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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52) -채만식-

“그래, 할 말이라는 게 겨우 그거더냐” 초봉이는 시쁘듬하게 형보를 내려다본다. “그렇다. 그러니깐, 어서 기저귀 뭉뚱그려서 들쳐 업구 날 따라나서거라.” “괜히 허튼 수작 하지 말구 냉큼 나가. 저엉 그렇게 추근거리다가는 순사 불러 댈 테니…… 무슨 권한으루다가 남의 집 내정에 들어와설랑은 되잖은 소릴 지껄이는 게냐? 법 무서운 줄두 모르구서…….” “법? 흐흐 법” 형보는 저야 기가 막히다고 상을 흐트린다. “……법? 그거 좋지! 그럼 그렇게 허까? 내라두 가서 순사라두 우선 불러오라느냐? 순사 세워놓구 담판하게” “무척 순사가 네 편역 들어줄 줄 알았더냐” “이 애 초봉아! 아니껍다! 내가 순사가 무서울 배면 이러구서 네게 오질 않는다. 불러올 테거던 불러오느라, 가택침입죄루다 이십구 일 구류밖에 ..

<R/B> 탁류 (51) -채만식-

인제는 그러므로 켯속이 갈리느냐 안 갈리느냐가 아니라 갈리기는 꼭 갈리고야 말게만 되었은즉, 그럴 바이면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라도 자, 사실이 약시 이만저만하고 이만저만한데, 또 너와는 더 지내기도 싫어졌고 겸하여 너도 나와 살 맛이 덜한 눈치고 하니, 그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라서자꾸나, 이렇게 이르고 일어서면 그만인 것이다. 사실 당장 그랬으면 싶고, 또 그리하자면 노상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영 다급하면 몰라도 애초에 나이 어린 계집애를, 더구나 의리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동향 친구의 자식을 살자고 살자고 꾀어서 오늘날까지 데리고 살다가, 속이야 어떻게 생겼든 겉으로는 그다지 탈잡을 무엇이 없는 걸 그처럼 헌신짝 벗어 내던지듯 괄시를 하기는 두 뼘이나 되는 낯을 들고 좀체로 못 ..

<R/B> 탁류 (50) -채만식-

밤이면 십자군의 계집인 듯이 정조 무장을 하기가 일쑤요, 그렇지 않으면 마지못해서 계집 노릇을 한다는 것이 청루의 계집보다 더 싱겁다. 밤이 적이 서늘해서 겨우 잠자기 좋을 만하면, 어린것 감기 든다고 앞뒷문을 처닫는다. 한밤중이고 새벽녘이고, 옆에서 어린것이 빼액빽 울어 단잠을 깨놓는다. 그럴지라도 그게 내 자식이라면 귀엽고 소중한 맛에 그래저래 견딘다지만, 이건 생판 남의 자식을 가지고 그 성화를 받는단 말이다. 그런데다가 한술 더 떠서 아침에 조반상을 받고 앉으면, “우리 송희 민적을 어서 어떻게 해야지!” 이런 소리를 내놓는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그래도 좋게 무어라고 어물어물하면, 실상 또 윤희와 이혼이 되지 않았으니 별수가 없기도 하지만, 되레 암상을 내가지고 들볶곤 한다. 그런 날..

<R/B> 탁류 (49) -채만식-

초봉이는 이렇게도 들이 조지는 무서운 고통이라고는 일찍이 상상도 못 했었다. 배를 눌러 터뜨린다든지, 몽둥이로 팬다든지, 어디를 잡아 찢는다든지 하더라도, 가령 배가 터지면 터졌지, 한번 터진 다음에는 오히려 아픔이 덜리고 후련할 텐데, 이건 쭌득이 누르는 채 조금도 늦추지 않고 끝없이 계속이 되니 견디는 수가 없었다. 눈이 뒤집히고 정신이 아찔아찔하여, 옆에서 의사와 간호부와 제호가 무어라고 떠들기는 하나 알아들을 경황이 없었다. 옹골진 속은 있어,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으나 그래도 으응 소리가 이빨 새로 새어 나온다. 위로 제왕을 비롯하여 아래로 행려병 사망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소치는, 적어도 그 절반은, 그가 모체로부터 세상을 나올 때에 모체가 받은 절대의 고통과 결..

<R/B> 탁류 (48) -채만식-

제호는 선뜻 부엌에 있는 개숫물통을 통째 집어 들고 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초봉이는 보니, 정신을 놓고 펼쳐 누워 숨도 쉬는 둥 마는 둥 확실히 위태해 보였다. 대체 무얼 먹었는가 하고 둘러보다가 방바닥에 두 개 남아 있는 교갑을 집어 뽑아 보고는 ×××인 줄 알고서, 그래도 조금은 안심을 했다. 혹시 ‘맥(麥)×’이나 먹지 않았나 해서 은근히 더 걱정을 하고 왔던 참이다. 많이 토했는지, 식모가 걸레로 훔쳐 낸 방바닥에 아직도 그래도 흥건히 괴어 있는 걸 보고 개숫물도 퍼먹이지 않고 맥만 짚고 앉아서 의사가 오기를 기다린다. 매우 초조하게 기다린 지 이십 분쯤 해서 S가 간호부까지 데리고 달려들었다. 우선 막상 몰라 위 세척을 하기는 했으나, 역시 토할 것은 토하고 흡수될 놈은 흡수되고 했기 때문에 그..

