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23

혼불 7권 (29)

만동이 백단이는 죽은 사람 멩당 쓰니라고 애썼지만, 나는 산 사람 멩당을 시방 썼제. 좌춘복이 우강실이로 내가 청룡 백호를 삼고, 인자 두고 봐라, 우리 집 안방 아랫목이 연화도수 멩당자리 꽃 벌디끼 벌어지게 허고 말 거잉게. 내 손아구 양손에다 동아줄 칭칭 매서. 내 허란 대로 느그는 살 수밖이 없도록이 맨들고 말랑게. 그럴라고 내가, 지 발로 걸어나가는 시앗을 꽃가매 태우디끼 등짝에 다 뫼셔서 업어온 거이여. 시앗? 그렇제. 시앗이제. 니가 내 서방인디, 저년은 시앗이제 그럼. 비록 느그가 찬물 갖춰 육리 올리고 귀영머리 마주 푼대도 순서는 순서여. 나는 절대로 내 밥 안 뺏길 텡게. 춘복이 너, 열 지집 거나리는 것은 내가 너를 호걸로 쳐서 바 준다고 해도, 내 밥그릇에 밥 덜어낼 생각은 꿈에도 허..

혼불 7권 (28)

이고 졌던 짐을 내려 멜빵을 풀어 놓은 황아장수는 때묻은 버선짝을 뽑아 벗으며,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할 사람이라, 비스듬히 바람벽에 등을 기댄다. "사람도 그러까?" 강실이를 눕히던 옹구네가 혼자말처럼 물었다. "사람?" "긍게 사램이, 바가지만 헝 거이여어 못헝 거이여?" "자다가 봉창을 뚫네. 아 왜 사람을 느닷없이 바가지다가 댄당가?" "사람은 아매 그만 못헐 거이요. 더 헌 사람도 있을랑가는 모리겄지만. 못헌 사램이 더 많제." "뚱딴지맹이로... " "비탈진 까끄막에 독밭을 매도 한 해 두 해 일 년 이 년 세월이 가먼, 티 고르고 까시 고르고 정이 드는 거인디, 사람은, 어저께끄장 너냐 나냐, 어저께가 머이여 한숨 전에 아까막새끄장 세상에 다시없이 이뻐라고, 보듬고..

혼불 7권 (27)

8. 납치  못마땅하게 세운 무릎에 두 팔을 거칠게 감아 깍지를 낀 채 삐딱하니 틀고 앉은 옹구네가, 깎은눈으로 춘복이를 꼬아본다. 바지직, 바지직, 무명씨 기름 등잔불에 까물어지는 얼룩이 피멍인지 그림자인지 시꺼멓게 뭉쳐서, 온 낯바닥이 맞어 죽은 귀신 모양으로 터지고 헝클어진 춘복이는 짐승 앓는 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데, 옹구네는 농막으로 내달려올 때의 기세와는 달리, 지게 문짝 문간 윗목에 오똑하니 앉아, 그러는 양을 바라볼 뿐이다. 마음이 있어도 손을 쓸 수가 없는 탓이었다. 에라이, 더러운 년의 팔짜야. 아무도 안 보는 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옹구네는 지난번에 강실이 업어오던 생각을 한다. 참내, 내가 아무리이 아무리 근본 없는 불상년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껍데기만 둘러썼제 어디 사램이..

혼불 7권 (26)

"이 몰골을 봇시오. 금지옥엽 귀허디 귀하게 외씨 보손에 볼받어 신고, 방안으서만 앉은 걸음 선 걸음 놓던 발로 단 십리, 단 오리 길을 걸을 수가 있으며, 성헌 몸도 아닌디 병든 몸으로 이리 비척 저리 비척 어느 하가에 목적헌 디를 당도헐 수가 있겄능교? 거그다가 시방 경색이 되야 부렀는디. 사방이 맥헤 갖꼬숨통조차 안 열링만, 어서 어디로든 들으가 바늘로 좀 손구락 발구락 같은 디를 따야 안허겄소?" 황아장수는 그만 제 숨통까지 막힐 지경이어서, 숫제 그냥 다시 원뜸 종가댁으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게 당황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비단도 지고 다니지만, 온갖 잡살뱅이 자질구레한 물건을 등에다 지고 다니면서 등뼈가 굳은 아낙의 산전수전 눈치로, 이번 일이 도무지 예삿일..

혼불 7권 (25)

7. 푸른 발톱  밤이 더욱 깊어진 한고비, 안서방네가 보퉁이를 보듬고 주춤주춤 뒤따르는 고샅길은, 발부리로 더듬어 간신히 한 걸음씩 나갈 만큼 어두웠다. 구름만 두텁지 않았으면 달이 있는 밤이라 이보다는 걷기에 나았을 것이지만 오늘 밤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비 먹은 구름이 스산하게 두꺼웠다. "작은아씨." 어둠 속에서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부르며 보퉁이를 건네준다. 이제는 강실이 혼자 가야 한다. 묵묵히 그것을 받아드는 강실이 손이 검불처럼 힘이 없어 휘청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다. 이 기운으로 어뜨케 단 한 발이나마 낯선 넘의 길을 디디시꼬잉. "부디 몸조심 허시기요." 업어다 디릴 수만 있다먼 얼매나 좋으까. 천리라도 만리라도 내가 따러갈 수만 있는 형편이라먼, 산을 넘고 물을 건네도 내가 ..

