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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초생에 평안 감영 예방비장은 서울 보낼 세찬을 분별하느라고 여러 날
동안 분주하였다. 세찬 보내는 곳이 많아서 촛궤와 꿀항아리만 서너 짐이 되고
이외에 또 초피, 수달피, 청서피 같은 피물이며, 민어, 광어, 상어 같은 어물이며,
인삼, 복령, 오미자 같은 약재며, 면주, 면포, 실, 칠, 지치, 부레 같은 각색 물종
이 적지 않아서 세찬이 모두 대여섯 짐이 되는데, 여기다가 상감과 중전께 진상
하는 물건과 세도집에 선사하는 물건을 함께 올려보내자면 봉물짐이 굉장하였
다. 세찬을 다 봉해 놓은 뒤에 예방비장이 감사께 들어가서 세찬 봉물 끝마친
사연을 아뢰니 감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제 일간 곧 올려보내도록 해보세.”
하고 말하였다. “진상 봉물두 함께 올려보내시렵니까?” “그럼 함께 보내려구
두지 않았나.” “소인의 생각에는 따루 올려보내시면 좋을 것 같소이다.” “어
째서 따로 보내는 것이 좋을까.” “함께 보내시면 봉물짐이 너무 굉장할 듯합
니다.” “굉장하니 어떻단 말인가?” “남의 이목에 어떨까 생각합니다.” “남
의 이목에 어떻단 말이야.” 감사의 언사가 불쾌스럽게 나오니 예방비장은 허둥
지둥하며 “아니올시다.” 하고 말하였다. “무에 아니란 말이야. 사람이 말을
좀 똑똑히 하게.” “중로에 적변 같은 것이 염려스러워서 말씀이올시다.” “따
루따루 보내면 적변이 염려스럽지 않은가?” 감사의 반문하는 말에 예방비장은
대답을 못하고 한참 동안 손만 비비고 섰다가 “봉물짐이 굉장하오면 더 염려스
러울 듯하외다.”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누가 짐꾼들만 보낼세말
이지, 군관들 시켜 영거해 보낼 텔세.” “진서위 여맹 김양달이가 맨주먹으루
호랭이 잡은 장사랍니다. 그런 장사 시켜 영거해 보내시면 작은 도적들은 염려
없을 듯하외다.” “그런 손이 좋겠지. 그 손이 사람이 어떤고? 여직을 부르라
게. 좀 자세히 물어보세.” “여직을 지금 곧 부르랍십니까?” “다시 물어볼 것
무어 있나.” “황송하오니다.” 예방비장이 감사 앞에서 물러나간지 한식경쯤
지난 뒤에 진서위 여직이 불려들어와서 선화당 대청에서 문안하는데, 감사가 방
으로 들어오라고 말하여 방 윗간에 들어와 양수거지하고 섰다. “여맹 김양달이
가 장사라지?” “네, 용맹이 놀랍소이다.” “사람은 어떤고? 성실하냐?” “나
이 아직 젊은 까닭에 주색이 과합네다.” “이번에 진상 봉물을 영거해 보내려
고 했더니 사람이 그러면 시원치 못하군.” “그런 중난한 일을 혼자 맡기기는
좀 어려울 것 같소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데리구 가며 단속하면 탈이 없을 줄
압네다.” 여직이 서울 가보고 싶은 눈치로 말하는 것을 감사는 알지도 못하며
“그러면 잘 알겠다.”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감사가 얼마 동안 다른 수
작하다가 여직을 내보내고 다시 예방비장을 불러서 봉물짐 영거해 갈 사람을 상
의하다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자네가 김양달이 데리고 갔다오면 어떻겠나?”
하고 물으니 예방비장은 서울 집에 다녀오는 맛에 “사또께서 갔다오랍시면 갔
다옵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워낙 자네가 가면 세찬들 분전하는 데도 좋겠
네.” “그건 이곳 사람보담 좀 낫겠습지요.” “폐일언하고 자네가 영솔하고 가
도록 준비하게.” 하고 감사가 분부하여 예방비장은 곧 서울 갈 준비를 차리게
되었다. 봉물짐 중에 보물상자 같은 드다루기 조심스러운 것과 꿀 항아리 같은
짐 만들기 거북한 것만 짐꾼에게 지우고 그 나머지 봉물과 길양식은 다 말에 실
리게 되었고, 영거하여 갈 사람으로 김양달이는 저 하나면 족하다고 장담을 하
였지만 마침내 건장한 장교들을 뽑아서 데리고 가게 되었다. 이것은 예방비장이
감사께 취품하여 정한 것이다. 길 떠날 준비는 섣달 초이렛날 다 되었으나 팔일
은 화일이자 또 불의출행일이라 하루 지나서 아흐렛날 예방비장이 일행을 영솔
하고 평양서 떠났다. 일행의 사람은 예방비장과 김양달을 수에 넣지 않고 장교
다섯, 말꾼 넷, 짐꾼 셋, 마부 하나 도합 열셋이고 말은 복마 네 필 외에 예방비
장의 부담마 한 필까지 모두 다섯 필이었다. 일행이 첫날은 평양서 늦게 떠난
까닭으로 겨우 오십 리 중화 와서 숙소하고, 이튿날은 황주서 중화하고 봉산와
서 숙소하였다. 동지 섣달 짧은 해에 구십 리 길을 온 까닭에 짐꾼, 말꾼들이 저
녁밥을 먹고 바로 쓰러진 건 말할 것도 없고, 타고 온 예방비장도 종일 얼었던
몸이 녹으며 졸음이 와서 저녁밥도 변변히 먹지 않고 누우며 곧 코를 골았다.
