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까지 마저 잠이 들었더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이놈이 객주 주인의 동생이
란다. 객주루 끌구 가자.” 김양달이 도적을 장교들에게 내맡기고 장교들의
앞을 서서 객주에 와서 보니 대문밖에 짐꾼, 말꾼들이 웅끗쭝끗 나섰는데
객주 주인도 그 틈에 끼어 섰었다. 김양달이 장교들을 돌아보며
“형놈두 도망하지 못하게 잡아놔라.” 이르고 사처방으로 들어왔다. 앉아 있
는 예방비장이 김양달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말 한마디를 아니하여 김양달은
주저주저하고 섰다가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서 예방비장의 찌푸린 상을 바라보며
“놀라셨지요?” 하고 먼저 말을 붙였다. “여보게 김여맹. 밤중에 어디 갔다 왔
나?” “잠깐 밖에 나갔었습니다.” “장교들의 말을 들으니까 초저녁에 나갔다
는데 지금 정밤중이 지났는데 무슨 놈의 잠깐이 그런가?” “잠깐 밖에 거닐러
나갔다가 술집에 들어가서 술잔 먹으라구 좀 지체가 되었습니다.” “떠날 때
사또께서 무어라구 분부하시든가. 이번에 잘 다녀오면 술을 싫도록 먹여줄 테니
서울 가는 동안 술을 끊으라구 분부하시지 않았나. 사또 분부를 하루 동안에 잊
어버렸단 말인가.” “잘못됐습니다. 이 앞으루는 다시 안 먹겠습니다.” 김양달
은 망건뒤를 긁죽긁죽하며 다시 이어서 “아주 맹세를 치오리까.
서울땅 밟기 전에 다시 술을 먹거든 제 얼굴에 침을 뱉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어디 보세.” “네, 두구 보십시오.” “도둑놈은 잡아왔나?” “네,
잡아왔습니다. 그놈이 객주 주인의 동생놈이랍니다.” “형제놈이 배가 맞아가지
구 같이 했는지두 모르겠군.” “혹시 그럴는지 몰라서 형놈까지 잡아놔 두라구
일렀습니다.” 예방비장이 객주 주인 형제를 잡아들여서 매질하여 문초를 받아
보니 동생이 술과 노름을 좋아하여 형이 해준 살림을 세번째 떨어마치고 처자는
처가로 보내고 저 한몸만 형에게 와서 얹혀 있는 위인인데, 봉물짐이 굉장한 것
을 보고 일시 불량한 마음이 나서 형도 모르게 한 짓이 분명하므로 형은 놓아주
고 동생만 본관 맡겨 치죄시키려고 결박하여 놓고 밤을 지내었다. 이튿날 식전
길 떠나기 전에 예방비장이 군수를 들어가 보려고 하다가 군수가 독감으로 앓아
서 조사까지 폐하였단 말을 듣고 이방을 보자고 부르러 보냈다. 이때 봉산 이방
은 성이 배가니, 황천왕동이의 장인 백이방이 사위 연좌로 이방이 떨어지며 곧
뒤를 받아 들어선 사람인데 그 집이 쇠전거리 아래라 쇠전거리 위에 있는 백이
방 집에서 동안이 멀지 않았다. 평양 장교가 이방을 부르러 질청에 왔을 때 이
방이 마침 집에 나가고 없어서 평양 장교는 이방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질청에서 그 집 있는 곳을 배워가지고 집으로 찾아나오는데, 쇠전거리를 다 와
서 어떤 사람을 보고 “배이방 집이 어디요?”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곧 건너
편 고샅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저 큰 집이오.” 하고 가르쳐주었다. 평양 장
교가 그 큰 집 앞에 와서 기웃거리다가 마당 쓰는 사람을 바라보고 “여보 여
보, 나 좀 보우.” 하고 부르니, 그 사람이 손에 비를 든 채 가까이 나왔다. “여
기가 배이방 집이오?” “녜, 그렇소.” “이방상찰 집에 기시우?” “녜, 기시
우.” “평안 감영서 온 사람이 잠깐 보입잔다구 들어가 말씀 좀 하우.” “아직
기침하실 때가 못 됐으니 좀 기다리시우.” “질청에 다녀나와서 다시 주무시
우?” “이방 내노신 뒤루 질청에 가시지 않소.” “이방을 내놓다니 무슨 소리
요?” “월전에 이방 내노신 걸 모르구 왔소?” “아니 여보, 오늘 죽어서 어제
장사 지냈단 수작이오? 방금 내가 질청에서 다녀가셨단 말을 듣구 왔소.” “배
이방이 다녀나간 걸 잘못 듣구 오지 않았소?” “아니 여기가 배이방 집이 아니
오?” “아니오. 여기는 백이방 집이오.” “아까 배이방 집이냐구 물으니까 그
렇다구 하지 않았소.” “백이방 집이냐구 묻는 줄 알구 그렇다구 했지요.” “
떡먹듯이 배이방 집이냐구 물었는데 백이방 집으루 들었다니 임자 귓구멍이 좀
덜 뚫렸구려.” “자기 말이 똑똑지 못한 건 생각 않구 남의 귀를 나무라우.”
