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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38)

효원은 묵묵히 반짇고리에서 저고리를 들어내어 접어 들고 건넌방으로 왔다. 그리고,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하여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한 번 더 숨 을 들이쉰 다음 침착한 손끝으로 동정을 뜯는다. 옷고름을 떼어 내고, 깃을 뜯어 낸다. 놋화로에 잿불을 담아다 놓고 인두와 인두판을 챙기면서, 저고리 모양을 유심히 눈여겨 보아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길이, 품, 화장이야 본래 그대로 하는 것이어서 상관없지만, 어려운 것은 깃과 섶을 다는 일이었다. 깃과 섶의 모 양이 저고리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입은 사람의 멋과 품위를 살려 주는 곳 도 이 부분이다. 그래서 바느질 솜씨가 빼어난 사람은 바로 여기서 한껏 솜씨와 모양을 낸다. 또 성미가 까다롭거나 옷을 곱게 입으려는 사람이 트집을 잡는 부 분도..

혼불 1권 (37)

청암부인은 손에 든 유서를 그대로 움켜쥔 채 체읍을 하고 만다. 부인의 낙루 는 하염없이 옷의 앞섶을 적신다. 한 여인의 심정이 이다지도 사무쳐 애절 원통 하게, 그러나 일목요연하게 씌어진 글월의 한 점 한 획이 어찌 그냥 먹빛으로만 보이리, 그것은 응어리 진 피먹이 삭은 빛깔로 여겨진다. 그러나... 하고, 청암부 인은 이마에 손을 받친다. 그렇게 떠나가실 수 있는 당신은 차라리 복인이십니 다. 같은 운수를 타고나서 혼인한 지 일 년 안에 낭군을 잃은 일은 우리 서로 닮았으나 나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홀홀히 떠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먼저 가신 망부 한 어른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충분히 칭송을 들으 실 일이었습니다. 그뿐이리요. 망혼을 위한 양자를 세워 찬물이라도 떠 놓을 수 잇게..

혼불 1권 (36)

고금 천지간 세상에 일 죄인 죄첩은 이 몸의 일천 가지 근심과 일 만 가지 한 되는 회포를 가져, 감히 당돌히 시아자바님 두 분 전에 이 한 말삼을 아뢰오니, 엎디어 비옵건대 슬피 불쌍히 여기시고 자세히 살피시압소서. 죄첩 부부의 일로써 두 아자바님께 부탁하올까 하와, 찬만번 애걸 간청하오니, 두 아자바님의 관후, 우애, 심덕으로써 죄첩 부부의 참혹하고 칙은한 정경을 구 비 두루 살피시압소서. 걷우어 주시고 저바리지 않으실까 하와 천만 바래옵고 믿사와 심곡에 있난 말쌈 아뢰압나이다. 죄첩의 연치 이십일 세에 성혼을 하오매 소천의 연치 또한 이십 세이오니, 피 차 상득하와 백년을 해로하올까 태산같이 믿삽고 탐탐 귀중하오나, 다맛 심중에 일층 처참하온 심사 없지 않아 하옴은, 실로 구고 아니 계시와 북당이 ..

혼불 1권 (35)

말하는 문장의 눈에는 석양의 붉은 해가 지고 있는 노적봉 봉우리가 황토흙빛 의 북망산처럼만 여겨진다. 그 흙빛에 눈물이 축축하다. "어허 참, 사람의 한평생이 살었달 것이 없느니, 이러고 옹기종기 앉었다가도 숨 거두고 나면 그뿐이라. 그저 흙덩이 부수어지듯 먼지로 흩어지고 마는 것을, 그래도 살었다고 노심허고 초사하여 마음이 타도록 시달리는 것이 어찌 생각해 도 허망한 일 아닌가. 어허어... . 자식 먼저 죽는 것까지 보고 죽으려고 그렇게 버티었던 말인가." "그럴라니 그렇지, 이 세상에 상배한 이 그 한 사람 아닐 터인데, 어찌 그리 남 다른 세상을 살다 가는고." "사람이 났다 죽을 때는 이름을 남기든지 공적을 남기든지 무슨 표시라도 있 어야 그 허망함을 좀 덜어 볼 것인데, 이렇게 한세상을 차디찬..

혼불 1권 (34)

그는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큰사랑에 사람들과 앉아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 문득 목에 가래가 막힌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 말이 어떻게나 숨이 끊어지게 간절한지, 듣는 사람은 정말로 그가 준의 장가를 들이고 나면 그 대로 절명할 것처럼 느껴졌다. 종가의 운수가 그러니, 문중도 따라서 빈한하여지 고 말았다. 그래도 한 삼백 석은 하던 종가의 농토는 어느덧 모조리 탕진되어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안방의 장롱에 그렇게도 그악스러울 만큼 모아들이던 패 물 장식은 홍씨부인과 함께 사라져, 말 그대로 집안은 귀 떨어진 빈 농짝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그 재산이 홍씨부인의 치장으로 다 소모된 것 만은 아니라고도 하였다. 지붕의 이엉 이을 볏단조차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썩은 지붕을 몇..

