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으로 나가는 여러 두령들의 기척이 막봉이가 앉은 자리에서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바로 막봉이 눈앞에 사람의 길이 넘는 억새가 흔들리는
것 같으며 조심스럽게 버스럭거라는 소리가 났다. 막봉이 옆에 앉았는
교군꾼들은 바스럭거리는 것이 혹시 큰 짐승이나 아닌가 의심하여
숨들도 크게 쉬지 못하는데, 막봉이가 두 팔로 땅을 짚고 몸을 떼어서 가만
가만 앞으로 옮겨나갔다. 억새 속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히 사람의 기척인 것을
알고 막봉이는 “그놈 여기 있소! ” 하고 고성을 질러 외쳤다. 억새 속에서 별
안간 사람이 뛰어나오며 곧 고개 너머로 도망하려고 하여 교군꾼들이 앞을 막았
다. 그 사람이 다시 뒤로 돌쳐서는데 그 동안 일어선 막봉이가 팔을 벌리며 “
이놈 어디루 도망할라구. ” 하고 호령하니 그 사람은 막봉이를 업혀 오던 병인
이라고 만만히 보았던지 “네깐놈이! ” 하고 발길로 걷어찼다. 막봉이는 발길에
걷어채여서 펄썩 주저앉으며 어느 틈에 그 사람의 발목 하나를 움켜잡았다. 그 사
람이 발목을 빼치려고 애를 쓰는 중에 교군꾼들이 쫓아와서 그 사람의 좌우 팔
죽지를 붙들었다. 막봉이가 잡은 발목을 놓고 다시 얼어서서 주먹으로 두어 번
복장을 질렀더니, 그 사람은 칵 하고 무엇을 토하는데 비리내가 코를 거슬렸다.
막봉이가 다리에는 힘이 없을망정 철퇴 같은 주먹에는 명치를 질러서 사람을 죽
일 힘이 남아 있었다.
여러 두령들이 돌아와서 불상 장인이 죽어 자빠진 것을 보고 송장 처치할 것
을 공론하는데, 고개에 버리고 가자는 사람이 많았으나 꺽정이는 혹시 칠장사에
침책이 더할까 염려하여 가지고 가자고 말하였다.
막봉이의 교군은 돌석이와 오주가 앞뒤채를 메고 교군꾼들은 불상 장인의 짐
을 지고 불상 장인의 송장은 꺽정이가 옆에 끼었다. 수곡길 어름까지 왔을 때
꺽정이가 여러 두령들더러 “나는 이 송장을 죽산 관문 앞에 갖다놓구 갈 테니
먼저들 가라. ” 하고 말하니 여러 두령 중에 봉학이가 “왜 하필 관문 앞에다
가 갖다놓으실라우? ” 하고 물었다. “죽산현감더러 끌어 묻어주란 말이지. ”
“만일 되살아나든지 하면 탈이니 달골루 하지구 갑시다. ” 꺽정이가 한번 다
시 생각한 뒤 “그러지. ” 하고 봉학이의 말을 좇아서 송장을 달골까지 끼고
왔다.
이튿날 식전에 칠장사 중이 죽산 관가에 들어와서 현감을 뵈입고 “어제 밤중
에 화적패가 절에 들어와서 절을 뒤진 끝에 새 부처님 뫼신 것을 보구 무슨 맘
으루들 부처님께 젓수려구 하옵는 것을 중 하나가 밀막솝다가 얻어맞아서 지금
굴신 못하구 누웠솝구, 절에 와 있던 불상쟁이더러 불상 수공 받은 것을 내라구
하옵는데 선뜻 안 주고 앙탈하옵다가 끌려가서 이내 돌아오지 않았솝는데 날샌
뒤에 나가 보온즉 절 뒤 북전고개 위에 낭자한 피 흔적이 있사와 불상쟁이를 고
개에서 죽이구 갔나 의심이 드옵기루 전후좌우 두루 찾아보았사오나 화적들의
짓빠댄 형적만 처처에 있을 뿐이지 불상쟁이의 시체는 어디구 없솝디다. ” 하
고 아뢰어서 현감은 일변 형리를 내보내서 실지 형적을 검사하게 하고 일변 장
채를 내놓아서 화적의 종적을 수탐하게 하였다. 절에 도적 왔다간 형적과 고개
의 피흔적은 모두 확실무의하다 하나, 혹시 중들이 불상 장인의 재물을 빼앗으
려고 꾸민 일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서 현감은 칠장사 중들을 많이 잡아다가 장
방에 구류를 시키었다.