“임자의 귓구멍이 귓구멍이거나 창구멍이거나 그까짓건 그만두구 여기가 전임
이방 백씨의 집이면 신임 이방 배씨의 집은 어디요?” “배이방 집은 이 앞 쇠
전거리 지나가서 물어보우.” “인제 잘 알았소. 어서 가서 마당이나 쓰우. 나는
가우.” 평양장교가 다시 고샅에서 나와서 쇠전거리 아래 배이방 집을 찾아가서
배이방을 보고 온 사연을 말한 뒤에 같이 데리고 객주로 왔다. 예방비장은 길
떠나기 바쁜 때 지체하였다고 장교를 꾸지람하는데 쇠전거리 아래 위에 사는 배
이방, 백이방이 뒤섞인 것을 장교가 이야기하여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고 예방비
장까지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배이방이 예방비장 앞에 들어와서 문안한 뒤 예
방비장은 지난 밤에 봉적할 뻔한 것을 대강 이야기하고 잡아놓은 도적을 징치하
여 달라고 부탁하니 이방이 대번에 “그런 놈을 징치하다뿐입니까. 소인이 맡아
기지구 단단히 징치하두룩 하올 터이니 염려 말으십시오. 소인네 골에 옵셔서
그런 변을 당합신 일이 매우 황송하외다.” 하고 선선히 부탁을 받았다. 예방비
장이 옆에 있던 김양달을 돌아보며 “이제 고만 길을 떠나지.” 하고 말하여 김
양달이 사처방에서 나와서 짐꾼, 말꾼을 불러내어 길 떠날 준비를 차리게 하였
다. 짐꾼, 말꾼들이 짐짜 들어내는 것을 배이방이 보고 섰다가 예방비장을 보고
“저 많은 봉물을 영거합시구 청석골 같은 화적패 있는 곳은 지나갑시기 조심스
러우시겠습니다. 숫돌고개루 돌아가시면 모를까 탑고개를 지나가시려면 아무쪼
록 저녁때는 지나가지 마십시오. 화적이 저녁때 제일 잘 난다구 하옵디다.” 하
고 말하니 예방비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숫돌고개루 돌아갈 이야기두 있었지만
돌뿐만 아니라 길이 더 험하구 조심스럽긴 매일반이라 청석골루 가기루 됐네.
서흥, 평산 숙소한 다음에는 금교역말이 대개 숙소참이 될 테니까 청석골은 아
침결에 지나가게 되겠지.” 하고 대답하였다. 일행이 봉산서 떠나서 검수역말 중
화하고 서흥와서 숙소하니 이날 길은 칠십 리요, 서흥서 떠나서
총수산중 중화하고 평산 와서 숙소하니 이날 길은 팔십리다. 평산서 금교는 육
십 리요, 송도는 백여 리니 송도는 대처라 숙소하기 좋지마는 짧은 해에 백여
리를 참 대기도 어렵거니와 화적 나는 청석골을 늦게 지나기 무서워서 예방비장
은 다음 날 숙소참을 금교역말로 작정하고 있는데, 평산 숙소에 들어서 저녁
밥을 먹은 뒤에 김양달이 예방비장을 보고 “내일 첫새벽 여기서 떠나서 금교역
말 가서 중화하구 송도 가서 숙소하면 숙소두 좋거니와 앞길이 가벼워지니 좋지
않습니까.” 하고 의견을 말하니 예방비장은 들을 만하고 있다가 “송도 가서
숙소하면 서울을 하루 일찍 들어갈 수두 있지마는 송도 백 리가 멀기두 하려니
와 청석골을 늦게 지나가기가 재미없네.” 하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화적은
백 명 이백 명이 나오드래두 제가 혼자서 능준히 담당할 테니 염려 말구 가시지
요.” “일 있는 것 버덤 일 없는 게 좋으니까 작정하구 온 대루 내일은 금교역
말 가서 숙소하세.” “일이 있으면 제가 신명떨음이나 한번 해보지만 무슨 일
이 있겠습니까. 제 생각엔 내일 꼭 송도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신명떨음이
나 하려구 위태한 걸 무릅쓸 까닭 있나. 내일 숙소참은 금교역말이니 딴소리 말
게.” 김양달이 예방비장과 수작할 때 사처방 밖에서 방안 수작을 엿듣는 사람
이 있었다. 장교 하나가 소변 보러 자는 방에서 나왔다가 사처방 앞에 사람이
붙어섰는 것을 보고 살며시 가까이 오는데 그 사람이 홱 돌아서며 곧 나는 새같
이 바깥 행길로 나가버렸다. 장교가 급히 뒤를 쫓아나와 보니 그 사람은 간 곳
이 없이 없어지고 술취한 사람 두엇이 어깨동무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앞을 지나
갔다. “여보, 지금 여기서 사람 하나 나가는 것 못 보았소?” “어떤 사람이 여
