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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61) -채만식-

두 양주는 다 같이 어색한 대로 반색을 하면서 승재를 맞는다. 그래 싸움하던 것은 어느덧 싹 씻은 듯이 어디로 가고 이렇게 천연을 부리니 싱거운 건 승재다. 그냥 말로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틀거리가 아니고, 철그덕 따악 살림까지 쳐부수는 게, 이 싸움 졸연찮은가 보다고 그만 엉겁결에 툭 튀어들었던 것인데, 이건 요술을 부렸는지 싹 씻은 듯이 하나도 그런 내색은 없고 둘이 다 흔연하게 인사를 하니 다뿍 긴장해서 납뛴 이편이 점직할 지경이다. “거 어째 그리 볼 수가 없나? 이리 좀 앉게그려…… 거 원…….” 정주사는 연방 흠선을 피운다는 양이나 끙끙거리고 쩔맨다. “좋습니다. 곧 가야 하겠어서…… 형주랑 병주랑 그새 학교엔 잘 다니나요” 승재는 이런 인사엣말을 하면서 정주사네 양주와 가게 안을 둘러본다. ..

<R/B> 탁류 (60) -채만식-

병주는 콧물이 배꼽이나 닿게 주욱 빠져 내린 채 히잉히잉 하고 섰다. 매는 맞았어도 이짐은 도리어 더 났다. “이 소리가 어디서!” 유씨는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돌아서면서 엄포를 한다. 병주는 히잉 소리를 조금만 작게 낸다. “저 코, 풀지 못할 테냐” “히잉.” “아, 저놈이!” “히잉.” “네에라 이!” 유씨가 도로 쫓아오려고 하니까 병주는 손가락으로 코를 풀어서 한 가닥은 가게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손은 옷에다가 쓰윽 씻는다. “학교를 갔다 오믄, 공부는 한 자두 않는 놈의 자식이 소갈머리만 생겨서, 이짐이나 쓰구…….” “히잉.” “군것질이나 육장 하러 들구…….” “히잉.” “공부를 잘해야 인제 자라서 벌어먹구 살지!” “히잉.” “그따위루 공분 않구서, 못된 버릇만 느는 놈이 무엇이 될 것이야!..

<R/B> 탁류 (59) -채만식-

“정주사!” 넋을 놓고 행길 가운데 우두커니 섰는데 누가 마수 없이 어깨를 짚으면서 공중에서 부른다. 고개를 한참 쳐들어야 얼굴이 보이는 ‘전봇대’다. 키가 대중없이 길대서 ‘전봇대’라는 별명이 생긴 같은 하바꾼이다. “……무얼 그렇게 보구 계시우? 갑시다.” 하바에 총만 놓지 않으면 아무라도 그네는 사이가 다정한 법이다. 단 한 모퉁이를 동행할망정 뒤에 처지면 같이 가자고 하는 게 인사다. “가세.” 정주사는 내키잖게 옆을 붙어 선다. 키가 허리께밖에는 안 닿는다. 뒤에서 따라오던 한패가 재미있다고 웃어도 모른다. “정주사 오늘 괜찮었지” “말두 말게나!” “괜히 우는 소릴…… 아까 내해두 오십 전 먹구서…….” “그래두 한 장하구 반이나 펐네! 거 원 재수가…….” “당찮은 소리!…… 그런 소린 작작..

<R/B> 탁류 (58) -채만식-

또, 그새까지는 네가 박제호의 첩으로 있었지만, 나는 독신이니까 인제부터는 버젓한 정실 노릇을 할 뿐더러 어린것도 사생자라는 패를 떼게 되지 않느냐. 형보는 간간 담배도 피워 가면서 한 마디씩 두 마디씩 넉장으로 뜅기고 앉았고, 초봉이는 자는 송희 옆에 두 무릎을 깍짓손으로 껴안고 모로 앉아 형보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냥 그러고만 있다. 그렇게 하기를 한 식경은 한 뒤다. “오-냐! 네 원대루, 네 계집 노릇 해주마. 그렇지만…….” 초봉이는 마침내, 모로 앉았던 몸을 돌려 윗목의 형보한테로 꼿꼿이 고개를 두른다. 물론 마음먹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지, 무슨 졸리다 못해 나오는 대답인 것은 아니었었다. 승낙이 내리자 형보는 좋아라고 그러잖아도 큰 입이 더 크게 째지면서, 아무렴 그래야 옳지야고 진작 그럴..

<R/B> 탁류 (57) -채만식-

목에서 시뻘건 선지피라도 쏟아져 나오도록 부르짖어 백천 말로 저주를 해도 시원할 것 같잖던 분노와 원한이건만, 다직 몇 마디를 못 해서 부질없이 설움이 복받쳐올라, 처음 그다지 기승스럽던 악은 넋두리로 화하다가 필경 울음이 터지고 만다. 제호는 쫓기듯 휭하게 대문께로 나가고, 형보는 배웅삼아 그 뒤를 아그죽아그죽 따른다. “어 참, 대단 죄송스럽습니다!” 대문간에서 형보는 무엇이 어쩌니 죄송하다는 것도 없으면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한다. “아, 아닙니다. 원 천만에!” 뒤도 안 돌아다보고 씽씽 나가던 제호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이내 달아나 버린다. 제호는 시원했다. 형보도 시원했다. 둘이 다 시원했다. 초봉이는 방문턱에 엎드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흑흑 서럽게 느껴 운다. 송희는 자지러..