칠장사 중들이 잡혀 갇히던 이튿날 새벽에 죽산 관속이 조사를 보려고 관가로
들어오는데, 바로 관문 앞에 거적 송장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다. 관문에 송장 갖
다놓은 것은 전고에 없는 변괴라 육방관속이 들어오는 대로 떼떼이 모여서서 쑥
덕쑥덕하는 중에 이방이 작청의 어른값을 보이려는 듯이 관노를 시켜서 거적을
풀어제치게 하고 수형리를 불러서 타살인가 보라고 하였다. 살옥 검시에 이골난
수형리가 송장의 눈뜨고 입 벌린 것을 보고 벌써 타살인 주 알면서도 말을 경하
게 않느라고 타살같이 보이나 검시해 보지 않고는 확적히 알 수 없다고 말하였
다. 조사 끝에 이방이 현감께 사연을 아뢰고 현감의 분부를 물어가지고 즉시 검
시 준비를 차리었다. 인명에 관한 중대한 일이라 현감이 친히 관문 밖에 나와서
검시를 하는데, 우선 법물 없이 건검을 시작하였다. 시신을 젖혀놓고 양면을 보
고 엎어놓고 합면을 보니 눈을 뜨고 입을 벌리고 두 손도 벌리고 목에 줄매인
자국이 있고, 심감에서 흉당에 걸쳐서 큰 손바닥 넓이 만큼 살빛이 검붉고 그외
에는 앙면, 합면에 별반 상처가 없었다. 목에 잇는 줄자국이 살에 묻히도록 깊이
박혔으나 목배에 죽은 시신은 아닌 것이 혀가 입 밖에 나오거나 이에 닿지 않고
그대로 놓였고, 줄자국이 푸르거나 붉지 않고 희었다. 치명상은 구경 심감인데
필사, 속사의 심감을 몹시 걷어채였거나 무식하게 얻어맞았거나 한 것이 분명하
였다. 원고도 없고 원척도 없는 이 시신이 혹시 칠장사에서 도적에게 잡혀갔다
는 불상 장인이 아닐까 생각하고 현감은 장방에 있는 칠장사 중 두엇을 데려 내
오라 하여 시신을 보인즉, 어떤 중은 시신을 향하여 합장하며 나무아비타불 찾
고 어떤 중은 현감께 향하여 합장하며 불상장이가 틀림없다고 아뢰었다. 적도에
게 죽은 사람은 면검도 하는 법이라 현감은 인읍 수령에게 복검을 청치 않고 상
사에만 보할 작정하고 시장에 현록을 마친 뒤에 시신을 초빈하여 주라고 이방에
게 본부하고 동헌으로 들어왔다. 현감이 보장을 꾸미려고 책방을 불러서 의논하
는 중에 이방이 급한 걸음으로 들어와서 “홍살문 설주 위에 난데 없는 화살 한
개가 백혀 있솝기에 빼내려다 보온즉 도둑놈의 글발이 살 위에 매에 있솝디다.
” 하고 아뢰고 난 뒤에 “그 글발을 감쪼시게 하옵기가 황송하온데 어찌하오
리까? ” 하고 취품하였다. “글발이란 게 무어란 말이냐? " "안전께 고목한 꼴
이온데 사연이 망유기극이옵니다. ” “그대루 이리 올려라. ” 이방의 바치는
종이쪽과 화살을 급장이와 토인이 손이어 받아 올려서 현감이 화살은 옆에 놓고
종이쪽을 펴서 보니 이방이 고목이라고 말하던 것이 고목이 아니요, 곧 배지다.
첫머리에는 겉봉쓰는 일체로 죽산현감 즉견이라 하고 그 다음에 사연의 대지는
“내가 불상 장인을 쓸데 있어서 칠장사에서 데려가는데 그자가 길에서 도망하
려고 하야 버릇을 가르친다는 것이 죽이게까지 되었노라. 죽인 것은 본의가 아
니라 측은한 마음이 없지 않으므로 장사나 후히 지내주고 싶으나 지금 총총히
회군하는 까닭에 그런 일을 알음할 겨를이 없어서 이 지방의 주인인 현감에게
부탁하니 아무쪼록 장비를 많이 들여서 안장하여 주기 바라노라. ” 한 것이고
끝에는 관함을 두는 것같이 청석골 대두령 임이라고 쓰이어 있었다. 청석골 두
령 임이라니 바로 일전에 안성와서 변을 일으킨 임꺽정이라, 현감은 어이없는
한편에 송구한 마음이 있어서 상사에 신보하는 조장은 즉을 발송하고 송장이나
또 갖다 안길까 겁이 났더지 읍내 각동에 밤으로 순경을 돌리게 하였다.
