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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38)

두 동서는 마주 받으며 잇던 말 끝에 서로 보고 웃었다. 내일은 장을 담그는 날이라, 매일같이 맑은 물로 닦아내는 장독을 오늘따가 어느 때보다 정성들여 돌보고 매만지는 유촌댁 손길에 햇빛이 묻어났다. 오류골댁은 옆에서 그 일손을 거든다. 이른 새벽 동이 틀 대 뒤안 장꽝 장독대에 즐비한 장독 뚜껑을 반드시 열어, 신선한 공기를 쏘이게 하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의 깨끗한 햇볕을 쪼이게 하는 장독들. 쌀 세가마가 들어간다는 우람한 독아지는 대를 물린 장독이요, 그 옆에 해를 묵여 걸쭉해진 진간장과, 진하지 않은 간장 청장 항아리가 놓이고, 김칫독들이 어깨를 반듯하게 맞댄 맨 뒷줄은, 한낱 흙을 구워 만든 독이라기보다 위엄 있는 가문의 엄위를 자랑하며 버티고 앉은 마나님을 보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 ..

혼불 6권 (37)

그러다가 초아흐렛날.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튼다." 는 무신일 무방수날인지라 귀신 없는 이날을 놓치지 않고, 무엇을 해도 탈이 없다 해서, 집집마다 안방 건넌방의 가재 도구들을 옮기기도하고, 지붕이며 바람벽, 부뚜막이나 뒷간 들을 수리하기도 하며, 아낙네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장을 담그었다. "장 담기에 제일 좋은 날은 암만해도 정묘일이지 머."율촌댁은 마침 큰집으로 올라온 오류골댁한테 말했다. "그럼 내일이지요?""하아. 자네도 내일 담을라는가?""그럴라고요.""그게 참 요상헌 일이데. 무얼 그러랴 해도 신날 장을 담으면 꼭 장맛이 시고, 물날 담으면 꼭 장이 묽어진단 말이야.""그러니 날 놓치면 큰일지요. 오도 가도 못허고 신일 수일에 장 담게 되면 참 난감헐 일 아니요잉? 일년 농사 안 중헌 것이..

혼불 6권 (36)

22. 안개보다 마음이  사람의 일이, 토방에서 대문간만 나가려도 자칫 잘못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수가 있는데, 한나절 좋이 걸어가야 하는 십 리 길은 어떠할꼬. 떨쳐입은 진솔옷에 흙탕물도 튀어오르며, 비단 갖신 고운 발로 지렁이도 밟으리라. 내 앞을 가로지르는 미친 개, 누런 황소도 만나겄지. 길도 또한 평탄치만은 않아서, 냇물도 건너며, 고개 넘어, 산모롱이 길게 휘돌아 지루하게 멀리 걷기도 할 것이다. 십 리가 그러할 때 하루 해 온종일 깜깜하기까지 걸어야 하는 백 리라면 어떠할까. 가다가 길이 끊어진 곳도 있고, 돌짝밭 가시덤불 뒤엉킨 골짜기도 있거니와 집도 절도 없는 길에 고적하고 막막하기 뙤약볕 속 나그네 같은 고비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천 리 길이야. 하루도 이틀도 아닌 그 길을 가자면,..

혼불 6권 (35)

"철재도 인제 내년이면 입춘문 쓰게 되겄지?"사리반댁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입춘대길', '건양다복' 혹은 '국태민안'이라고 대문에 써붙이는 입춘문, 입춘서는 글 잘하는 어른이 아니라 그 집안에서 제일 나이 어린 꼬마동이 사내아이가 썼다."우리 집에도 입춘문 쓸 만한 소년이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널리 과시하는 뜻도 있고, 그 순진무구한 고사리 손으로 콧 등에 땀방울 송글송글 돋아나게 정성을 다하여 쓴, 순결한 글씨를 부적으로 삼아 한 해의 복을 비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철재가 올에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면 내년에 이르러는 입춘문을 쓸 수 있게 되리라는 말을 띄운 사리반댁은 "국문 천자 노래가 있거든."하였다. "심심할 때 외워 보소."가갸거겨 가신임은 거년에 소식이 돈절하고 고교구규 고대한님..

혼불 6권 (34)

"양반의 시집살이는 민어 가시같이 억세고도 섬세해서, 효덕아, 나는 정말 우리 집안보다 좀 수월한 가문으로 시집가야지 했었다."너희 외가도 참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집안 아니냐. 양반이란, 남 보기에 위세 있고 품격 있어 감히 우러르기 아득해 보이지만, 아무나 못하는 것이다. 그 미묘하고 까다로운 법식, 절차 심리적인 중압감에 앉고 서는 것이나 행동거지 갈피 갈피가, 조금만 어긋나면 비웃음을 피할 수 없고, 조금만 아차 해도 큰일이 나는 것이라. 말 안해도 헤아려 알아야만 양반이지. 그리고 무엇이든 제가 다 손수 할 줄 알아야 한다. 비단을 다듬기를 달걀과 같이 반들반들하게 하고, 베를 다리기를 매미 날개마냥 아늘아늘하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시켜서 될 일이냐? 그 공들이고 매만지는 부녀자 손끝이 매사에..

