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800

혼불 1권 (28)

"아퍼? 아아직 멀었네." 이번에는 좀더 세게 내려친다. "으아." 장난으로 그러는 것이련만 발바닥이 얼얼하며 복숭아뼈까지 저린다. "허허어. 이러언 엄살 좀 보라지. 이래 가지고 어찌 무슨 용기로 남의 규방에 는 침범을 했던고오?" 다시 홍두깨가 발바닥을 친다. 철썩 따악. 내려치는 홍두깨와 강모의 비명, 사람들의 농담과 터지는 웃음 소리들은 박자 라도 맞추듯이 함께 어우러지며 촛불에 일룽거린다. "자네 감히 허씨 문중을 넘보았겄다? 우리가 그렇게 울도 담도 없이 허술한 줄 알았던고?" "거기다가 자네 어쩌자고 인제서야 얼굴을 내미는가? 일각이 여삼추라고, 날만 새면 동구밖에 무슨 기척이라도 있는가, 있는 목, 없는 목 다 뽑아 올리고 내다 보며 학수고대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자네 그간 어디 가서 ..

혼불 1권 (27)

"온 세상에... .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구려." "다래머리의 사방 높이 넓이가 가히 한 자를 넘었었데." "지금이라고 왜 그런 일이 없으리? 그 이름만 다래다, 자수다, 바뀌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로 과잉하게 마음이 쏟아져 걷잡지 못하게 사치를 하는 것은 변함 없을 것이다. 집이든, 의복이든, 금패든, 사치를 하기로 들면야 어떻게 감당하겠 느냐?" "그런데 형님, 이렇게 베갯모에 학이나 수놓고 목단문 보자기에 꽃송이나 피우 는데도, 자수가 어찌 재산을 탕진시키리까? 색실 몇 올이 무에 그리 큰 재산이 든다고." 용원은 수를 놓고 있던 베갯모에 바늘을 꽂으며 물었다. "금실 은실을 써 보아라. 탕진은 눈 깜짝할 사이지. 그래서 고려 정종 9년 사 월에, 금중외남녀 금수소금 용봉문 능라의복이라하여, ..

혼불 1권 (26)

(저것들이 아마 합궁도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는 근심이 두 내외의 표정과 분위기에서 역력히 느껴질수록 효원은 더욱더, 모든 일이 순탄한 듯 꾸미고 있어야 했다. 정씨부인인들, 아무리 여식이라 하나, 그것을 발설하여 효원에게 곧바로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신방에서는 무사하였느냐?" 고작 그렇게 물을 수밖에 다른 말은 차마 더 하지 못하였다. 그럴 때, 효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수그리면 되었다. 그저 미루어 짐작하시라는 표시다. "긴히 쓰일 일이 있으리라." 신방에 드는 효원을 따라 들어왔던 정씨부인은 원앙금침의 호화로운 자리밑에 서리처럼 하얀 삼팔주 수건을 고이 넣어 주었다. 중국에서 나던 귀한 명주를 무 엇에 쓰라고 어머니가 손수 거기 접어 넣어 두는지 효원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이 발갛게 ..

혼불 1권 (25)

6. 홀로 보는 푸른 등불 효원의 방에는 아직 불이 밝혀져 있다. 청암부인이 율촌댁과 함께 거처하는 큰방의 등불은 한식경 전에 꺼지고, 잠시 후에 사랑채의 큰사랑에 불이 꺼졌다. 그러니, 이제 안채의 큰방과 대청마루 하나를 사이에 둔 효원의 건넌방에 불이 꺼질 차례인 것이다. 웃어른의 방에 불이 꺼지기 전, 그 아랫사람들이 먼저 불을 끄고 잠들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순서를 지키는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율촌댁이 이 댁으로 시집와서 건넌방에 든 그날로부터 이날까지 하루도 어김없이 지켜져 온 일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만, 그것은 감히 누가 깨뜨릴 수 없는 불문율처럼 위엄있게 밤마다 행하여졌다. 율촌댁은 효원이 신행을 오기 며칠 전에, 좋은 날을 받아 청암부인이 거처하는 안방..

혼불 1권 (24)

"어머니." 아까 구로정에서부터는 거의 내닫다시피하여 냇물을 건너고, 날아가듯 중뜸 고샅에 이르자 숨이 턱에 닿았는데, 집의 대문, 중문을 들어서면서는 자기도 모 르게 큰 소리로 토하듯이 어머니를 먼저 부른다. 건넌방 문이 열리며 율촌댁이 내다본다. "?" 강모는 순간 의아하였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면 어머니가 저리 한가롭게 건넌방에 계실 리가 있는가... ,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어서 오너라." 목소리에 반가움이 피어난다. 그러고 보니 집안 또한 우환이 있는 집 같지 않 고 평온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강모는 우선 댓돌 위에 구두를 벗는다. 율 촌책은 강모가 마루로 올라서기를 기다려 큰방 문을 먼저 연다. "어머님, 강모 왔습니다." "오냐." 청암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강모는 다..

