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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8)

10 무심한 어미, 이제야 두어 자 적는다 여아봉견 거 이십일일은 날도 청명하엿다. 매안역을 출발하야 순천서 일숙하 고 이십이일 오전 십시 득량착 기차로 무사히 집에 도라왓다. 그런데 너의 모친 과 남욱이는 무탈한데 용원이가 이십일부터 알키 시작하엿다는데 그 형상이 대 단 안탁갑게 되엿다. 곳 의사의게 왕진을 청하여 진찰하니 신열이 사삽오도이며 급성폐렴에 늑막염이 겸하였다 한다. 겁이 안 날 수 업서 백방으로 치료하여 십 일일 만에 어제부터 게우 사십도가 넘든 열도 나리고 차차 미음도 마시고 잠도 자기 시작한다. 한참 동안은 대소가가 소동되고 정신이 수수하엿난데 이제는 안 심이다. 조금이라도 걱정은 하지 말어라. 요사이 너의 시조모주 기력은 엇더하시 냐. 좀 차도가 잇스시냐. 궁금하구나. 요사이 용원이 ..

혼불 2권 (7)

청암부인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한참씩 쉬어가며 숨소리로 말했었다. 인월댁 은 아직도 얼굴빛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푸르게 질린 채 듣고만 있었다. 그 말소리와 숨소리 사이에 복숭아 꽃잎이 지는 소리가 들리었던가, 아니었던가. 그 날로부터 이십여 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인월댁은 베틀에 앉아 살아 왔다. 동무 라면 오로지 속으로 나직이 흥얼거리는 베틀가 한 자락. 천상에 놀던 각시가 세상으로 귀양을 왔더라오 배운단 게 질쌈이요 부르나니 베 틀가라 명주 한 필 짜을라니 베틀 놀 데가 전혀 없어 좌우 한편 둘러보니 옥난 간이 비었구나 베틀 놓세 베틀 놓세 옥난간에 베틀 놓세 낮에 짜면 일광단 밤에 짜면 월광단 옥난간에다 베틀 놓고 베틀 몸을 동여매어 베틀 다리는 네 다리요 앞다릴랑 두 다릴랑 동에 동창 배겨 놓..

혼불 2권 (6)

"대상 없는 허공을 향하여 사는 것보다 더 고달픈 일은 없느니... 장애가 디딤돌 되는 일도 있으매, 묶여서 오히려 떠내려 가지 마소. 비록 그 사람이 오늘은 여 기에 없지만 기다리는 마음으로 집을 지키고 있게. 누추하나마 아랫몰에 초가 한 채를 지어 놓았네. 나의 심정으로는 솟을대문에 기와 겹집이라도 얼마든지 지어 주고 싶네만, 떠나간 사람을 생각하여 일부러 저만치 아랫몰에 조촐하게 초가를 지었으니, 과히 섭섭히 여기지는 말게나." 그것은 옳은 처사였을 것이다. 과연 그것을 신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는 모 르겠지만, 열아홉에 신행을 온 인월댁을 앞에 앉히고, 청암부인은 마치 인월댁의 심경을 거울로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인월댁은 그때 하늘보다 높 은 어른 앞이라 고개를 수그린 채 드러내지..

혼불 2권 (5)

"그러매, 저것이 혈이지. 혈." 그런데 지금 그 혈이 마르고 있는 것이다. 인월댁의 피가 마른다. "청암마님 근력은 어떠시든가?" 인월댁은 안서방한테 그것부터 물었다. "실섭을 허셌지요." 안서방은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실섭을... 언제부터..." 인월댁의 목소리가 툭, 꺼져 내렸다. 그 목소리를 따라 안서방의 수그린 고개도 아래쪽으로 무겁게 떨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 인월댁의 얼굴빛이 바 랜다. 그네는 진정을 하려는 것처럼 저고리 소매끝을 손가락으로 오그려 잡는다. "실섭하신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 사날 되능만요." "대서에." 인월댁은 손가락 마디를 짚으며 날짜를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예." "어떻게?" "그날 아침으 누우신 자리서 기양 못 일어나시고 말었답니다. 첨에는 ..

혼불 2권 (4)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허신다는디, 이런 난세에, 내비두어도 물이 없어 말러 죽 어가는 물괴기 조께 건져 먹었다고 설마 호통이야 치겄어? 안 그리여?" 저것은 춘복이 소리다. 평순네는 울컥 억하심정이 치민다. (아무리 그런대도 청 호는 우리 꺼이 아닌디, 거그서 살고 있는 물괴기를 건져다 먹는다먼 도적질이 나 한가지여. 잘허는 짓은 아니라고. 주신다먼 몰르지만... 그래도 어쩔 거이여? 넘들은 다 허는 짓을 나만 발 개고 앉어 있다고 누가 상 주도 안헐 거이고. 아 이고 모르겄다. 덕석말이를 당허먼 모다 같이 당허제 나만 당헐라디야? 그거는 그렇다치고. 아이고메, 저 년놈들은 낯빤대기 두껀 것 좀 바.) 평순네의 마음은 도무지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일은 저 예펜네가 저질렀는디 왜 속은 내 속이 이 렇게..

