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16

혼불 7권 (32)

바싹 눈을 구멍에 들이대고 유심히 유심히 방안을 더듬어 보자니까, 어두워서 무엇이 보여야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사람 형상 분명헌 것이 나란히 누워는 있지만, 자세히는 안 보여. 방안에 자던 사람이 무심코 눈을 뜨고 보았더라면 놀라서 소리를 지르드레, 먹장 같은 어둠 속 문짝에서 시어머니 눈알만 번들번들, 용을 쓰고 기어이 이 비밀 실마리를 캐내고 말겠다는 눈빛이니 그랬겄지, 그 눈에 불을 쓰고 살펴보았더니만, 이건 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네. 이게 웬일이라냐. 며느리는 자기 품에 전실자식을 안고 자고, 제 자식을 내팽개쳐 문간에서 꼬부린 잠을 자고 있지 않는가. 그걸 누가 믿어? "내가 잘못 봤을 테지. 바꿔 봤을 테지." 허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절대로 잘못 본 것이 아니었어. 몇 번이나 고..

혼불 7권 (31)

어느 하루 아무 까닭도 없이 앓기 시작하던 애기엄마가 끝내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구나.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한하리요. "니가 인제 나중에 얼마나 울라고 그렇게 웃냐." 귀신이 시기를 했던 모양이지. 그래서 옛날부텀도 복이 너무 차면 쏟아진다고, 항상 어느 한 구석은 허름한 듯 부족한 듯 모자라게 두어야 한다 했니라. 천석꾼 만석꾼 부잣집에서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대궐마냥 덩실하니 짓는 거야 당연할 일이겠지만, 대문만은 집채 규모에 당치않게 허술하거나 아담 조그맣게 세웠고, 작명을 할 때 또한 사방 팔방이 복으로만 복으로만 숨통이 막힐 만큼 꽉 차게 짓지는 않는단다. 지나치면 터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든. 그리서 부부 금슬이 유난히 좋아 떨어질 줄을 모르면 예전 어른..

혼불 7권 (30)

9. 암눈비앗  일월성신 천지신명이시여. 이런 세상이 있으리이까. 귀신은 밝으시어 모르는 일 없다 하옵더이다. 내 어찌 살리이까. 내 이제 어찌 살아야 하오리아까.  세상에 나서 집 바깥이라고는 동네 새암터에도 나가 본 일 없으리만큼, 살구나무 토담 안에 숨은 듯 있는 듯 감추어져, 아침 이내 아지랑이 아옥하게 어리는 숨결로 자라온 작은아씨, 지나가는 눈빛조차 함부로 쏘이지 않은 부들의 속털같이 여리고 가벼웁고 흰 몸 애기씨, 가장 멀리 간 나들이라면 오로지 대문 밖 한울타리나 다름 없었던 큰집이 다였던 강실이는, 지금 비 먹은 구름이 달빛을 무겁게 삼킨 음 이월 밤의 명치끝이 결리어 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 가슴뼈 아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 명치. 명문이라고도 하고 심와라고도 하는 이 급소..

혼불 7권 (29)

만동이 백단이는 죽은 사람 멩당 쓰니라고 애썼지만, 나는 산 사람 멩당을 시방 썼제. 좌춘복이 우강실이로 내가 청룡 백호를 삼고, 인자 두고 봐라, 우리 집 안방 아랫목이 연화도수 멩당자리 꽃 벌디끼 벌어지게 허고 말 거잉게. 내 손아구 양손에다 동아줄 칭칭 매서. 내 허란 대로 느그는 살 수밖이 없도록이 맨들고 말랑게. 그럴라고 내가, 지 발로 걸어나가는 시앗을 꽃가매 태우디끼 등짝에 다 뫼셔서 업어온 거이여. 시앗? 그렇제. 시앗이제. 니가 내 서방인디, 저년은 시앗이제 그럼. 비록 느그가 찬물 갖춰 육리 올리고 귀영머리 마주 푼대도 순서는 순서여. 나는 절대로 내 밥 안 뺏길 텡게. 춘복이 너, 열 지집 거나리는 것은 내가 너를 호걸로 쳐서 바 준다고 해도, 내 밥그릇에 밥 덜어낼 생각은 꿈에도 허..

혼불 7권 (28)

이고 졌던 짐을 내려 멜빵을 풀어 놓은 황아장수는 때묻은 버선짝을 뽑아 벗으며,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할 사람이라, 비스듬히 바람벽에 등을 기댄다. "사람도 그러까?" 강실이를 눕히던 옹구네가 혼자말처럼 물었다. "사람?" "긍게 사램이, 바가지만 헝 거이여어 못헝 거이여?" "자다가 봉창을 뚫네. 아 왜 사람을 느닷없이 바가지다가 댄당가?" "사람은 아매 그만 못헐 거이요. 더 헌 사람도 있을랑가는 모리겄지만. 못헌 사램이 더 많제." "뚱딴지맹이로... " "비탈진 까끄막에 독밭을 매도 한 해 두 해 일 년 이 년 세월이 가먼, 티 고르고 까시 고르고 정이 드는 거인디, 사람은, 어저께끄장 너냐 나냐, 어저께가 머이여 한숨 전에 아까막새끄장 세상에 다시없이 이뻐라고, 보듬고..