혼불 1권 (23)

"여인네가 공명심이 저리 많아서." "지맥을 건드려 공연한 동티가 나면 어쩔 것인가?" "이 난리 안 쳐도 지금까지 농사 못하지는 않었네." "과숙의 몸으로 이날까지 모은 재산, 남 보라고 호기롭게 한 번 써 보자는 것 일 테지." "농토나 더 늘릴 일이지." "이제 보게. 빚 지고 말 것세." 구로정에 모이거나 사랑에 마주앉으면 그런 뒷공론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 것은 이웃 동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까닭없이 어수선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른아홉이면 아직도 중년도 여인인데, 그네가 열아홉에 빈 집으로 신행 온 지 만 이십 년, 그 사이에 이루어 놓은 그네의 치부에 내심 기가 눌린 탓도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종부는 하늘이 내리시는가, 저렇도록 큰일을 아낙의 몸으로 일으키다니. 우리 같은..

혼불 1권 (22)

"지금껏 아무 일 없이 몇 백 년을 살아왔는데, 대대로 조상께서도 안하신 일을 어머니께서 왜 시작하려 하십니까?" 청암부인은 웃었다. "그보다 더 몇 백 년 전에는 저 방죽마저도 없었느니라. 그냥 민틋헌 산기슭이 었지."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가요?" "누군가 거기 처음으로 지맥을 끊고 삽을 댄 사람이 있었겠지. 그 사람도 몇 백 년 세월 동안 아무도 안한 일을, 조상께서도 안한 일을 했을 것이니라." "그렇지만 어머니, 선대 어르신네분께서 이 마을에 저수지 필요한 일을 왜 모 르셨겠습니까? 뜻이 있어도 일의 절차가 그만큼 어려우니, 손을 못 대신 게 아 닐까요." "쉬운 일은 아니다." "살던 집터의 울타리만 고칠려고 하여도 계획이 서야 시작을 하는 것이온데, 하물며 그런 큰 일을 어떻게 어머니 혼자서..

혼불 1권 (21)

"아, 종항간이면 그게 다 친형제 한가지 아닌가. 더군다나 객지에서 저희 어린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지, 전주만 해도 그것이 도성이라, 인심이며 습속이 여기허고는 천양지판일 텐데 멋데로 둘 수는 없지. 아무리 두 살밖에는 차이가 안 난다 하더라도 오뉴월 하루 햇볕이 어디냐는 말도 있잖어. 클 적에 두 살이 란 참 큰 것이지. 강태 그놈의 나이 아직 어려도 총명해 놔서 강모가 함께 있으면 의지가 되고말고." 이기채는 그렇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이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짐을 챙기고 있는 안서방을 불러 전주행을 나서자고 말한 사람은 청암 부인이었다. "아무래도 내 좀 다녀와야겄다." 놀란 것은 이기채였다. "어머니, 날씨도 칩고, 길이 멉니다." "이 사람아, 가마를 타고 남원도 ..

혼불 1권 (20)

강모는 구석구석 읽어내려 가다가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것은 불안을 데불고 몰아쳐온 흥분이 벅찼기 대문이었다. 미지의 세계와 하나의 가능성, 그리 고 이미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가문의 피가 상충하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동경음악학교 본교 동경시 하곡구 상야공원 서북 성선 상야 북구 하차 1정 전화 하곡 83-5563번 일본 유일의 관립음악학교로서 문부성 직할 전문학교이다. 창립은 명치 12년 문부성 음악취괘라고 부르는 명칭으로 동경 본향에 있으며... . 1. 학과 예과 1년 종료, 본과 3년 종료 본과: 성악부, 기악부, 작곡부 갑종사범과: 3년 종료 중등교원 양성 연구과 선과 을종사범과 2. 입학자격 예과는 중학교 또는 고등여학교 제4학년 수료자, 고등학교 심상학과 수료자 전검합격자 등 그리고..

혼불 1권 (19)

... 일요일은 울적하다. 잠도 아니 오는... 죽음이 그대를 끌어 간 그곳에, 조그만 하얀 꽃 그대를 깨우지는 못할 것이니... 울음이 그치게 하여라... 나는 즐거웁게 죽음으로 나아갈 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리라... 죽음은 꿈이 아니리... 죽음에서 내 너를 어루만지리... . 음울하고 적막한 곡조의 음률이었다. 그것은 불길하기조차 하였다. 깊은 구렁 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오히려 그 절망과 어우러들어 평온을 맛보는 듯 도 하였다. 구체적인 무엇에 대한 절망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 절망의 암담한 녹에 침윤당하여 푸른 듯 회색인 듯 무채색인 듯, 색조조차 삭아 버린 그 음색 들. 그러면서도 그 음색으로부터 달아나게 하기보다는 하염없이 그 색깔에 녹슬 고 싶어지는 곡조. 녹슬어서 마음이 놓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