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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5권 (14)

카지모도 2023. 1. 25.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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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황천왕동이

 

늦은 봄이다. 꽃 찾는 나비들은 멀리멀리 날아다니고 벗 부르는 꾀꼬리들은

여기저기서 노래하는 때다. 임꺽정이의 집 앞뒤 마당에 풀이 많이 나서 어느 날

꺽정이가 처남 황천왕동이와 아들 백손이에게 풀을 뽑으라고 말을 일렀다. 천왕

동이가 매형의 말에 상을 찡그리면서도 마지 못하여 생질을 데리고 풀을 뽑으러

나서는데 앞뒤 마당을 둘이 갈라 맡아 뽑기로 하다가 풀 적은 앞마당은 생질에

게 빼앗기고 풀 많은 뒷마당을 차지하게 되었다. 좁지 않은 마당에 풀이 무더기

로 나서 낱낱이 뽑지 않고 북북 쥐어뜯어도 한 나절이 좋이 걸릴 모양이라 천왕

동이가 얼마 뽑다가 성가신 생각이 나서 삽을 갖다가 쓱쓱 밀어나갔다. 이때 울

뒤에 섰는 느티나무에서 꾀꼬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천왕동이가 꾀꼬리 노래

를 듣느라고 삽을 짚고 서서 우두커니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섰는데 꺽정이의 병

신 아우가 뒤꼍으로 오다가 천왕동이의 섰는 모양을 보고 큰 이야깃거리나 얻은

듯이 부지런히 도로 나가서 앞마당에 나섰는 애기 어머니를 보고 "누님, 백손이

아저씨가 느티나무를 이렇게 쳐다보구 있습디다. " 하고 고개를 쳐들어 보이니

애기 어머니는 혀를 차고 '싱겁기도 짝이 없다. " 하고 병신 아우를 핀잔 주었

다. 병신이 열쩍어하며 섰다가 조카 풀 뽑는 옆으로 간 뒤에 애기 어머니가 뒤

껼에 와서 "황도령이 무얼 정신없이 봅시나? " 하고 소리치며 천왕동이에게로

가까이 왔다. "저 노래 좀 들어보우. " "꾀꼬리 소리를 듣고 깁시군. " "구르기두

잘 구르구 꺾기두 잘 꺾소. 더 말할 것 없이 명창이오. “ "노총각이 딴 생각이

나서 꾀꼬리를 듣고 섰구려. " "딴 생각이라니? " "꾀꼬리가 색시 죽은 넋이라니

까 색시 생각이 나는 게지. " "꾀꼬리가 참말 색시 죽은 넋이오? " "예전부터 내

려오는 말이니까 참말인지 누가 아오. 말인즉 이쁜 색시 하나가 시집을 못 가고

죽어서 꾀꼬리가 되었대. 그래서 꾀꼬리 소리가 머리 곱게곱게 빗고 시집가고지

고 한다는구먼. " "객객하는 것은 무슨 말이오? " "그건 나도 몰라. " "시집 못

간데 한이 맺혀서 피 토하는 시늉으루 객객하나? ” "그런지도 모르지. 장가 못

간 총각이 다르구려. " "에, 속상해. 얼른 어디 가서 흔기집이라두 하나 얻어야겠

어. " 하고 천왕동이가 삽을 들고 다시 풀을 밀기 시작하는데 애기 어머니는 "꾀

꼬리 소리 좀더 들어보오. " 하고 곧 목소리를 변하여 "머리 곱게곱게 빗고 황도

령께 시집가고지고. " 하고 꾀꼬리 소리를 흉내내고 깔깔 웃었다. "예, 여보. " "

귓구녕을 씻고 잘 들어봐요. " "날 조롱할라구 처음부터 거짓말을 지어냈구려.