임꺽정이는 작은 고을 장채를 가지고 근포할 수 없는 대적이라, 현감이 임꺽
정이를 근포시킬 생각은 당초에 염두에도 두지 못하고 도리어 임꺽정이가 읍에
와서 무슨 변이나 내지 아니할가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아무 일 없이 며칠 동
안 지난 뒤에 현감은 생각하기를 살인 흉범이 경내에 들어온 것을 알고 그대로
덮어두면 관성이 좋지 못할 것이라, 꺽정이의 종적이나 탐지하여 보리라 하고
뒤늦게 비롯 장채들을 내놓았다. 현감의 생각이 벌써 색책에 그치니 상탁하부정
으로 장교들은 한층 더 심하여 변변히 돌아다니며 탐문도 하지 않고 입들을 모
아가지고 들어와서 “꺽정이가 경내에 와서는 묵은 형적이 없습디다. ” “안성
서 왔다가 안성으루 도루 간 것 같소이다. ” 하고 안성으로 밀어붙였다. 현감은
칠장사 중들이 살인에 관련 없는 줄도 알고 칠장사 새 불상이 꺽정이와 사제간
이던 백정 중인 줄도 알아서, 중들을 내놓을 때 새 불상을 집어치우라고 이르고
집어치우는 것을 보고 오라고 장교 두엇까지 안동하여 내보냈다. 중들은 관령을
거역할 길이 없어서 백 년 천 년 길이길이 공양할 불상을 새로 뫼신 지 불과 며
칠 만에 들어내는데, 상좌중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중들도 모두 허우룩 섭섭하
여 마음을 지향하지 못하였다. 안동하여 나온 장교들을 후대하여 들여보낸 뒤에
상좌중이 별당 누마루 한구석을 정하게 치우고 들어낸 불상을 남 안보게 뫼셔
두었다.
칠장사 불상을 집어치우게 한 뒤 현감이 백성들에게 칭원을 받고 늙은 어머니
에게 책망을 받아서 속으로 뉘우치는 마음이 없지 않던 중에, 남에 없는 것같이
귀히 아는 외아들 여남은 살 먹은 아이가 어느 날 자다가 잠꼬대로 소리를 지르
고 이내 병이 났었다. 현감의 늙은 어머니가 현감을 보고 “그애 병이 심상치
않은 품이 칠장사 부처님의 동티인 것 같다. 그 부처님이 영검스럽다는데 함부
로 들어내게 했으니 어째 동티가 없겠느냐. 도로 뫼시게 하고 불공을 드려 보았
으면 좋겠다. ” 하고 말하니 현감은 “글쎄요. ” 하고 어머니의 말을 좇으려고
생각하다가 한번 결처한 일을 뒤집는 것이 체모에 손상될 염려가 있어서 “잘했
던 못했던 한번 해논 일을 지금 와서 다시 어떻게 합니까? ” 하고 고쳐 대답하
였다. “부처님을 다시 뫼셔놓으라구 네가 이르기 난중하면 내가 뒤로 사람을
보내서 이르겠다. 그러고 불공을 드릴 때 내가 친히 가서 부처님께 저쑵고 올
테다. ” “불공을 드리라고 사람을 보내시는 건 몰라도 몸소 가실 건 없습니다.
” 내아 대부인 마님의 말씀으로 칠장사의 새 불상을 다시 들어내서 뫼셔놓게
되었다. 부처님의 영검이든지 의약의 효험이든지 또는 병이 절로 날 때가 되었
던지 현감의 아들 병이 공교히 새 불상에 불공 드리던 날부터 낫기 시작하여 며
칠 후에 씻은 듯 부신 듯 다 나았다. 칠장사 새 부처님의 영검스러운 소문이 더
욱 높아서 병 있는 사람은 병 낫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리고 자손 없는 사람은
손 보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려서 한참 당시에는 일년 삼백육십오일에 불공 안
드는 날이 며칠이 안 되었다. 이 영검스러운 부처가 별명이 백정부처니 백정부
처는 지금까지 칠장사에 남아 있다. 백정부처의 몸에 칼자국이 있는데, 중들의
전설을 들으면 어느 때 술취한 양반 한 분이 백정부처를 와서 보고 ‘백정놈의
부처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칼로 찍고 곧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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