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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46)

...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만 십칠 세 이상의... 제국 신민인 남자... 만 십칠 세 이상의... 남자. 그러나 그것은 말하기가 좋아 지원병이지 강제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국민정 신총동원조선연맹'을 통하여 지원병 지원을 권유하였으며, 그 응모를 보다 효과 적으로 권유하기 위하여 설전부대를 조직하고, 지원병 후원회 및 행정력, 경찰력 을 동원하여 계몽선전을 하였는데, 그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지원병에 응모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영문 모를 전장에서 탄알받이 로 죽어갔다. "일본놈들이 볼 때, 조선 사람이 어디 사람같이 뵈겠습니까? 마소보다 더 노동 력이 월등 유효헌 짐승이올시다. 거기다가 조선땅이 그저 병참기지 정도가 아니 에요. 조선 사람 모두가 전력원이 되는 겁니..

혼불 1권 (45)

"저노무 외양깐, 팍 뿌수거 부러라. 체다뵈기도 싫다. 하이고오, 웬수엣 노무 시사앙. 두 눈꾸녁을 이렇게 버언히 뜨고 자빠져서 황소가 끄집혀 가는 것을 체 다만 보고 있었이니... ." 그 남정네의 안사람이 짚북더미 같은 머리에서 꾀죄죄한 수건을 벗겨 내리며 따라서 한숨 쉰다. "글 안허면 어쩔 거이요? 생우 공출이 머 어지 오널 일이간디? 넘 다 당헐 때 는 넘 일인가 싶드니마는 참말로 발 등에 베락 떨어졌소. 인자 이 동네에는 소 새끼라고는 씨알머리도 없응게, 농사 질라면 재 너머로 황소 빌리로 가야겄구만 요." "재 너머에는 무신 소가 남어 있다간디? 거그도 다 진작에 씨가 말러부린 지 오래여... . 이러다가는 조선 팔도에 송아치새끼 씨종자가 멜종을 허고 말 거이 네." "아, 재 너머에 왜 황..

혼불 1권 (44)

그네의 가슴속에는 이 생각이 깊숙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청암부 인은 그때 같지가 않으시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눈에 띄게 초췌하여지는데 다가, 전에 않던 말씀도 힘없이 하시지 않는가. "여보게, 인제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네." 한 번은 부인이 대청마루에 앉아, 붙들이가 마당 쓰는 것을 보며 안서방네에 게 그렇게 탄식하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안서방네는 민망하 여 아무 대답도 못하였지만, 청암부인은 바로 며칠 전에도 이기채를 앞에 하고 또 그 말을 뇌었다. "인제 두고 보아,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니."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반박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마당에 와서 창씨개명이라니, 이기채는 ..

혼불 1권 (43)

"네가, 감히, 누구를." 청암부인은 옆사람에게조차도 들리지 않을 만큼, 숨을 잘라 뱉어내듯이 말했 다. 그러더니 동댕이치듯 머리채를 놓아 버렸다. 아낙이 휘청하며 그만 길바닥으 로 동그라졌다. 아무러면 어린 여인의 힘 때문에 그네가 쓰러졌을까. 아마도 창 졸간에 너무 놀라 얼이 빠진 탓에 그렇게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으리라. "사람이란 엄연히 상하가 있는 법이거늘, 너 이년,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로 누구한테 그런 막된 행실을 하는 게냐. 내, 네년을 단단히 가르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청암부인은 길바닥의 아낙에게 일별을 던지고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한 마디 로 "가자." 하더니, 몸을 돌려 가마에 탔다. 그네가 소복 입고 오는 신행길에 버릇없이 민 촌 아낙을 끌고 와, 마당에 꿇어 엎드리게 해 ..

혼불 1권 (42)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울면서, 마침내 시퍼런 치수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 다. "내가 일찍이 식처곡부의 이야기를 왜 모르겠는가, 아녀자 오륜 행실의 본이 되는 그 사람은 열녀로서 가히 장한 사람이었으니, 내가 그를 따라 목숨을 버리 는 것은 자랑이면 자랑이었지 아무 흉될 것은 없었지만, 그때 내가 기량식의 아 내 못지않은 기구한 형상 중에도 목숨을 버리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은, 오로지 종부였기 때문이었느니라. 내게는 나 홀로 져야 할 책임이 있고 도리가 있었던 게야." 청암부인은 효원의 숙인 이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같은 말을 몇 번씩 하는 것은 듣기에 따라 공치사도 같고 부질없는 일도 같 다마는, 너 또한 책임과 도리가 나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이렇게 새겨들으라 고 자꾸 말하느니, 허나, 처지..

