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어 13회 동인문학상을 받은 작품이지요.
젊었을 적에는 깊이 만져지지 않았던 실존적 고뇌... 새롭게 읽혀졌습니다.
병신과 머저리들.
언필칭 지성이라는 것, 사유라는 것..
관망하기, 관념하기, 뒷짐지기, 체념하기...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80년대 어떤 서울대학교 재학중인 여학생.
행위하지 못하는 자신의 회색주의를 괴로워하다가 한강에 몸을 던졌지요.
검색하니 있습디다, 그녀의 유서.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에 아픔을 함께 할 자신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죄지음이다
절망과 무기력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의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으로 못 했던 빚갚음일 뿐이다
앞으로도 사랑할 수 없기에, 욕해주기를
모든 관계의 방기의 죄를
제발 나를 욕해주기를, 욕하고 있기를"
-1986->
그러나 이 소설 ‘병신과 머저리’는 시대적 고통보다 더 근원의 실존주의 어름의 고뇌일듯 싶습니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나머지 객설은 내일...
p.s
좀전 들으니 노벨문학상을 가수 '밥 딜런'이 받았더군요.
예전부터 그런 얘기 떠돌기는 했지만 설마하였었는데..
놀랍습니다.
***강경구***
2016.10.14 11:02
작가분이 이청준입니다.
***┗동우***
2016.10.15 03:40
내 기억의 오류. 아래 댓글 강경구님 지적으로 이 소설의 작가가 최인훈이 아니라 이청준임을 알았습니다. 고칩니다.
고맙습니다, 강경구님.
바로 잡았습니다.
***동우***
2016.10.15 04:22
바로 잡습니다.
이 소설 '병신과 머저리'는 '최인훈'이 아니라 '이청준 (李淸俊, 1939~ 2008)'의 작품입니다.
내 기억 속에는 '병신과 머저리'가 최인훈의 것이라고 각인되어 있습니다만, 다시 살펴보니까 업어온 텍스트 파일에도 분명 '이청준'이라고 되어있습디다.
오자(誤字)를 교정하여 포스팅하면서 작가의 이름까지 '최인훈'이라고 고쳐 쓴걸 보면, 오류(誤謬)로써 입력된 내 편도체에 새겨진 기억은 참으로 끈질긴 것이었던가 봅니다.
바로 잡도록 지적하여 주신 강경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병신과 머저리.
형과 아우.
때로 오버랩되고 때로 분리되면서 전개되는 형과 아우의 회의적이고 패퇴적인 자의식.
형의 그것에는 실체가 있는듯 하지만 아우의 아픔은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부(患部)를, 어쩌면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관념의 완성은 현실도피, 소극적이고 방관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아우.
그리하여 형은 능동적인 치유를 고뇌하고 도모하지만 아우는 삶에 대한 의식이 마냥 소극적인, 관념의 눈으로 형의 고뇌의 과정에 기생하여 극복하려 하는것 같습니다.
피흘리는 노루와 김일병.
그리고 사냥꾼과 관모.
피학자와 가학자.
형의 소설.
아우는 김일병을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하지만 형이 죽인 사람은 관모였습니다.
그러나 관모는 현실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 그것은 실체험의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관념놀이였던 겁니다.
형은 어두운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듯한데 동생의 명료하지 않은 저 허무는 어떻게 되려는지요.
작가의 의도에는 어떤 철학적 명제가 있음직한데, 그건 무엇일런지 나 역시 몽롱합니다.
곱씹어 보아야 할 매우 사변적인 소설입니다.
***moon향***
2016.10.15 18:24
에공...어제는 와서 최인훈의 작품으로 읽고 놀랐는데
그냥 읽기만 하고 나갔습니당^^;;;;
최인훈 선생님께서 팔순이 지나 서울대 명예졸업장 받게 되었으니
아름다운 소풍 끝나고 가면...부모님과 뜨겁게 해후하시겠어요...
아! 이 작품이 이청준 선생님 작품이로군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청준 선생님의 '눈길'도 떠오릅니다.
'병신과 머저리'는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지만
'머저리'라는 말에 왠지 정감이 가네요...^^
***┗동우***
2016.10.16 04:43
이청준.
서편제, 선학동 나그네.... 그리고 눈길이 있었군요.(전에 올렸엇지요)
그 소설 읽으면서 눈물 비어져 나오던 기억 있습니다.
병신보다는 머저리 바보 축구 멍청이 맹순이 같은 어휘가 훨씬 정감이 있지요. ㅎㅎ
-독서 리뷰-
[[이청준]]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잔인한 도시>
<서편제>
-이청준 作-
***동우***
2016.10.17 04:17
'이청준' (李淸俊, 1939~ 2008)의 '서편제'는 '남도사람 연작시리즈'중 첫째편입니다.