혼불 2권 (3)

어른의 팔뚝만큼 한 것이 짙은 암청갈색 검은 빛을 띠는 등허리에 가로 한 줄로 무늬가 놓여 있고, 등 지느러미 양쪽으로는 여덟 개의 무늬가 점점이 박혀 있는 가물치의 저 허연 배, 돌이 지난 애기보다 더 무겁고 크고 탄탄한 것 그것은, 평 순네에게는 평생에 한 번만 먹어 보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간절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청호의 물 밑바닥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노닐던 가물치 며 조개바위와 더불어 노니는 물고기는, 붕어새끼 한 마리일지라도 다치지 않는 것이, 이십여 년 동안 문중과 인근 사람들 사이에 말없이 지켜져온 불문율이었 다. 그러니 그 속에서 건져온 가물치라면, 산삼 못지않은 보약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가물치. 평순네는 입에 침이 돌았다. 지금까지 평순이를 비롯하여 연년..

혼불 2권 (2)

"방죽 바닥에 물괴기가 기양 막 드글드글 헙디다. 시커매요. 인자 올농사는 다 틀려 부렀다고요. 가망이 없응게, 일찌감치 넘보다 한 발이라도 얼릉 가서 붕어 새끼 한 소쿠리라도 후딱 건지능 거이 지일이요. 하늘만 체다봐도 말짱 헛심만 씨이는 일잉게." 춘복이가 삼태기를 추스리자 붕어의 미끄럽고 검은 등허리에 관솔 불빛이 기름 비늘처럼 번뜩였다. 우물가의 아낙네들 눈빛도 따라서 번뜩였다. 옹구네는 춘복 이의 삼태기를 탐욕스럽게 넘겨다보더니, 덥석 손을 넣어 한 마리를 잡아 보려 고 한다. "왜 이런데요?" 춘복이가 삼태기를 털어낸다. "하이고오오... 가물치도 있네잉?" 옹구네의 손이 머쓱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간절한 탄식처럼 말꼬리를 뺀다. 그 말꼬리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끈끈하게 묻어났다. 그러나 모..

혼불 2권 (1)

9 베틀가 인월댁은 드디어 북을 놓는다. 그리고 허리를 편다. 두두둑, 허리에서 잔뼈 부 서지는 소리가 나며 갑자기 전신에 힘이 빠진다. 그네는, 오른손 주먹으로 왼쪽 어깨를 힘없이 몇 번 두드려 보다가 허리를 받치고 있는 부테의 끈을 말코에서 벗긴다. 뒷목도 뻣뻣하고 다리도 나무토막처럼 굳어져서 이미 감각이 없는데, 마 치 그네가 베틀에서 내려앉기를 재촉이라도 하려는 듯 닭이 홰를 친다. 벌써 세 홰째 우는 소리가 새벽을 흔든다. 용두머리 위에 놓인 바늘귀만한 등잔불이 닭 이 홰치는 소리에 놀라 까무러치더니, 이윽고 다시 빛을 찾는다. 방바닥으로 내려 앉은 인월댁은 그제서야 허릿골이 빠지는 것처럼 저려와 그대로 무너지듯이 드 러누워 버렸다. 불기 없는 바닥이라 등이 서늘하다. 비록 여름이지만, 늘 이렇..

혼불 1권 (完, 48)

"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이 철딱서니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천하에 쓰잘 데 없는 놈 같으니라고, 네 이놈, 네가 대체 중정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집구 석이 멸문하여 성이 없어지고 문짝에 대못을 치게 생긴 이 마당에, 기껏 네가 하는 일이, 소위 종가의 종손이라는 놈이, 애비는 피가 바트고 뼈가 마르는 마당 에 떠억 버티고 앉아서 허는 말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음악을 공부하러 일본으 로 가야겄습니다? 허허, 집구석이 망헐라면 대들보가 먼저 내려앉는다더니, 일본 놈 창씨개명 나무랄 거 하나도 없구나아, 하나도 없어, 아니 내 집구석에서 내 자식놈이 먼저 항허느라고, 제가 자청해서 풍각쟁이가 되겠다니, 성시가 있으면 무얼 허며 가문이 있으면 무얼 헐 것이냐? 아이고, 아주 너한테는 잘되어 버렸 구..

혼불 1권 (47)

이기채는 검은 가방 쪽으로는 힐끗 한 번 눈을 주다가 말고 강모에게 다그치 듯 묻는다. 말끝이 툭 떨어지며 잘리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기색이다. 그의 기색 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마의 주름과 좁혀진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은 날이 서 있었다. 강모는 그런 이기채에게 얼른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 강모의 바랜 듯한 낯빛이 더욱 바래는 것 같더니 "저... ." 하고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어 버린다. 이기채는 채근하는 대신 강모를 쏘아본 다. 그 눈길에 얼핏 붉은 핏발이 돋는다. 번뜩 화광이 비치는 것 같다. 그는 금 방 터지려는 무엇인가를 지그시 눌러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디 하는 양 을 좀 보자, 하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아버지한테 좀 뵈드리려고요." 강모는 이기채 앞쪽으로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