혼불 1권 (33)

그들은 혀까지 찼다. 그만큼 이미 시부와 흥씨부인의 일은 비밀도 아니었으며, 두 사람은 각각 조금도 자기를 감추지 않은 채 성질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시부는 날이 갈수록 집안 일이나 흥씨부인에 대하여 점점 더 무심해지고, 때로 는 무심을 지나쳐 이상한 증오의 심정을 품기도 하였다. 그는 차갑고 음산한 사 람으로 변해갔다. 물론 한 해 농사 소작미가 들고 나는 것이나 집안 살림, 그리 고 종토 같은 것에 마음을 둘 리가 없었다. 재취 한씨부인 생전에도 이미 절반 이상이나 축이 났던 가산은, 부인의 사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줄어들기만 하 였다. 관리하는 사람이 정신을 모으지 않으니, 손가락 사이로 물이 새 나가는 것 처럼 언제인지 모르게 살림은 기울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삼취 홍씨부인이 들 어오고 ..

혼불 1권 (32)

결국 설진영은 창씨개명을 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그 자신은 대성통곡을 하며 큰 돌을 끌어안고 우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가 조상에게 사죄하며 비장하게 죽어간 이야기는 바람같이 빠르게 퍼져 매안에까지 날아왔던 것이다. 청암부인은 가슴에 맷돌짝을 얹은 것처럼 심신이 무거워 일어서지도 못한다. 이 것이 어떻게 지켜 내려온 종가냐. 어떻게 지켜 내려온... . "이제는 도리가 없어요. 굳이 미우라니 야마구찌니 하지않고도 이본 정도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씨의 근본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도 되니까요. 김촌이라 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 왜놈들이 언제 성씨나 제대로 있었습니까? 겨우 명치유신 이후에야 귀족 아닌 서민들도 성을 가지게 된 거지요. 그래서 밭 가운데 산다고 전중 다나까, 대나무 아래 산다고..

혼불 1권 (31)

7. 흔들리는 바람 "창씨라니, 도채체 그게 무슨 말인가? 대관절 무얼 어떻게 한다는 게야?" 청암부인의 목소리는 노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방안에 앉은 기채와 기표는 책상다리를 한 발바닥을 쓸고만 있다. 이기채는 흰 버선발이고, 기표는 엷은 회 색 양말을 신었다. 기표는 그 차림까지도 양복이다. 하기야 문중에서 맨 먼저 상 투를 자른 사람이 기표였고 보면, 그의 저고리가 단추가 여섯 개씩이나 달린 양 복으로 바뀌고, 신발이 숭숭 뚫린 구멍에 검정 끈을 이리저리 꿰어 잡아당겨서 묶어 매는 구두로 바뀐 것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이제 오히려 기표 의 그런 모습은 당당하기까지 하고, 그 나름대로 차림이 몸에 익어, 보는 사람의 눈에도 익숙해져 버린 터였다. 이기채는 그런 기표와 달리, 아직도 두루..

혼불 1권 (30)

"좀 먹어 두게. 이따가 폐백 드릴라면 힘들고 기운 빠지네. 한 술 들어, 안 먹 히더라도." 한 부인이 친절하게 숟가락을 쥐어 주었으나, 그네는 힘없이 상 위에 놓고 말 았다. "옷을 갈아입어야지." 아무래도 신부가 음식을 먹지 못하리라고 짐작한 부인은 상을 물리게 하고, 효원에게 폐백차림을 지시한다. 폐백을 드릴 시간이 된 것이다. 대실에서부터 따 라온 수모와 하님이 벗기고 입히고 꾸미는 대로 내맡기고 있던 효원은 대청마루 의 폐백상 앞에서 다시 한 번 크게 가슴을 내려앉았다. 흥겹고 다홍 비단이 덮 인 폐백상 위에 대추와 편포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 시부모가 나란히 앉아 있었 다. 이기채는 대실 초례청에서 얼핏이나마 보았으나 율촌댁은 초면이다. 율촌댁 이 효원을 놀라게 한 것이다. 남색 치마에 연두색..

혼불 1권 (29)

"나는 아무래도 동경으로 가야겠소." 강모는 신행 오던 날 밤이 늦어서야 마지못한 듯 건넌방으로 들어와 효원의 맞은편에 다리를 개고 앉더니, 양 무릎에 주먹 쥔 손을 올려 놓고 눈을 약간 내 리뜬 채 말했다. 마치 외어 온 구절을 낭독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어 어색하였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린가. 효원은 마음이 철렁하여 강모를 또바로 바라보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단지, 무슨 동경에 가고 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곳에 숨겨진 속뜻이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한 일이오." 강모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대실에 가기 전에 할머니께서도 허락을 하셨소." 허락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강조한 뒤에 "얼마가 걸릴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니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