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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20)

강모는 구석구석 읽어내려 가다가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것은 불안을 데불고 몰아쳐온 흥분이 벅찼기 대문이었다. 미지의 세계와 하나의 가능성, 그리 고 이미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가문의 피가 상충하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동경음악학교 본교 동경시 하곡구 상야공원 서북 성선 상야 북구 하차 1정 전화 하곡 83-5563번 일본 유일의 관립음악학교로서 문부성 직할 전문학교이다. 창립은 명치 12년 문부성 음악취괘라고 부르는 명칭으로 동경 본향에 있으며... . 1. 학과 예과 1년 종료, 본과 3년 종료 본과: 성악부, 기악부, 작곡부 갑종사범과: 3년 종료 중등교원 양성 연구과 선과 을종사범과 2. 입학자격 예과는 중학교 또는 고등여학교 제4학년 수료자, 고등학교 심상학과 수료자 전검합격자 등 그리고..

혼불 1권 (19)

... 일요일은 울적하다. 잠도 아니 오는... 죽음이 그대를 끌어 간 그곳에, 조그만 하얀 꽃 그대를 깨우지는 못할 것이니... 울음이 그치게 하여라... 나는 즐거웁게 죽음으로 나아갈 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리라... 죽음은 꿈이 아니리... 죽음에서 내 너를 어루만지리... . 음울하고 적막한 곡조의 음률이었다. 그것은 불길하기조차 하였다. 깊은 구렁 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오히려 그 절망과 어우러들어 평온을 맛보는 듯 도 하였다. 구체적인 무엇에 대한 절망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 절망의 암담한 녹에 침윤당하여 푸른 듯 회색인 듯 무채색인 듯, 색조조차 삭아 버린 그 음색 들. 그러면서도 그 음색으로부터 달아나게 하기보다는 하염없이 그 색깔에 녹슬 고 싶어지는 곡조. 녹슬어서 마음이 놓이는 ..

혼불 1권 (18)

5. 암담한 일요일 "흥, 애국금자탑?" 강태는 차락 차락 소리를 내며 넘기던 책장 한 끝에 눈을 박고는 비웃음을 날 린다. 음성 끝이 꼬여서 뒤집힌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애국이란 말이야? 쓸개 빠진 놈들." "뉘 쓸개요?" 침 뱉는 목소리를 받아 강모가 묻는다. "이 따위 책을 만드는 놈과,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지." "뭔데 그래?" "아주, 고직구(고딕)로 제목을 뽑았어요." 이것 봐라, 이것 봐. 내던지듯 강모의 턱밑까지 치켜올려 들이대 준 책의 첫머리에는, 아닌 게 아 니라 시꺼멓고 굵은 글씨로 제목을 삼아 "애국금자탑" 이라 박혀 있고, 이어서 부제로 "총후의 반도 헌금 삼백만원" 이라고 붙어 있었다. "총후... 라니?" "후방도 전선이라는 말 아니냐?" "그래, 조선 반도에서 소위 애..

혼불 1권 (17)

"다 분복대로 사는 것이지요."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그런 게 아니야. 옛말에도 있듯이, 무는 개를 돌아보고, 우는 애기 젖 준다고, 사람 스스로가 자기 일을 경영해야지 어디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누워 있는다고 감이 떨어지는가?" "감을 욕심내지 않으면 마음이 초조헐 것도 없지요." "허허어, 이 사람 말허는 것 좀 보아. 동복의 삼형제가 각각이 다 다르니 무슨 속을 터놓고 어디다 무슨 말을 헐 수가 있어? 꿍꿍 앓드래도 나 혼자만 답답헐 밖에." 기응은 묵묵히 일손을 놀리고 기표는 뒷짐을 진 채로 서성거렸다. "밖에서 이러면 안에서나 기민해야지. 이건 안팎이 쌍으로 똑같은 성품이니."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거나, 마당에서 덕석을 말아올리는 기응의 뒷 등을 바라보며 기표는 혀..

혼불 1권 (16)

"씨? 씨가 머이간디? 일월성신이 한 자리 뫼야 앉어서 콩 개리고 팥 개리디끼 너는 양반 종자, 너는 쌍놈 종자, 소쿠리다가 갈러 놓간디? 그리 갖꼬는 땅 우에 다가 모 붓는 거여? 그렁 것도 아닌디, 사람들이 이리저리 갈러 놓고는 양반은 양반노릇 허고, 쌍놈은 쎄가 빠지고 안 그러요? 그거이 머언 씨 탓이라요?" "그래도 그렁 거이 아니다. 다 전상에 죄가 많아서 이승에 와. 갚고 갈라고 이 고상을 안허냐. 속에서 치민 대로 말을 다 헐라면, 쌔바닥이 칭칭 필로 갱겨 있 드라도 다 못 풀제잉. 바깥으로 풀어내면 일도 안되고 화만 부르능 거잉게에 속 으다 또아리를 지어서 담어 놔라. 인자 이러고 참고 살자먼 이담에 존 시상도 오겄지." 공배는 담배 연기를 풀썩 뱉어낸다. 연기의 그늘이 얼굴에 어룽거리다가..

