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안성, 죽산서는 큰 난리를 만난 것같이 인심이 소동되어서 각처로 피란
가는 사람이 길에 널려서 남부여대하고 가는 것이 남의 눈에 유표할 것이 없지
만, 근 이십 호 칠팔십 명 사람을 일시에 떠나보내는 것이 부질없어서 능통이가
띄엄띄엄 떠나보내는데 꺽정이가 지시하는 혜음령으로 갈 사람은 먼저 떠나고
가까운 메주고개로 갈 사람은 뒤에 떠나게 하였다. 메주고개 갈 사람이 두어 패
떠났을 때 포도군관이 포도군사들을 데리고 강촌까지 나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능통이가 졸개들 떠나는 것을 보느라고 동네에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이 소문을
듣고 바로 집에 들어와서 꺽정이를 보고 “포도군사들이 곧 여길 올는지 모른답
디다. 우리두 어디루 피신해야겠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대체 어디루 갔으
면 좋겠나, 여기서 가까운 데 옮겨앉을 데가 없나? 우리두 메주고개루 갈까? ”
“메주고개는 가근방 인심이 사나와서 재미없습니다. 졸개 아이들처럼 물덤벙
술덤벙 같이 섭쓸려 지내지 못하면 여느 때두 가서 오래 있기가 조심스러운 뎁
니다. ” “그러니 어디루 가면 좋은가? ” “제가 곰곰 생각해 봐야 제 외사촌
에게 가서 얼마 동안 숨겨 달라구 떼를 쓰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은데. ” “
외사촌이 어디 사나? ” “진천 이방 말씀이올시다. ” “이방의 집으로 가자니
섶 지구 불루 들어가잔 말 아닌가. ” “제 생각엔 염려가 없을 듯한데 혹시를
몰라서 좀 주니가 납니다. ” “자네부터 주니를 내면서 우리더러 같이 가자나?
” “저 혼자만 같으면 주니낼 것두 없습니다. ” “사촌형이니까 남과는 다르
겠지. ” “사촌은 말구 친동기라두 사람이 의심스러우면 말씀하겠습니까. ” “
그러면 주니 내는 건 무엇인가? ” “그 사람인 남의 급한 일을 잘 봐주구 남의
일을 봐주려 들면 제 몸이 으스러지는 거두 돌보지 않지만 일이 하두 크니까 꼭
봐주려구 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두 사람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하던 막봉이
가 홀저에 “형님. ” 하고 불러서 꺽정이가 막봉이를 돌아보았다. “형님 혼자
면 지금이라두 청석골을 가실 수 있을 테니 형님은 청석골루 가시구 곽서방은
진천으로 가구 나 혼자만 여기 있게 해 주시우. ” “그건 무슨 소리냐? ” “
나는 지금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까 죽어두 좋지만 형님은 살아가야하우. " "
그것두 네가 말이라구 하느냐? 나 살면 너두 살구, 너 죽으면 나두 죽는 게다.
그 따위가 되지 못한 말은 다시 입밖에두 내지 말아. " 꺽정이가 막봉이를 꾸짖
고 곧 다시 능통이를 돌아보며 "자네는 진천으루 가게. 우리는 여기서 당하는 대
루 당해 보겠네. ” 하고 말하였다. 능통이가 어이없는 모양으로 “그게 말씀이
됩니까? 그럼 저두 안 가구 여기 있겠습니다. ” 하고 말한 뒤, 말을 고쳐서 “
지금 제 생각엔 진천만한 데두 없으니 진천으루 가보십시다. 진천 가서 설혹 낭
패를 본다손치더래두 여기 있느니만 못할 리는 만무합니다. ” 하고 진천 말을
다시 꺼내는 것을 “자네나 갈라면 가게. 우리 말은 더 길게 할 거 없네. ” 하
고 꺽정이가 막잘랐다. 능통이가 꺽정이에게는 다시 말을 못하고 막봉이를 바라
보며 “길두령 생각엔 어떻습니까? 진천은 고만두구 메주고개라두 가는 것이 여