혼불 1권 (41)

"형님, 용단을 내리셔야지 이러고만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 큰 봉변 당하게 됩니다. 그게 어디 종가 한 집에만 닥칠 일인가요? 문중에 서도 대강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는데 형님이 결단을 허십시오. 생각해 보세요. 일본이 어디 쉽게 망헐 나랍니까? 그 사람들 무섭습니다. 허는 짓을 보면 모릅 니까? 요시찰인이 되어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그렇잖어도 총독부에서 위험 분 자는 총검거하라는 검속 명령이 내렸다는데, 공연한 화근을 왜 불러일으킵니까? 그렇기만 헌 것이 아니라, 일전에 고등계 나까지마 주임이 그런 얘길 해요, 곧 징병령이 발표될 거랍니다. 아 왜, 그 육군 특별지원병 모집헐 때도, 조선 청년 들을 모두 강제로 끌어가다시피 허지 않았어요? 끌어가면 끌려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혼불 1권 (40)

8. 바람닫이 며칠 사이에 벌써 여름 기운이 끼친다. 달구어진 햇빛에서 훅 놋쇠 냄새가 난 다. 더위가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덥다가도 한 번씩 비가 쏟아져서, 초 목은 날로 무성하여지고, 집 안팎에는 파리, 모기가 극성이다. 고샅에도 토담 밑 에도 잡초가 검푸르게 우거질 지경으로 농부들은 일손이 바쁘다. 봄보리, 밀, 귀 리를 베어 내고, 논밭에 서로서로 대신하여 번갈아 들면서 김매기를 하느라고, 땀이 흘러 흙이 젖고,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위에서 내리쪼이는 놋쇠 같은 햇 볕 때문에 헉, 헉, 숨이 막힌다. 거기다가 손이 많이 가는 면화밭은 그 공이 몇 배나 더 하여, 호미질을 하고 나면 어깨가 빠지는 것만 같다. 그런 중에도 누우 런 오조 이삭이 어느덧 묵근하게 살이 차고, 청대콩도 익어간다..

혼불 1권 (39)

율촌댁의 머리 속에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효원의 얼굴과 활처럼 휘어지던 그 네의 입술이, 때때로 가슴 밑바닥에서 주먹이 치밀 듯 떠올랐다. 율촌댁이 새파 랗게 노하여 내동댕이친 저고리를 줍던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 그리고 낯색도 변하지 않고 두말없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일찍 등잔불을 끄라고 말한 그날 밤 에 하필이면 반발이라도 하듯이 장 등을 하길래, 그것도 몹시 못마땅하였고, 밤 새껏 지었다는 저고리의 깃궁둥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느질 솜씨가 남달리 좋은 율촌댁은 특별히 날렵하면서도 부드럽게 돌아가는 깃을 잘 달았다. 그래서 율촌댁의 저고리는 우아하였다. 그런데 며느리가 내미는 저고리의 깃궁둥이를 보라지. 안반짝같이 펴져 가지고 넙적한 것이, 발로 바느질을 해도 이만 못할까? 이것이 사람을 업수히 ..

혼불 1권 (38)

효원은 묵묵히 반짇고리에서 저고리를 들어내어 접어 들고 건넌방으로 왔다. 그리고,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하여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한 번 더 숨 을 들이쉰 다음 침착한 손끝으로 동정을 뜯는다. 옷고름을 떼어 내고, 깃을 뜯어 낸다. 놋화로에 잿불을 담아다 놓고 인두와 인두판을 챙기면서, 저고리 모양을 유심히 눈여겨 보아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길이, 품, 화장이야 본래 그대로 하는 것이어서 상관없지만, 어려운 것은 깃과 섶을 다는 일이었다. 깃과 섶의 모 양이 저고리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입은 사람의 멋과 품위를 살려 주는 곳 도 이 부분이다. 그래서 바느질 솜씨가 빼어난 사람은 바로 여기서 한껏 솜씨와 모양을 낸다. 또 성미가 까다롭거나 옷을 곱게 입으려는 사람이 트집을 잡는 부 분도..

혼불 1권 (37)

청암부인은 손에 든 유서를 그대로 움켜쥔 채 체읍을 하고 만다. 부인의 낙루 는 하염없이 옷의 앞섶을 적신다. 한 여인의 심정이 이다지도 사무쳐 애절 원통 하게, 그러나 일목요연하게 씌어진 글월의 한 점 한 획이 어찌 그냥 먹빛으로만 보이리, 그것은 응어리 진 피먹이 삭은 빛깔로 여겨진다. 그러나... 하고, 청암부 인은 이마에 손을 받친다. 그렇게 떠나가실 수 있는 당신은 차라리 복인이십니 다. 같은 운수를 타고나서 혼인한 지 일 년 안에 낭군을 잃은 일은 우리 서로 닮았으나 나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홀홀히 떠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먼저 가신 망부 한 어른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충분히 칭송을 들으 실 일이었습니다. 그뿐이리요. 망혼을 위한 양자를 세워 찬물이라도 떠 놓을 수 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