혼불 1권 (15)

"새참이요오." 논배미 저쪽에서 붙들이가 목청을 돋운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일 어서며, 고개를 앞뒤로 돌려 보기도 하고 어깨를 뒤로 젖혀 보기도 하면서 두렁 쪽으로 나간다. 모두들 반가운 기색이다. 안서방네가, 담살이 붙들이를 데리고 바우네와 더불어 내온 새참 광주리 주변에 하나씩 둘씩 모여 앉은 남정네와 아 낙네들은, 생각난 듯, 배가 출출해옴을 느낀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도, 이렇게 새참 광주리를 보면 한꺼번에 허기가 지는 것이다. "그나저나, 새서방님 말이여, 그러다가 대실 새아씨도 인월마님짝 나능 거 아 닝가 모르겄어." 옹구네는 아까 하려다가 미처 못한 말을 논에서 나오며 평순네에게 한다. 그 네는 한 번 하고 싶었던 말을 결코 참는 법이 없었다. "아이고, 벨 소리를 다..

혼불 1권 (14)

"위태위태한 일이로다." 결국, 어른 중의 노인 한 분이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근심은, 훗날, 그대로 들어맞고 말았다. "인력이 지극하면, 천재를 면하나니... ." 청암부인이 사무치게 뼈에 새겼던 그 말은, 어찌 보면 사실 인력을 다하지 않 았던 시부에 대한 명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디... ." 옹구네가 목에 걸었던 무명 수건 자락으로 이마를 훔치며 평순네를 향하여 말 소리를 낮춘다. 평순네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다. 이제 해는 어느덕 중천으로 떠오르고, 들판에 엎드린 사람들의 낯빛도 발갛게 대추같이 익어간다. 평순네의 이마에도 땀이 번질거린다. 옹구네나 평순네는 모두 매안의 아랫몰 물 건너, 한 식경이나 벗어난 골짜기 거멍굴에 살고 있는 아낙네들로, 놉이라 할 것도 없..

혼불 1권 (13)

과수댁은 더듬더듬 말했었다. 문중에서는, 박씨부인의 탈상이 있고는 바로 재 취를 맞이할 절차로 분주했다고 한다. 종부 없는 종가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청암부인의 시부는 쉽게 재취를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한 풀 꺾인 듯한, 힘 없는 모습으로 서안 앞에 앉아 있거나, 기껏 멀리 출입한다고 해도 그저 삼계석문 옆 정자 구로정 정도밖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 는 누구와 별로 말도 나누는 것 같지 않았고, 말을 나눈다 하여도 의례적인 몇 마디가 고작이었다. 그런 날이 하루 가고 이틀 가며 어느 결에 한 삭 두 삭 지 나고, 어언 해가 바뀌었으나, 그의 침중함은 더욱 깊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빛이 가시어 안색이 창백한 얼굴과 육덕이 깎인 그의 어깨는 점점 각이 지기 ..

혼불 1권 (12)

4. 사월령 비가 흐뭇하게 온 끝에 볕이 나서, 일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하였다. 모내기 를 하기에는 짜 맞춘 것 같은 날씨이다. 겨울이 끝나고 해토가 시작되면서 겨우 내 얼어 붙었던 땅은 서서히 녹아 내리고 추위에 굳은 흙이 그 살을 풀었다. 그 러고는 엊그제 가래질을 했던 듯싶은데, 벌써 골짜기마다 뻐꾸기 소리가 한창인 것이다. 뻐꾸기가 한 번 울면 진달래가 피어나고, 또 한 번 울면 버들잎이 피어 났다. 그 새 소리에 눈짓하며 꽃들이 진다. 종달이도 명랑하게 지저귄다. 건 듯 바람이 소리와 함께 싣고 들판으로 불어오건만, 논에 엎드린 사람들은 등이 따 갑다. 들판에는 못줄이 색동 헝겊을 달고 금을 긋는다. 사람들은 허옇게 엎드려 못줄에 맞추어 나란히 모를 심고 있다. 바람에 헝겊의 색색깔이 팔락거..

혼불 1권 (11)

"그러고오." 기응은 다시 말머리를 잡는다. "할머님도 이제는 연만허시다. 어른이 몸소 생산은 못하셨지마는 아드님이라도 손이 많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 하나를 독자로 두었을 뿐이니 마음에 근심이 크실 게 아니냐. 네 위로 누이가 둘이 있었다고 하나, 작은누이는 그렇게 실없이 일찍 죽어 버리고, 큰누리 강련이만 해도 온전타 허기는 어려운 사람... . 집안 내력이 이러고 보니, 네가 아직 나이는 어리다만 어른 노릇을 해야 할 처지다. 그저 종가집이 흥해야 문중도 흥허는 법,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백 리라고 네 한 몸이 너 하나의 몸만은 아닌 것이다. 어쨌든지, 이번 일은 할머님 말씀대로 해라. 아, 그러고 할머님이나 네 아버님이나 모두 손자도 기달리시는데, 네가 그 소원을 풀어 드려야지, 안 그러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