<R/B> 탁류 (56) -채만식-

말을 마지막 잘라서 하고 난 제호는 이어 몸을 움직여 대뜰로 내려갈 자세를 갖는다. 인제 할 말도 다 했거니와 볼일도 없으니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객꾼인 걸 더 충그리고 있을 며리가 없지 않으냐 이렇게 생각하면 자리가 열적기라니, 기다란 몸뚱이를 어떻게 건사할 바를 모르겠었다.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선뜻 발길을 떼어 놓잔즉, 그것은 더구나 점직해서 할 수가 없었다. 짜장 초봉이더러는 검다 희단 말 한마디 않고서 코 벤 돼지처럼 이대로 휭하니 달아나자니 원 천하게 열적기란 다시 없는 짓이다. 여태 가까이 두고 제가 탐탁해서 데리고 살던 계집인 걸 비록 요새로 들어 안팎 켯속이 다 파탈은 날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한데 마침 처분하기 십상 좋은 계제는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아무려면 남보다 갑절이나..

<R/B> 탁류 (55) -채만식-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저 계집의 정조의 경도(硬度)를 시험해 보지도 않고서, 그의 정조도 얼굴 생김새와 같이 점수가 높으려니 믿었던--믿고 안 믿고 할 여부도 없이--의심 한 번 해보지도 않은 제호 제 자신이 소갈머리없는 등신 같기도 했다. “어 참, 그렇게 하룻밤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형보는 제호의 낯꽃이 변한 것을 보고, 오냐 일은 잘 되어 간다고 좋아하면서, “……그것두 참 다아 인연이라구 할는지, 공교롭다고 할는지…… 아, 어린것 하나가 생겼습니다그려!…… 바루 저게 그거지요.” 형보는 고갯짓을 해서 뒤를 가리킨다. 어린아이 송희가 형보의 혈육이라는 것도 제호가 듣기에는 의외엣 소식이었었다. 그러나 곧 그도 그럴 법하다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자 또, 작년에 초봉이가 ×..

<R/B> 탁류 (54) -채만식-

“그건 그렇거니와, 그런데 복상께서두 아시겠지만, 그 사람이 어 참, 그런 참, 비명횡사를 하잖었겠습니까” “듣자니 참 그랬다더군요!” “네에…… 그런데, 실상인즉 그 사람이 진작부터두 자살!…… 자살을 헐 양으루 맘을 먹구 있었습니다, 결혼하기 그저언부터 그랬지요.” “네에! 건 어째” “역시 다아 아시다시피, 은행돈 그 조간이죠. 그게 발각이 나서 수갑을 차, 징역을 살어, 하자면 챙피할 테니깐, 여망 없는 세상, 치소받고 사느니 깨끗이 죽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죠. 혹간 징역이란 말만 해두 후울훌 뛰었으니깐요.” 제호는 속으로 흥! 하고 싶은 것을, “네에!” 하고 대꾸한다. 유유하게 결혼까지 할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결심했다는 건 종작없는 소리같이 미덥지가 않던 것이다. “그래서 어 참, 그렇게 자..

<R/B> 탁류 (52) -채만식-

“그래, 할 말이라는 게 겨우 그거더냐” 초봉이는 시쁘듬하게 형보를 내려다본다. “그렇다. 그러니깐, 어서 기저귀 뭉뚱그려서 들쳐 업구 날 따라나서거라.” “괜히 허튼 수작 하지 말구 냉큼 나가. 저엉 그렇게 추근거리다가는 순사 불러 댈 테니…… 무슨 권한으루다가 남의 집 내정에 들어와설랑은 되잖은 소릴 지껄이는 게냐? 법 무서운 줄두 모르구서…….” “법? 흐흐 법” 형보는 저야 기가 막히다고 상을 흐트린다. “……법? 그거 좋지! 그럼 그렇게 허까? 내라두 가서 순사라두 우선 불러오라느냐? 순사 세워놓구 담판하게” “무척 순사가 네 편역 들어줄 줄 알았더냐” “이 애 초봉아! 아니껍다! 내가 순사가 무서울 배면 이러구서 네게 오질 않는다. 불러올 테거던 불러오느라, 가택침입죄루다 이십구 일 구류밖에 ..

<R/B> 탁류 (51) -채만식-

인제는 그러므로 켯속이 갈리느냐 안 갈리느냐가 아니라 갈리기는 꼭 갈리고야 말게만 되었은즉, 그럴 바이면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라도 자, 사실이 약시 이만저만하고 이만저만한데, 또 너와는 더 지내기도 싫어졌고 겸하여 너도 나와 살 맛이 덜한 눈치고 하니, 그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라서자꾸나, 이렇게 이르고 일어서면 그만인 것이다. 사실 당장 그랬으면 싶고, 또 그리하자면 노상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영 다급하면 몰라도 애초에 나이 어린 계집애를, 더구나 의리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동향 친구의 자식을 살자고 살자고 꾀어서 오늘날까지 데리고 살다가, 속이야 어떻게 생겼든 겉으로는 그다지 탈잡을 무엇이 없는 걸 그처럼 헌신짝 벗어 내던지듯 괄시를 하기는 두 뼘이나 되는 낯을 들고 좀체로 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