기 있느니보다 낫지 않습니까? ” 하고 의향을 묻는 것같이 말을 붙이니 막봉이
는 능통이의 말대답으로 겨우 고개 한번 끄덕하고 꺽정이를 돌아보며 “형님 진
천으루 갑시다. ” 하고 말하였다.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구 네 맘부터 질정해
라. ” “형님 몸에 혹시 위태한 일이 있을까 봐 진천 이방의 집이 재미 적은데
형님의 나 땜에 여기 있는다구 말씀하니 곽서방 말이 옳지. 진천으루 가는 것이
여기 있느니보다 나면 낫지 못할 거야 무어 있겠소? 진천으로 갑시다. ” “네
가 진천으루 갈테냐? ” “형님 주체궂지만 데려다 주시우. ” 꺽정이가 능통이
를 보고 “여보게, 오늘 밤에 진천으루 가세. ” 하고 말하여 능통이는 한시름
덜린 듯이 좋아하며 “잘됐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진천을 가자면
어디루 가나? ” “안성 대문면으루 내려가서 옥정이고개를 넘어서 바루 진천읍
으루 갈 수두 있구요, 안성땅을 밟지 않구 개자리란 데루 나가서 광혜원을 거쳐
서 진천읍으루 갈 수두 있습니다. ” “자네 요전 갈 때 어느 길루 갔었나? ”
“개자리루 갔었습니다. ” “오늘 밤에두 그 길루 갈 텐가? ” “옥정이루 가
자면 안성땅을 지나가는 게 재미없을 뿐 아니라 고갯길이 험해서 밤길루 갈 수
없습니다. ” “개자리루 가는 데는 길이 험하지 않은가? ” “읍을 지나서 갈
미고개란 데루 가는 길두 있지만요, 칠장사 앞을 지나가는 것이 길두 편하구 염
려두 없습니다. ” “개자리가 칠장사서 몇 리나 되나? ” “칠장사 앞에서 조
금만 더 가면 개울 하나가 나서구 그 개울을 끼구 한참 내려가면
개자리 동네가 나섭니다. ” “거기서는 진천땅이 멀지 않은가? ” “거기가
죽산 진천 어름입니다. 거기 사람이야말루 경기밥 먹구 청홍도 구실한답니다. ”
“진천읍이 여기서 육십 리라지? 아무리 밤길이라두 육십 리야 날새기 전에 가
겠지. ” “외사촌의 큰집은 읍에 있구, 작은집은 읍에서도 한 십 리 떨어져 있
는데 그 작은집이 조용해서 바루 그리 갈 생각입니다. 연전에 저두 그 집에 가
서 피신했습니다. ” “조용한 데루 가는 건 좋지만 주인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 “외사촌이 작은집에 나와서 잘 때가 많지만 만일 큰집에서 자구 나오지 않
았으면 그 작은여편네보구 말하구 들어앉아서 읍으루 기별하지요. ” “진천 형
편을 우린 모르니까 모든 일을 자네 요량해 하게. ” “짐을 한 짝 묶어야 할
텐데 병장기는 어떻게 합니까. 내버리구 가긴 아깝지요. ” “내버리구 가다니,
가지구 가야지. ” “곽두령의 쇠도리깨는 짐에 넣기가 거추장스럽겠는데요. ”
“올 때 넣어가지구 온 긴 상자가 있지. ” “그럼 그 상자에 모두 주워 담지요.
” 능통이가 긴 상자를 갖다놓고 꺽정이 앞에서 짐을 꾸리는데 병장기를 상자
밑에 넣느라고 맨 먼저 곽오주의 쇠도리깨를 집어 들고 “이 도리깨는 도리깨
철현보다 채두 좀 길구 참말 도리깨와 모양두 흡사하니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겁
니까? ” “일 잘한다는 대장쟁이가 보름 동안이나 두구 만든 거라네. ” “이
런 무지스러운 것으루 어린애를 치니 대번에 박살나지 별조 있겠습니까? ” “
금은붙이는 의복 사이에 집어넣게. ” “대체 금은붙이는 무엇에 쓸라구 가지구
오셨습니까? ” “혹시 손쓸 일이 있을는지 몰라서 가지구 온 걸세. ” “준비
성이 많으십니다. ” 능통이가 꺽정이와 이런 수작을 해가며 짐을 다 꾸린 뒤
안방 건넌방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중에 심부름하는 졸개 하나가 밖에서 들어와
서 “남은 아이들은 한꺼번에 떠나보냅지요? ” 하고 능통이에게 취품하였다.