<R/B> 탁류 (47) -채만식-

‘그러면 일을 장차 어떡하나’ 미장이의 비비송곳같이 천착을 한 끝에는 애가 밭아 이렇게 자문을 하는 것이나 역시 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고, 되레 더 무서운 골로 궁리는 빠져들어가던 것이다. 비록 석 달밖에 안 된 생명이지만, 그렇더라도 그걸 밟아 죽이는 것이 죄로 갈 짓은 죄로 갈 짓이나, 뒷일을 두루 각다분찮게 하자면 역시 낳지 마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쳤을 때 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두려워도 차라리 그 두려움을 취하고 싶었다. 더욱이 제호가 임신을 한 눈치를 챌까 봐서 애가 쓰였다. 그래 더구나 ××면 ××를 진작 시켜 버리든지 해야겠다고 초초히 결심을 하고 말았다. 하나 그렇게 결심은 했어도 그놈을 시행하자니 또한 어려운 고패여서, 섬뻑 손이 대지지가 않았다. 그리..

<R/B> 탁류 (46) -채만식-

수돗세, 전등세, 식모 월급 다 치더라도 십 원이 채 못 될 것이고, 반찬거리라야 제호의 밥상을 어설프지 않게 하기로 하더라도 한 달에 이십 원이면 족할 것이고. 그런즉 오십 원에서 이십 원이나, 잘하면 이십오 원씩은 남을 것이니 그놈을 친정으로 내려보내 주리라. 종차야 제호더러라도 다 설파하게 될 값에, 우선 얼마 동안은 친정 권솔들을 먹여 살려라 어째라 하기도 실상 무엇하고 하니 아예 그렇게 하는 편이 옳겠다. (그래서 미상불 그 다음달, 그러니까 칠월 보름에 가서 보니, 조략히 쓴 보람도 있겠지만 돈이 이십 원하고도 몇 원이 남았었다. 곧 친정으로 내려보냈을 것이로되, 그 동안 편지가 온 것을 보면 아직은 제가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그다지 옹색지 않은 눈치여서 그대로 꽁꽁 아껴 두었었다.) 두웅둥..

<R/B> 탁류 (45) -채만식-

그래서 아무려나 입맛이 날 리가 없고, 야리게 퍼준 밥 한 공기를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하다가 상을 물렸다. 아직까지도 맥주만 들이켜고 있던 제호가 생 성화를 하면서 더 먹으라고 야단야단한다. 초봉이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을 마지못해 많이 먹었노라고 대답을 해주고서, 방 머리께 유리창 밖에다가 베란다 본으로 꾸며 논 자리로 옮아 앉았다. 바깥 풍경은 들 가운데 양옥과 화식집들이 드문드문 놓이고 들에는 모를 심은 논과 보리를 베어낸 밭이 있을 뿐, 퍽 단조했다. 그래도 시원한 등의자에 편안히 걸터앉아 보는 데 없이 벌판을 바라보면서, 막막한 생각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제호는 한 시간이나 걸리다시피 밥상머리에 주저앉아 시중 드는 하녀와 구수하니 지껄이면서 맥주를 다섯 병이나 집어 먹고, 밥도 여러 공기 ..

<R/B> 탁류 (44) -채만식-

초봉이는 그제야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서니까, 한 여자가 냉큼 가죽 슬리퍼를 집어다가 꿇어 앉으면서 바로 발부리 앞에 놓아 준다. 초봉이는 제발 이러지 말아 주었으면 하여 딱해 못 견딘다. 제호는 보니, 짐을 들고 앞선 여자의 뒤를 따라 이층 층계로 올라가고 있다. 초봉이는 이런 집에서는 목간도 이층에다가 만들어 놓았나 보다고 더욱 신기했으나, 자꾸만 이렇게 둔전거리다가는 촌뜨기 처접을 타지 싶어 얼핏 제호를 따라 올라갔다. 이층으로 올라가서 양탄자를 깐 복도를 한참 가노라니깐 앞서 가던 하녀가 한 방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문을 열어 주는데, 널따란 다다미방이다. 초봉이는 팔조를 모르니, 그냥 넓은 줄만 알 뿐이다. 하녀가 뒤로 따라 들어와서는 비단 방석을 두 개 마주 놓아 주고, 시원하라고 앞 유리창..

<R/B> 탁류 (43) -채만식-

맑은 햇볕이 차창으로 쬐어 들어, 좌석의 고운 남빛 우단을 더욱 해맑게 드러낸다. 몇 되지 않는 손님들은 제각기 남을 상관 않고 한가로이 앉아 신문을 읽거나 담배를 피운다. “자아, 이것 좀 먹으라구…….” 제호는 사과 하나를 꺼내고서 과실 바구니를 통째로 내맡긴다. “……어서 아무거던지 꺼내 먹어요. 자, 칼두 여기 있구.” 제호는 조끼 주머니를 뒤져서 칼을 꺼내 초봉이를 주고는, 저는 손바닥으로 쓱쓱 문대는 둥 마는둥, “난 머…….” 하더니 그대로 덤쑥 베어 문다. “지가 벳겨 드리께 인 주세요!” 초봉이는, 제호의 털털한 짓이 저 보기에야 유쾌했지만 다른 자리의 점잖은 손님들이 볼까 봐서 민망했다. “괜찮어, 괜찮어…….” 제호는 볼퉁이를 불룩불룩하면서 연신 손을 내젓는다. “……이놈 사과는 껍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