혼불 7권 (27)

8. 납치  못마땅하게 세운 무릎에 두 팔을 거칠게 감아 깍지를 낀 채 삐딱하니 틀고 앉은 옹구네가, 깎은눈으로 춘복이를 꼬아본다. 바지직, 바지직, 무명씨 기름 등잔불에 까물어지는 얼룩이 피멍인지 그림자인지 시꺼멓게 뭉쳐서, 온 낯바닥이 맞어 죽은 귀신 모양으로 터지고 헝클어진 춘복이는 짐승 앓는 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데, 옹구네는 농막으로 내달려올 때의 기세와는 달리, 지게 문짝 문간 윗목에 오똑하니 앉아, 그러는 양을 바라볼 뿐이다. 마음이 있어도 손을 쓸 수가 없는 탓이었다. 에라이, 더러운 년의 팔짜야. 아무도 안 보는 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옹구네는 지난번에 강실이 업어오던 생각을 한다. 참내, 내가 아무리이 아무리 근본 없는 불상년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껍데기만 둘러썼제 어디 사램이..

혼불 7권 (26)

"이 몰골을 봇시오. 금지옥엽 귀허디 귀하게 외씨 보손에 볼받어 신고, 방안으서만 앉은 걸음 선 걸음 놓던 발로 단 십리, 단 오리 길을 걸을 수가 있으며, 성헌 몸도 아닌디 병든 몸으로 이리 비척 저리 비척 어느 하가에 목적헌 디를 당도헐 수가 있겄능교? 거그다가 시방 경색이 되야 부렀는디. 사방이 맥헤 갖꼬숨통조차 안 열링만, 어서 어디로든 들으가 바늘로 좀 손구락 발구락 같은 디를 따야 안허겄소?" 황아장수는 그만 제 숨통까지 막힐 지경이어서, 숫제 그냥 다시 원뜸 종가댁으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게 당황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비단도 지고 다니지만, 온갖 잡살뱅이 자질구레한 물건을 등에다 지고 다니면서 등뼈가 굳은 아낙의 산전수전 눈치로, 이번 일이 도무지 예삿일..

혼불 7권 (25)

7. 푸른 발톱  밤이 더욱 깊어진 한고비, 안서방네가 보퉁이를 보듬고 주춤주춤 뒤따르는 고샅길은, 발부리로 더듬어 간신히 한 걸음씩 나갈 만큼 어두웠다. 구름만 두텁지 않았으면 달이 있는 밤이라 이보다는 걷기에 나았을 것이지만 오늘 밤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비 먹은 구름이 스산하게 두꺼웠다. "작은아씨." 어둠 속에서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부르며 보퉁이를 건네준다. 이제는 강실이 혼자 가야 한다. 묵묵히 그것을 받아드는 강실이 손이 검불처럼 힘이 없어 휘청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다. 이 기운으로 어뜨케 단 한 발이나마 낯선 넘의 길을 디디시꼬잉. "부디 몸조심 허시기요." 업어다 디릴 수만 있다먼 얼매나 좋으까. 천리라도 만리라도 내가 따러갈 수만 있는 형편이라먼, 산을 넘고 물을 건네도 내가 ..

혼불 7권 (24)

"이것은 치마 저고리 각각 두 감씩 든 것이고, 이것은." 보퉁이를 안서방네 앞으로 밀며 효원은 아까 가락지와 향갑 노리개를 싸두었던 붉은 비단 보자기를 보퉁이 위에 얹는다. "펴보면 아실 것이네. 누구 눈에 안 띄게 얼른 갖다 드리게." 안서방네는 그러나 그 보퉁이와 보자기에 손을 못 댄다. 심중이 시방 오죽허시리요. 아매 아거이 당신 혼수로 갖고 오신 옷감 패물들잉게빈디, 덤뿍 덜어서 띠여 주시능갑다. 범연허신 새아씨, 시앗을 보먼 질가에 돌부체도 돌아앉는다등만, 도량아 하해와 같드래도 이런 꼴 당허고는 속 안 씨릴 수 없을 거인디, 이것 저것 속상헌 흉허물은 다 덮어 부리시고 우선 사람 살리울 일부터 앞세워 생각하기가 어찌 쉬울꼬. 아이고, 내가 당최 송구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겄구나. "긴요하게..

혼불 7권 (23)

6. 내 다시 오거든  방이 깊어 효원은 윗목 반닫이 속에 깊숙이 넣어둔 상자를 꺼낸다. 대접의 주둥이를 서로 맞물려 포개 놓은 것만한 이 상자는 , 마치 제사에 쓸 밤을 친 것 같은 모양인에, 윗면과 바닥면은 편편히 깎이고 배는 볼록 나왔다가 다시 아래로 홀쭉하니 빨려 들어간 팔각형이었다. 몸통의 사다리꼴 면면마다 가위표로 복판을 갈라 쪽빛 당홍 노랑 녹색 종이를 바르고, 그 한가운데 청 홍 황의 삼색 빛깔 굽이치는 태극모양이며 검은 날개 당초문처럼 펼친 박쥐를 정교하게 오려 붙인 상자는, 곽종이로 만든 것이다. 효원이 그 상자 뚜껑을 열자, 연분홍 갑사 바른 안쪽이 볼그롬한 뺨을 수줍게 드러낸다. 아른아른 비치는 무늬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다. "상자는 겉모습도 예뻐야 하지만, 열어서 안쪽이 고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