“지금들 떠난다느냐? ” “일찍 저녁들 해먹구 떠나면 좋겠다구 합니다. ” “
그럼 저녁들을 얼른 해먹으라구 하구, 그러구 우리 저녁도 일찍 해라. ” 승석때
남은 졸개 너덧 집을 마저 다 떠나보내고 초저녁에 진천으로들 떠나는데 능통이
가 짐질이 손방이라, 꺽정이는 짐을 지고 길막봉이는 교군을 타고 앞에서 길라
장이 노릇하는 것은 능통이었다.
달골서 밤길로 떠난 일행이 광혜원을 지나올 때부터 달빛을 띠고 빨리 걸어서
날 새기 전에 진천읍에서 십 리 좋이 되는 이방의 작은집을 대어왔다. 삽작 앞
에 와서 발을 멈추자, 벌써 집안에서 개가 야단스럽게 짖었다. 닫아걸린 삽작문
을 몇 번 아니 흔들어서 안방의 문 여는 소리가 나며 “이 개. ” 하고 개를 꾸
짖고 나서 “밖에 누가 왔느냐? ” 하고 해라로 묻는 것이 이방의 목소리였다.
“삽작문 좀 얼른 열어주게. ” 능통이가 말소리를 크게 하지 아니하여 이방은
잘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라 여전히 해라로 “대체 그게 누구냐? ” 하고 소리질
러 물었다. “낼세. ” “내란 게 누구야? ” “달골서 왔네. ” 이방은 그제사
비로소 목소리를 분간하여 능통인 줄 알고 “달골 형님이 왔소? ” 하고 말하더
니 한동안 안방문과 건넌방문 여닫은 소리가 난 뒤에 건넌방에 등잔불이 키이고
계집아이년 하나가 나와서 삽작문을 열어주었다. 능통이가 일행의 앞을 서서 삽
작 안으로 들어오며 지새는 달빛 아래 계집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너 어린
년이지? 그 동안 잘 있었니? ” 하고 알은체하니 아이년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녜. ” 하고 대답하였다. “건넌방에서 누가 자느냐? ” “녜. ” “녜라니 누
가 자느냐구 물었어, 이년아. ” “제가 잡니다. ” “네가 자다나왔으면 지금은
아무두 없지? ” “녜. ” “상주계 건너방으루 건너옵시사구 해라. ” “녜.
” “그년 녜녜 대답 잘한다. ” 능통이가 아이년을 웃은 뒤에 곧 꺽정이를 돌
아보며 “제가 먼저 들어가서 말하구 나올 테니 여기 서서 잠깐만 기다리십시
오. ” 말하고 바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이방이 안방에서 건너와서 능통이를
만나보고 온 곡절을 물을 때 능통이가 꺽정이, 막봉이 데리고 온 사연을 대강
말하고 얼마 동안 숨겨 달라고 청하니 이방은 머리를 송충이 대가리같이 내흔들
었다. “여보게, 자네를 꼭 믿구 데리구 왔네. ” “여보 형님, 나하구 무슨 원수
졌소? ” “그게 무슨 소린가? ” “저승사자를 둘씩이나 끌구 내 집에를 왜 온
단 말이오. 내 집 식구를 다 잡아갈 작정 아니오? ” “여보게, 나는 자네가 이
렇게 겁낼 줄 몰랐네. ” “청석골 도둑놈이 안성서 어디루 갔는지 몰라서 우리
도까지 수선한 판이오. 우리 고을 장교들 요새 읍촌으로 개싸대듯 하우. ” “그
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 “두말 말구 다른 데루 데리구 가시오. ” “지금
좀 있으면 날이 밝을 테니 다른 데루 갈 수 있나. 적어두 오늘 하루는 숨겨 줘
야겠네. ” "하루 숨기는 것두 나중에 소문나면 큰일이오. 형님이 생각이 없이
어쩌자구 내게루 데리구 왔단 말이오. “ ”남의 위급한 일을 도와 줄 만한 사
내다운 사내가 나 아는 사람에는 자네 하나뿐이라, 그래서 자네게루 데리구 왔
네. “ ”형님같이 남의 생각 못하는 이두 나 아는 사람에는 하나뿐이겠소. “
내외 종형제가 마주 서서 말을 서로 주고받고 하는 중에 꺽정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우리를 받지 못하겠다면 가는 게지,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하나?
“ 하고 능통이를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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