예방비장과 같이 사처방에 들어 있는 김양달은 혼자 봉물 짐짝을 의지하고 앉아
있다가 방 밖에서 누가 “이런 달밤에 술 한잔 먹었으면 좋겠다.” 하고 혼잣말
하는 것을 듣고 술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방문을 고이 열고 밖으로 나오니 마당
에서 달을 치어다보던 젊은 사내가 앞으로 가까이 와서 “손
님 어째 안 주무십니까?” 하고 물었다. “자네가 이 객주에 있는 사람인가?”
“녜, 객주 주인의 동생이올시다.” “지금 술 먹구 싶다구 말한 사람이 자네지.
” “혼자 지껄인 소리를 들으셨습니다그려.” “자네가 술을 잘 먹나?” “왠
걸 잘 먹을 줄두 잘 모릅니다.” “여기 술파는 집이 몇집이나 되나?” “술파
는 집은 여러 집이올시다.” “큰애기가 술파는 집두 있겠네그려.” “큰애기 술
장사는 없습니다만 젊은 여편네 술장사는 더러 있습니다.” “이쁜 술장사 있는
집으루 나를 좀 데려다 주게. 그러면 자네두 술 한잔 줌세.” 김양달은 객주 주
인의 동생을 데리고 술집에 가려고 객주집 문밖에까지 나왔다가 곤히 자는 예방
비장을 믿고 갈 수 없는 생각이 나서 다시 들어와 큰방 문을 열고 짐꾼, 말꾼들
이 가로 세로 쓰러진 옆에 따로 떨어져 누워 자는 장교들을 소리질러 깨웠다.
“어느 새 무슨 잠들이냐? 내가 잠깐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 올테니 그동안 사처
방 좀 살펴라.” “예방 나리두 같이 나가십니까?” “벌써부터 정신 모르구 주
무신다.” “소인들이 번갈아가며 일어 앉았겠습니다.” 장교들의 말을 듣고 김
양달은 마음을 놓고 객주 주인의 동생을 앞세우고 술집을 찾아왔다. 머리에서
기름내나는 술장사 계집이 옆에 와서 부니는 바람에 부어라 먹자, 부어라 먹자
하고 술을 부어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술 먹는 동안에 객주 주인의 동생이 잠
깐 밖에 나갔다 온다고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데, 김양달은 술장사 계집과 농탕
을 치느라고 사람 없는 것을 해롭지 않게 여기어 찾지 아니하였다. 김양달이 술
을 실컷 먹은 뒤에 몸에 지니고 나온 상목으로 술값을 놓고 술집에서 나와 길을
휩쓸며 객주로 돌아나오는 중에 앞길에서 “이놈아!” “도둑놈아!” 하고 고성
치는 소리가 나서 취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앞을 내다보니 사내 하나가 멀지 아
니한 골목길로 뛰어들어가는데 뒤에서 쫓아오는 여러 사람이 장교들인 것 같았
다. 김양달이 봉물 생각이 나며 정신이 번쩍 나서 쏜살같이 골목길로 쫓아가서
도망하는 사내를 몇 간 안에서 붙들었다. 김양달이 처음에 도적의 저고리 뒷고
대를 움켜잡았더니 도적이 몸을 틀어 빼치려다가 못 빼치고 칼손질로 김양달의
고대 잡은 팔을 번개같이 후려쳤다. 김양달이 비록 술이 억병 취하였더라도 손
에 잡은 도적을 헙헙하게 놓칠 사람이 아니라 “이놈 봐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
운 줄 모르구, 이놈아,.” 하고 얼른 고대 잡았던 손으로 도적의 팔목을 잡아 뼈
가 으스러지라고 꽉 쥐니 도적의 입에서 “아이구, 아이구.” 소리가 줄달아 나
왔다. “이놈, 이제는 영문을 좀 알겠느냐?” “아이구, 살려줍시오. 죽을 때라
잘못했습니다.” 도적의 말소리가 귀에 설지 아니하여 김양달이 괴이쩍게 생각
하고 다른 손으로 도적의 고대를 뒤로 젖혀서 달 아래 얼굴을 보니 도적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곧 객주 주인의 동생이었다. “아 이놈, 네가 도둑놈이냐?” 하고
말할 때 장교들이 그제사 쫓아왔다. “김여맹 나리십니까?” “나리가 잡으시길
잘했습니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습니다.” “이놈이 봉물 짐 한 짝을 훔쳐냈습니
다.” “봉물짐은 어디 있느냐?” 하고 김양달이 급히 물으니 한 장교가 앞으로
나서며 “소인이 마침 일어 앉았다가 수상한 기척을 알구 뛰어나와 보니 이놈이
벌써 봉물짐 한 짝을 어깨에 매구 대문 밖으루 나가겠지요. 그래서 소리를 지르
구 쫓아나오니까 이놈이 짐짝을 내버리구 도망질을 쳤습니다.” “짐짝을 잃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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