후속편 '소리의 빛'과 '선학동 나그네'도 연이어 올리겠습니다. (마침 텍스트 파일 눈에 띄어 손품 좀 팔았습니다)
'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지요.
유봉이(김명곤粉)와 송화(오정해粉)와 동호(김규철粉)가 청산도(인가?)의 긴 밭고랑 사이를 춤사위와 함께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걸어오는, 그 롱테이크의 화면이 떠오릅니다.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와 '소리의 빛'을 소재로 하여 영화 '서편제'를 만들었고 '선학동 나그네'는 동명의 또다른 영화로 만들었지요.
<사내는 그때 과연 몸을 불태울 듯이 뜨거운 어떤 태양의 불볕을 견디고 있었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머리 위세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여름 햇덩이가 하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한 숙명의 태양이었다. 잠을 자거나 잠을 깨거나 소년의 귓가에선 노랫소리가 떠돌고 있었고 소년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그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햇덩이가 걸려 있었다. 소리는 얼굴이 없었으되, 소년의 기억 속엔 그 머리 위에 이글거리던 햇덩이보다도 분명한 소리의 얼굴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언제나 뜨겁게만 불타고 있던 햇덩이야말로 그날의 소년이 숙명처럼 아직 그것을 찾아 헤매다니고 있는 그 자신의 운명의 얼굴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달라져버린 소리의 사내가 핏덩이 같은 갓난애와 소년을 데리고 이 고을 저 고을로 소리를 하면 밥구걸을 다니고 있었을 때도, 소리의 진짜 얼굴은 언제나 그 뜨겁게 이글거리는 햇덩이 쪽이었다. 괴롭고 고통스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심판인지 사내는 그 고통스런 소리의 얼굴을 버리고는 살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 햇덩이가 뜨겁게 불타고 있지 않으면 그의 육신과 영혼이 속절없이 맥을 놓고 늘어졌다. 그는 그의 햇덩이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소리를 찾아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리고 언제나처럼 무서운 인내 속에서 그 뜨겁고 고통스런 숙명의 태양볕을 끈질기게 견뎌내고 있었다.>
허지만 글쎄요.
영화가 저 햇덩이를 적실하게 영상화하는데 성공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병신과 머저리'가 사변적이라면 '서편제' (남도사람 시리즈)는 우리 정한적(情恨的) 감성에 소구(訴求)하는 매우 정서적(情緖的)인 소설입니다.
어떤 면에서 일종의 예술소재(素材) 소설이라고 하여도 무방할듯 싶습니다.
한민족에게는 증오와 원망과 회오와 그리움까지도 죄 한(恨)이 되는가 봅니다. <홧병이라는 병명도 한국의 임상으로부터 인정받은 병명이라지요.>
판소리 다섯마당의 컨텐츠가 죄 슬픈 것들도 아니고 해학과 육담도 질펀하거늘, 작가는 판소리의 깊은 예술성을 그 한(恨)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하는듯 합니다.
소리예술(판소리)로 표출되는 한(恨)의 승화.
판소리 한마당도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는 내게 이 소설은 그 어름의 느낌을 자아내게 해줍니다.
명창을 만들기 위하여,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아버지.
恨을 심어 줌으로.
유럽의 카스트라토가 생각납니다만, 그 남성 거세는 다만 여성(女聲)으로 변성케 하기 위한 일종의 의학적 조치였습니다.
카스트라토가 외면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라면 서편제의 그것은 보다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것이겠군요.
후속편에서 잡설 계속... ㅎ
***moon향***
2016.10.17 16:02
<서편제> 영화에서 남도 풍경이 굉장히 아름답지요.
학창시절에 시험 끝나고 보러간 영화였는데
벅찬 감동에 친구들이랑 눈물바람 했었던...
오정해 님, 진도아리랑, 최고!♥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에에에~~
아리랑 음 음 으음~~ 아라리가 났네~
***┗동우***
2016.10.21 05:03
서편제.
눈물바람으로 보셨군요, 문향님은.
내게도 감동은 있었지만, 눈물바람 정도는 아니었는데.. ㅎ
이청준 원작의 영상화가 완벽했는지는 좀...
참 전에 이청준 원작을 영화화한 '축제'라는 영화를 임권택감독이 만든적 있었지요.(안성기, 오정해가 나온)
장례에 의하여 보여주는 죽음과 관계에 대한 사유...
근데 같은 주제를 다룬 또하나의 영화 '학생부군신위'라는 영화도 그 무렵 있었지요.
박철수 감독이 만든.
'축제'도 썩 잘만든 영화였지만 나는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를 훨씬 재미있게 보았어요.