" "내가 거짓말 지어내는 재주나 있으면 좋게. 그런데 참말 서울 사람들은 꾀꼬

리를 내인의 영신이래, 예전에 젊은 내인 하나가 백가 성 가진 별감을 몰래 상

관하다가 나중에 들켜나서 잡혀 죽었는데 그 영신이 꾀꼬리가 되어서 머리 곱게

곱게 빗고 백별감 보고지고 보고지고 소리한다나. 아마 서울 사람의 귀에는 그

렇게 들리는게지. “ 천왕동이가 말대답이 없어서 애기 어머니는 한동안 있다가

"여보, 여보! " 하고 불렀다. "왜 불르우? " "내 이야기 좀 듣구려. ” "또 무슨

이야기가 있소? " "저 나무 좀 보오. " 하고 애기 어머니가 울 안에 선 대추나

무를 가리켰다. "대추나무두 또 무엇이 죽은 넋이나 영신이오? " "아니 다른 나

무들은 잎이 피어 한참인데 잎 하나 없이 말라 죽은 것같이 섰는 것이 무엇하고

비슷한가 생각해 보오. " "비슷하긴 무엇하구 비슷해, 대추나무지. " "장가 못 든

노총각하고 비슷하지. " "그렇지, 또 노총각. " 천왕동이가 애기 어머니와 같이

서로 웃음의 소리 하고 있을 때 꺽정이의 기침소리가 뒤에서 났다. 꺽정이가 풀

쁩는 것을 보러 오든지 또는 다른 일이 있어 오든지 뒤껼으로 돌아오다가 천왕

동이가 삽으로 미는 것을 보고 "풀을 손으루 뽑아야지 삽으루 밀면 곧 도루 나

지 않느냐. " 하고 잔소리를 하였다. 천왕동이가 밀던 것을 그치고 꺽정이를 돌

아보며 "형님, 내 말 좀 들으시우. 내가 얼른 흔기집이라두 하나 얻어야겠소. “

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천왕동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누가 말려. " 하고

가볍게 대답하였다. "형님이 힘을 써줘야지요. " "내가 힘을 안 써서 장가를 못

드느냐? " "그럼 내가 병신이라 장갈 못 가우? " "마땅한 데가 없는 걸 난들 어

떻게 하느냐. " "마땅한 데가 있는지 없는지 조선 팔도를 다 찾아봤소? ” "나더

러 조선 팔도루 돌아다니며 네 혼처를 구하란 말이냐? 그건 못하겠다. " "인제는

형님을 믿구 있지 않을 테니 고만두시우. " 처남 매부간에 이런 수작이 오고가는

중에 백손이가 들어와서 "사기장수가 밖에 와서 아버질 보자우. " 하고 연통하여

꺽정이는 백손이를 데리고 보러 나가고 애기 어머니만 뒤에 남아서 상글상글 웃

으며 "노총각이 장가들구 싶어서 몸이 바짝 달았구려. " 하고 천왕동이를

씨까슬렀다. "그놈의 노총각 소리 듣기 싫어서 과부라두 하나 얻어야겠소. "

"어디 가서 과부를 동여을 테요? " "한 집에 있는 과부두 있는데 딴 데

가서 동여을 거 있소? " "무엇이 어째, 별 망측스러운 소리를 다 하네. "

하고 애기 어머니는 눈이 샐쭉하여지는데 "그런 소리 안 들을라거든 나를

놀리질 마우. " 하고 천왕동이는 깔깔 웃었다.

사기장수가 누구인지 궁금하여 천왕동이가 삽을 내던지고 바깥 방에를 나와

보니 뜰 구석에는 과연 사기짐이 버티어 있고 방안에는 전에 보지 못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천왕동이는 방에를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지싯거리는데 꺽정이가

내다보고 들어와서 인사하라고 불러들이었다. 탑고개 사는 손가가 청석골 오가

의 집 심부름으로 분원사기를 사러 오는데 박유복이가 애기 어머니에게 보내는

물건을 맡아가지고 와서 사기를 사가지고 가는 길에 길을 돌아 꺽정이 집을 찾

아온 것이었다. 박유복이가 전번에 왔을 때 애기가 노랑 명주 저고리 하나 해달

라고 저의 어머니 조르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 무색 명주가 생긴 것이 있다고 이

다음에 가지고 오거나 인편 있을 때 보내거나 한다고 말하더니 그 명주를 잊지

않고 보냈었다. 손가는 길이 바쁘다고 물건만 전하고 곧 가려고 하는 것을 꺽정

이가 점심 먹고 가라고 붙들어놓았으나 청석골 안부 외의 별로 할 이야기가 없

어서 주객이 짬짬이 서로 보고만 앉았는 중에 꺽정이는 천왕동이 나온 것을 보

고 불러들여서 인사를 붙이고 앉아 이야기하라고 이르고 명주를 가지고 위채로

올라갔다. 손가가 소금장수 길막봉이 관계로 탑고개 가서 살게 된 사람인 것은

천왕동이도 들어서 아는 까닭에 과천서 장기 두다가 우연히 길막봉이와 서로 알

게 된 것을 이야기하고 그 끝에 "장기 둘 줄 아우? " 하고 물으니 "겨우 멱만 아

네. " 하고 손가가 대답하였다. "길막봉이하구 두어 보셨겠지. " "더러 두어 봤지.