혼불 6권 (33)

효원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몰아내는 주문으로 부녀의 예절을 읽고 또 읽다가, 문득 정씨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친 허담의 음성을 상기하고, 그 틈바구니로 끼여드는 강실이의 그림자에 가슴이 벌어지듯 아픈 것을 가까스로 아물리어, 한 번 더 책에다 눈을 준다. 그러나 몰아내려 하여도 강실이의 모습은 뒷머리에 탱화처럼 걸린다. 암채 뇌록색 구름 무늬를 밝고 벗어질 듯 살빛이 비치는 천의를 날개처럼 두른 수수백 수수천 부처들이, 한 손에 천도 들고 한 손에는 도화 꽃가지 벙글어지게 들어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이 현란한 단청에 에워싸인 탱화.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걸린 탱화의 부처야 그 같은 모습을 하실 리 있으리. 그런데도 효원의 윗머리에 드리워지는 휘장은 걷어낼 길도 없이 금단청으로 나부끼며,..

혼불 6권 (32)

21. 수모  "남편이 소실을 두는 것은, 나 자신에게 몹쓸 질병이 있거나, 몸소 집안일을 할 수 없건, 혹은 혼인한 지 오래되었어도 아들을 낳지 못해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된 데 까닭이 있다. 남편이 비록 소실을 두려 하지 않더라도 이런 정황이면, 옛날의 어진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한테 권하여, 사방에 널리 알아 보아 어질고 정숙한 사람을 구해다가, 그 여인을 예법대로 가르쳐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투기를 하겠느냐. 혹 내게 병이 없고 아들이 있는데도 남편이 여색을 탐내서 여러 희첩을 두어 본성을 잃고 행실을 어지럽게 가지며, 미혹하고 음란한 일에 빠져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집안의 재물을 탕진한다면, 마땅히 정성스러운 뜻으로 힘써 두 번 세 번 간절하게 권하며 경계하고, 듣지 ..

혼불 6권 (31)

"철재도 인제 내년이면 입춘문 쓰게 되겄지?"사리반댁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입춘대길', '건양다복' 혹은 '국태민안'이라고 대문에 써붙이는 입춘문, 입춘서는 글 잘하는 어른이 아니라 그 집안에서 제일 나이 어린 꼬마동이 사내아이가 썼다."우리 집에도 입춘문 쓸 만한 소년이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널리 과시하는 뜻도 있고, 그 순진무구한 고사리 손으로 콧 등에 땀방울 송글송글 돋아나게 정성을 다하여 쓴, 순결한 글씨를 부적으로 삼아 한 해의 복을 비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철재가 올에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면 내년에 이르러는 입춘문을 쓸 수 있게 되리라는 말을 띄운 사리반댁은 "국문 천자 노래가 있거든."하였다. "심심할 때 외워 보소."가갸거겨 가신임은 거년에 소식이 돈절하고 고교구규 고대한님..

혼불 6권 (30)

"양반의 시집살이는 민어 가시같이 억세고도 섬세해서, 효덕아, 나는 정말 우리 집안보다 좀 수월한 가문으로 시집가야지 했었다."너희 외가도 참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집안 아니냐. 양반이란, 남 보기에 위세 있고 품격 있어 감히 우러르기 아득해 보이지만, 아무나 못하는 것이다. 그 미묘하고 까다로운 법식, 절차 심리적인 중압감에 앉고 서는 것이나 행동거지 갈피 갈피가, 조금만 어긋나면 비웃음을 피할 수 없고, 조금만 아차 해도 큰일이 나는 것이라. 말 안해도 헤아려 알아야만 양반이지. 그리고 무엇이든 제가 다 손수 할 줄 알아야 한다. 비단을 다듬기를 달걀과 같이 반들반들하게 하고, 베를 다리기를 매미 날개마냥 아늘아늘하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시켜서 될 일이냐? 그 공들이고 매만지는 부녀자 손끝이 매사에..

혼불 6권 (29)

효원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몰아내는 주문으로 부녀의 예절을 읽고 또 읽다가, 문득 정씨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친 허담의 음성을 상기하고, 그 틈바구니로 끼여드는 강실이의 그림자에 가슴이 벌어지듯 아픈 것을 가까스로 아물리어, 한 번 더 책에다 눈을 준다. 그러나 몰아내려 하여도 강실이의 모습은 뒷머리에 탱화처럼 걸린다. 암채 뇌록색 구름 무늬를 밝고 벗어질 듯 살빛이 비치는 천의를 날개처럼 두른 수수백 수수천 부처들이, 한 손에 천도 들고 한 손에는 도화 꽃가지 벙글어지게 들어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이 현란한 단청에 에워싸인 탱화.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걸린 탱화의 부처야 그 같은 모습을 하실 리 있으리. 그런데도 효원의 윗머리에 드리워지는 휘장은 걷어낼 길도 없이 금단청으로 나부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