기서 나갔단 말이우?” “못 보았거든 고만두우.” “고만두라니 우리는 고만
갈 테요.” 술취한 사람들이 멀리 가기까지 장교는 사방을 돌아보고 섰다가 사
처방에 와서 사연을 말하니 예방비장이 장교를 보고 “그것이 아마 봉산 객주의
동생놈 같은 불량한 놈인 게다. 오늘 밤엔 우리도 잠을 설잘게니 너희는 하나
씩 번갈아가며 일어 앉았거라.” 이르고 그 다음엔 김양달을 돌아보며 “오늘
밤엔 봉산서처럼 밖에 나가지 말게.” 하고 말하였다. 상하가 조심하여 무사히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해가 높이 돋은 뒤에 평산서 떠났다. 오조천에 와서 중
화할 때 홍의역말 사람 두서넛이 짐꾼, 말꾼들과 같이 앉아 이야기하게 되었는
데, 그중의 한 사람이 봉물짐이 저같이 굉장한 것은 처음 본다고 말하니 나이
젊은 짐꾼 하나가 “그까짓 것만 보구 굉장하다구? 속에는 천하 보물이 다 들었
다우.” 하고 자랑같이 말하였다. 그 사람이 비영스레 웃으면서 “평안도 사람들
다 살았구려. 등골들을 빼먹히구 무슨 수루 살겠소.” 하고 말하는 것을 예방비
장이 밖에 나왔다가 귓결에 듣고 곧 장교들을 불러서 그 사람을 잡아내어 매를
치는데 뒤에서 오는 행인 대여섯이 발을 멈추고 구경하였다. 평산서 엿듣는 사
람을 튀겨 쫓은 장교가 행인들을 가까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밀어내다가 그중의
두어 사람을 보고는 지난 밤 달빛 아래서 본 술꾼들의 모습을 생각하였다. 예방
비장이 홍의역말 사람을 매 쳐서 내친 뒤에 금교역말 가서 숙소를 미리 잡으라
고 장교 두 사람을 앞서 보내는데, 그 장교들이 행인들과 같이 오며 서로 지껄
이는 중에 금교역말 와서 숙소 잡을 것까지 의논하게 되었다. 그 행인들이 좋
은 사처 하나를 지시하마 하고 장교들과 같이 금교역말 와서 장터 끝에 있는 어
느 집으로 끌고 왔다. 그 집은 술 파는 집이라 안에는 식구가 거처하는 방이 있
고 밖에는 술청으로 쓰는 방이 있는데 거처하는 방은 깨끗하고 술청으로 쓰는
방은 널찍하였다. 그 집 주인 내외는 처음에 사처로 빌리기를 즐겨하지 않는데,
행인 중의 늙은 사람 하나가 친숙한 말씨로 “여게 이 사람들아, 하룻밤 동안에
술을 팔면 얼마나 팔 텐가. 이런 큰 행차에 사처루 빌려 드리구 시중을 잘 들면
상급 나오는 것이 술 파는 데 대겠나. 자네들을 남달리 생각해서 우리가 일부러
뫼시구 왔으니 어서어서 방을 치우게. 그러구 우리가 오늘 밤에 술을 많이 팔아
줌세.” 하고 말하여 주인 내외는 비로소 저희가 건넌방 술독 옆에서 자기로 하
고 안방도 내놓고 바깥방도 치웠다. 뒤의 일행이 다 온 뒤에 예방비장과 김양달
은 안방에 들고 장교들과 짐꾼, 말꾼 들은 행인들과 같이 바깥방에 들고 말들은
따로 마바리집에 갖다 매고 봉물짐과 행구는 모두 안방 안에 들여쌓고 길양식은
조석 두 끼거리를 떠내서 주인 주고 다시 묶어서 안방 밖에 놓아두었다. 이날
평산서 늦게 떠나고 오조천서 늦잡도린 까닭에 저녁밥을 먹고 났을 때 밤이 되
고 달이 높이 올라왔었다. 밤이 깊어져서 거의 삼경이나 되었을 때다. 전
같으면 짐꾼, 말꾼은 말할 것 없고 장교들도 천귀잠담 잠들이 들었을 터인데
바깥방에서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려서 김양달이 나와 보니
바깥방에 술판이 벌어져서 술사발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뻔찔 도는 중이었
다. 김양달이 체모도 불고하도 “나두 한 사발 먹자. ” 하고 들어앉고 싶은 것
을 억지로 참고 장교들을 불러내서 “내일 식전 일찍 떠날 텐데 자지 않구 술들
을 처먹는단 말이냐? 술판 고만 치워라. ” 하고 일렀다. 김양달이 들어간 뒤에
장교 중에서 “우리 떠들지 말구 가만가만 먹읍시다. ”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
만, 정작 술을 내던 행인들이 모두 흥이 깨어져서 고만 먹겠다고 주인을 시켜
술판을 치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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