" "어떻게 두시우? " "차포잡이여. " "누가 차포잡이란 말이오? " "내가 차포잡이

여. " 길막봉이 장기가 천왕동이에게 차포잡인데 길막봉이에게 또 차포잡이면 그

장기는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손가가 "총각은 장기를 잘 두나? " 하고 묻고 또 "

탑고개 동네에 장기 잘 두는 노인이 있는데 전에 같이 두어봤나? " 하고 물었다.

"촌장기 잘 둔다니 오죽할라구. " "그 노인이 원근은 서울 사람인데 서울서 장기

국수 노릇했다든걸. “ "그럼 한번 가서 두어 봐야겠군. " "나하구 동성동본 일

가간이라 내가 탑고개루 이사간 뒤 그 노인 집하구 한집안같이 지내네. " "내가

손서방을 찾아갈 테니 그 노인하구 장기 한번 두게 해주우. " "어렵지 않은 일이

니 언제든지 오게. " 천왕동이가 손가를 데리고 이런 수작을 하는 중에 꺽정이가

백손이에게 점심상을 들려가지고 내려왔다.

천왕동이가 손가에게 들은 장기 국수를 하루바삐 만나보려고 손가가 양주를

왔다 가던 이튿날 꺽정이더러는 청석골 가서 바루 놀다 온다고 말하고 늦은 아

침때 양주서 떠나서 승석때 탑고개를 왔는데 오는 길로 바로 손가를 찾으니 손

가의 형수 된다는 여편네가 나와서 하는 말이 시동생은 광주땅에 갔는데 오늘쯤

올 듯 하다고 하여 손가가 아직 안 온 줄을 알고 장기 잘 두는 손노인을 그대로

찾아갈까, 산에 들어가서 자고 밝는 날 다시 나올까 망설이는 중에 손가가 사기

짐을 지고 들어오다가 천왕동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일인가? “ 하

고 물었다. "무에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오? ” "대체 양주서 언제 떠났어? “ "

오늘 아침 먹구 떠났소. " "걸음 잘 걷는단 말은 많이 들었지만, 아이구. " 하고

손가는 말끝도 못 맺고 혀를 내둘렀다. 사기를 오가의 집에서 이날 해안으로 갖

다 달라고 한 것이라 손가는 곧 사기짐을 갖다 두러 갈 것인데 천왕동이 대접으

로 집에 저녁밥을 준비시키고 또 손노인을 청하여다가 장기 대국까지 시킨 뒤에

산으로 들어갔다.

손노인은 장기 수가 천왕동이만 못하였다, 그러나 승벽이 많아서 윷진애비같

이 지면서도 자꾸 덤비었다. 저녁 전 저녁 후에 대여섯 판을 한번 비기지도 못

하고 내리 지고 나서야 "내가 맞은 안될 모양일세. 나버덤 말 하나는 더한 것 같

은걸. " 하고 항복은 하되 천왕동이의 장기수를 왕청뜨게 높은 줄로는 생각지 않

는 모양이었다.

밤이 든 뒤에 손가가 산에서 나오는데 곽오주와 같이 나왔다. 오주가 천왕동

이를 보고 "내일은 마누라쟁이 생일이라구 아침 먹으러 들어오라데. " 하고 말하

니 "들떼어놓구 마누라쟁이라니 뉘 마누라 말이야? “ 하고 천왕동이가 말의 책

을 잡았다. "뉘 마누라여? 우리게 마누라쟁이 하나밖에 더 있나. " "박서방의 마

누라는 마누라 값에 못 가나. " "새파랗게 젊은 여편네더러 누가 마누라쟁이라구

말할라구. " "지금버덤 한 나이라두 더 젊을 때 덕물산 장군당에서 마누라 노릇

한 건 어떻게 하구. " "그건 그때 이야기지. " "그래 내일이 오첨지 마누라의 생

일이란 말인가? " "똑똑하구먼. " "너는 형 대접을 할 줄 모르는 위인이야. " 하

고 천왕동이는 오주를 꾸짖고 "형 노릇 경치게 하구 싶은가베. " 하고 오주는 천

왕동이를 놀리었다. 오주가 꺽정이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에 천왕동이도 연

치를 따져서 오주에게 형 대접을 받으려고 하나 오주가 고분고분 아우 노릇을

하지 아니하여 둘이 서로 만나면 하나는 형 대접하라거니 또 하나는 아우 노릇

않는다거니 장난으로 다툴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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