혼불 7권 (24)

"이것은 치마 저고리 각각 두 감씩 든 것이고, 이것은." 보퉁이를 안서방네 앞으로 밀며 효원은 아까 가락지와 향갑 노리개를 싸두었던 붉은 비단 보자기를 보퉁이 위에 얹는다. "펴보면 아실 것이네. 누구 눈에 안 띄게 얼른 갖다 드리게." 안서방네는 그러나 그 보퉁이와 보자기에 손을 못 댄다. 심중이 시방 오죽허시리요. 아매 아거이 당신 혼수로 갖고 오신 옷감 패물들잉게빈디, 덤뿍 덜어서 띠여 주시능갑다. 범연허신 새아씨, 시앗을 보먼 질가에 돌부체도 돌아앉는다등만, 도량아 하해와 같드래도 이런 꼴 당허고는 속 안 씨릴 수 없을 거인디, 이것 저것 속상헌 흉허물은 다 덮어 부리시고 우선 사람 살리울 일부터 앞세워 생각하기가 어찌 쉬울꼬. 아이고, 내가 당최 송구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겄구나. "긴요하게..

혼불 7권 (23)

6. 내 다시 오거든  방이 깊어 효원은 윗목 반닫이 속에 깊숙이 넣어둔 상자를 꺼낸다. 대접의 주둥이를 서로 맞물려 포개 놓은 것만한 이 상자는 , 마치 제사에 쓸 밤을 친 것 같은 모양인에, 윗면과 바닥면은 편편히 깎이고 배는 볼록 나왔다가 다시 아래로 홀쭉하니 빨려 들어간 팔각형이었다. 몸통의 사다리꼴 면면마다 가위표로 복판을 갈라 쪽빛 당홍 노랑 녹색 종이를 바르고, 그 한가운데 청 홍 황의 삼색 빛깔 굽이치는 태극모양이며 검은 날개 당초문처럼 펼친 박쥐를 정교하게 오려 붙인 상자는, 곽종이로 만든 것이다. 효원이 그 상자 뚜껑을 열자, 연분홍 갑사 바른 안쪽이 볼그롬한 뺨을 수줍게 드러낸다. 아른아른 비치는 무늬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다. "상자는 겉모습도 예뻐야 하지만, 열어서 안쪽이 고와야..

혼불 7권 (22)

귀신을 데리고 노는 당골네 무당이 뼉다구 하나를 가지고 못 놀으랴, 오냐, 좋다. 나는 엊저녁 꿈으로 바서 성헌 다리로 이 대문 빠져 나가기는 틀린 모양인디, 운 좋으먼 둘다 살고, 재수 없으먼 내가 죽든 저 사람이 죽든 하나는 죽을 것이다. 나 죽는 건 섧잖으나, 죽기 전에 한판 놀아 보도 못허고 죽어서야 어디 죽은 원혼 날망제 씻겨 주는 굿판의 당골네 백단이라고 헐 수가 있겄느냐. 기왕에 이렇게 된 일, 다 들켜서 덕석말이 맞어 죽을 일만 남었겄그만, 말을 해도 맞고 안해도 맞을 것 아니냐. 말허먼 죄 있응게 때리고, 말 안허면 말허라고 때리고. 내가 어디 우리 시아부니 뼉다구 갖꼬 한 번 놀아 보끄나? 사실은 간이 타서 말라붙게 무서운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보려고, 백단이는 자꾸만, 신 내리라..

혼불 7권 (21)

"죄진 놈이 죽는 것은 아니할 말로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지. 저러다 만일 억울하고 원통한 분기를 못 이긴 증손이 그대로 성질이 북받쳐 기색을 해 버리면 어쩔꼬." 그러다 자칫 절명할 수도 있는 일이어서, 남평 이징의는 "남 잡다가 나 잡기 쉬운즉, 남을 놓아 주어야 나도 놓여 날 것이데. 저토록 탱천하게 노여우니 큰일이로다." 혀를 찼다. 그런 염려가 들 만큼 이기채의 분노는 하늘을 쪼개게 치솟아 있었고, 그 분노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기력은 쇠하여 있었다. 이 와중에, 내일이 오마던 날인 황아장수가 어찌 다른 때보다 하루를 앞당겨 매안으로 올라오다가, 이 뜻밖의 정경에 놀라서, 원뜸의 종가로 얼른 올라갈 염을 못 내고 우선 아랫몰 임서방네 집으로 들어갔다. "죽을 일을 헝 거이제 살..

혼불 7권 (20)

검은 구름이 퍼렇게 물들어 번진 하늘이 나지막하면서도 아득하게 광목필처럼, 거멍굴 근심바우 너머 무산 날맹이 저쪽 어딘가로 음울 스산한 자락을 드리운 아래, 홍술은 임종할 때 모습 그대로, 일흔 남은 머리털을 허이옇게 흐트러 난발하고 서 있었다. 마른 장작같이 여위어 불거진 광대뼈와 훌쭉하니 꺼진 뺨에 북어껍질로 말라붙은 거죽이며, 핏기 가신 입술을 반이나 벌린 입 속에서 적막 음산하게 새어 나오는 검은 어둠. 홍술은 시푸레한 무명옷을 입고 맨발을 벗은 채 발가락을 갈퀴처럼 오그리고, 백단이네 사립문간에 서 있었다. 제멋대로 자라나 어우러진 대나무로 울을 두른 뒤안에서 수와아아 음습한 바람 소리가 밀리며 홍술이를 씻어 내리는데, 백단이는 마침 손에 흰 종이꽃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중이었다. 누군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