<소리의 빛>
-이청준 作-
***동우***
2016.10.19 04:11
소리의 빛.
영원히 채워질수 없는.
남자는 북장단을 잡고 여자는 소리를 하면서 밤이 새도록 소리판을 벌입니다.
30년만에 해후한 저 오누이, 소리와 장단으로 이심전심을 나눕니다.
그리고 서로의 정체에 대한 한마디 말없이 오누이는 헤어집니다.
아, 나와 같은 즉물적(卽物的) 속된 인간.
저와 같은 경지를 알리가 없습니다.
원망이 한이 되고 그리움이 한이 되는.
서로의 그 한을 다치지 않으려는.
저 허무의 서러움을, 아름다움을, 예술을.
소리의 빛.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겠지요.
햇빛소리에 대하여.. 내 친구는 전에 '소리의 그림자'라는 말을 들려줍디다.
소리의 그림자를 아는 또 한사람 주인사내 천씨.
그의 대사가 작가의 말일테지요.
<그러고 보면 아마 자네 오라비라는 사람이 그렇게 가버린 것도 자네의 그 한을 다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는가 싶네. 사람들 중엔 때로 자기 한 덩어리를 지니고 그것을 소중스럽게 아끼면서 그 한 덩어리를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가는 의인들이 있는 듯 싶데그랴. 자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알고 보면 자네 오라비라는 사람도 아마 그 길에서 그리 먼 데 있는 사람은 아닐 걸세. 그런 사람들한테는 그 한이라는 것이 되레 한세상 살아가는 힘이 되고 양식이 되는 폭 아니겄는가. 그 한덩어리를 원망할 것 없을 것 같네. 더더구나 자네같이 한으로 해서 소리가 열리고 한으로 해서 소리가 깊어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일세. 자네 오라비도 아마 그 점을 알고 있었던 듯싶네. 자네는 아까 오라비가 자넬 해치고 싶은 충동을 못이겨 간 거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설사 맞는 데가 있다 치더라도 내 짐작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네. 자네 오라빈 자네 소리에 서린 한을 아껴 주고 싶은 나머지, 자네한테서 그것을 빼앗지 않고 떠나기를 소망했음에 틀림없을 걸세.>
<선학동 나그네>
-이청준 作-
***동우***
2016.10.19 04:46
아, 한(恨)이란 무엇입니까?
사랑도 배신도 원망도 미움도 그리움도 팔자도 죄 恨의 질료(質料)가 될겝니다.
화해나 용서나 쟁투나 보복과 같은 방식으로 시원스레 터뜨리지 못하고, 이를테면 가슴속 켜켜이 쌓여있는 스트레스가 恨일테지요.
눈 먼 여자는 포구의 물이 막혀 뭍이 되었음에도 '소리'로써 학을 날게 합니다.
恨을 치열한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연과 동화되는 경지에 이르러 사람들 마음 속에 한마리 학을 비상케 하는 것입니다.
오라비도 필경 자신의 한과 화해를 이루었을테지요.
<사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보았을 때, 길손의 모습이 사라지고 푸르름만 무심히 비껴 흐르고 있는 고갯마루 위로 언제부턴가 백학 한 마리가 문득 날개를 펴고 솟아올라 빈 하늘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눈 먼 딸 그리고 의붓아들.
저들은 돈과 명예를 거머쥔 밥 딜런이나 한 시절의 명창 임방울도 이화중선도 아니었습니다.
이름없이 살다가 남도땅 산하에 가난하게 스러져간 필부필부의 소리꾼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로또대박과 같은게 恨을 일거에 씻어주리라 꿈꾸는 맘모니즘의 속물 한마리 예 있습니다.
참, 요앞 댓글에서 '선학동 나그네'의 동명(同名) 영화운운 하였는데,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제목은 '선학동 나그네'가 아니라 '천년학'이었습니다.
눈먼 누이는 오정해, 오라비는 조재현, 주막집주인은 류승룡이었고.
<잔인한 도시>
-이청준 作-
***동우***
2018.12.03 04:23
'이청준(李淸俊,1939~2008)'의 '잔인한 도시'
1978년 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기만된 자유에 순치(馴致)된 새.
상징성 짙은 표현주의 영화를 보는듯 합니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8.12.03 23:45
잔인한 도시.
도시는 이를테면 문명화.
자유는 하나의 슬로건, 어쩌면 도시의 프로파간다.
기만적인 방생(放生) 시스템.
위선과 억압과 잔인함.
都會를 벗어나는, 날개 찢긴 새와 늙은 사내.
생명끼리 상주(常住)할, 남녘땅 고향은 실재하는 곳인지.
아들은 실존하는 인물인지.
사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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