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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붕이 명에 죽지 못한 것을 그 집에서는 깊이 숨기고 말이 밖에 나가지 아니
하도록 안팎 하인들을 단속하였다. 조객이 와서 "무슨 병환에 그렇게 졸지에 궂
기셨소? “ 하고 물으면 상주들은 "약주가 좀 과히 취하신 중에 동풍이 되셔서
갑자기 상사가 나셨습니다. " 하고 대답하고, 겉 풍문을 듣고 와서 체면없이 "무
슨 하인의 변이 있었다니 참말이오? ” 하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손버릇 사나
운 아이종이 매맞은 끝에 죽은 일이 있습니다. " 하고 대답을 하였다. 순붕의 졸
곡이 지난 뒤에 어느 날 이기가 상주들을 보러 와서 "선대감 작고하신 뒤에는
무슨 일 하나 서로 의논할 사람이 없네그려.“ 하고 한탄하듯이 말하니 정렴이
는 속으로 불쾌히 여기며 잠자코 앉았고 정현이는 "대감께서 소인의 선친과 좀
자별히 지내셨습니까? ”하고 말을 받들어 주었다. 이기가 자연히 정현이와 많
이 수작하게 되어서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무슨 말끝에 "선대감 생존시에 가
까이 시중하던 아이종년이 있었지? “ 하고 말하여 정현이 ”녜.“ 하고 대답한
뒤에 "그년이 어디 갔나? ” 하고 물으니 정현이 대답이 없었다. "죽었단 말이
있으니 그것이 참말인가? “ "죽었습니다. 대감께서 그것을 어떻게 들으셔 계십
니까? ” "나도 귀가 있으니까 듣지그려. 그런데 그년이 어떻게 죽었나? “ 하고
밑을 캐어물으니 정현이 까닭을 몰라 황당하여 하며 대답하였다. "그년이 홍한
년이에요. 그년이 상노놈과 부동해 가지고 선친이 신명같이 아끼시던 옥잔을 훔
쳐갔습니다. 선친도 생존시에 그년을 치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친 작고하신 뒤
에 그년이 적실히 훔쳐간 것을 알게 되어 소인이 형의 몸을 받아서 치죄했습니
다. 죽게까지 치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그년이 매를 맞아보지 못한 탓으로
장독이 심했던 모양이올시다. " 이기가 정현의 말을 듣고 "그러면 그렇지. 나는
듣기를 그년이 전 상전의 원수라고 선대감을 치독했다고 들었어. 거짓말이 많은
세상이라 할 수 없네. 옥잔 잃은 것은 나도 아는 일일세. ”하고 얼굴에 안심하
는 빛이 있었다. 사실로 이기는 배의라는 친한 의관에게서 소문을 들은 뒤에 전
에 사패한 노자와 비자들은 일절 앞에 가까이 하지 않는 터이었다. 이기가 조용
히 집에 있을 때 배의가 온 것을 방으로 불러들이었다. "여보게, 이 사람 향자에
자네가 정의정 집 소문을 이야기난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거짓말이데. " "허
무한 말이와요.“ "꼬투리는 있으니까 허무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거짓말은 거짓말이야.” "정의정댁 상노로 있던 아이놈이 장독으로 소인의 약을
먹었삽는데 그놈의 입에서 난 말이올시다. " "글쎄, 요전에도 말했지, 그런데 내
가 알아본즉 아이종년이 상노놈과 부동해 가지고 무엇을 훔쳐냈더라네, 그 집에
서 치죄는 좀 과히 했던 모앙이야. " "대체 그 아이놈의 아비가 저의 자식의 매
맞은 까닭을 말하는 것이 동에 잘 닿지 않아서 거짓말인 듯한 의심이 없지 않았
습니다. 아무리 의심나는 소문이라도 소인이 들은 바에야 대감께 아니와서 여쭐
길이 있습니까. " "암, 그렇지. " "황송하오나 오늘은 소인이 대감께 여쭐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 무슨 말인가? “ "가까이 전의에 변동이 있으리라고 말들 하옵
는데 대감께서 소인의 일을 특별히 하념 하옵시는 터이오니 이번에 제조 대감께
편지 한 장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때 허자가 이조판서로 전의 제조를 겸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은 일일세만 남중이가 내 말을 들을는지 모르겠네.” "어디로
보기로 허판서가 대감 말씀을 무일 수가 있습니까. " "그렇지도 않아. 연전에 위
에서 공신 자제를 녹훈하라실 때 남중이가 유독 사양하는 것을 내가 그리 못하
는 법이라고 나무래기까지 하였건만 육칠 차나 고사해서 그예 사양했었네, 그때
공신의 자제로 정현이 하나만 녹훈된 것이 남중이가 고집을 부린 까닭일세. "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옵지요. " "아무래도 편지로는 어려을 듯하니 내가
지금 녹사를 보내서 말해 봄세. " 하고 이기는 허자에게 녹사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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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영의정 이기의 녹사가 허자에게 갔다 왔다. "대답이 무어라든고? “ "
소인이 가서 처음에 말씀을 여쭈온즉 못 들은 체하고 앉으셨기에 재차 말씀을
여쭈었습지요. 그리하였삽더니 흘저에 벌떡 일어 서서 소인의 뒷덜미를 잡고 휘
두르며 내가 정부 서리란 말이냐? 그 따위 청을 어디 와 말하느냐? 하고 호령짓
거리를 하시겠지요. 항거할 수 있습니까? 꼼짝없이 당했습지요. " "무엇이 어째!
" 하고 이기가 발끈 화를 내는데 배의관이 "허판서가 그럴 수가 있습니까. " 말
하고 또 녹사가 "소인아 녹사를 차닌 지 십여 년에 오늘 같은 봉변은 처음이올
시다. " 말하여 화를 돋아주어서 칠십 노인 이기가 한동안은 철없는 젊은 사람들
골내듯이 손발 하나 가만두지 못하고 펄펄 뛰다가 조금 진정이 된 뒤에 "되지
못한 기광 얼마나 부리나 두고 보자. "하고 허자를 별렀다. 허자는 자기의 소행이
그른 것을 알고 일등공신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므로 한때 만난 듯이 부귀공명을
자랑하는 다른 공신들과는 심사가 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공신들 중에서 허자의
심사를 알아주는 사람은 좌찬성 민제인 한 사람뿐이라 허자가 이기에게 문후할
틈아 있으면 그 틈을 가지고 민계인을 심방하였다. 허자와 민제인이 서로 막역
하게 지내는 것이 과부 설움을 동무 과부가 차는 격이었다. 어느 날 허자가 민
제인을 찾아왔다가 그 얼굴에 분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대감이 무슨 분한 일
을 보았소?" 하고 물었다. 그때 민제인은 한 동리에 사는 젊은 친구 김난상을 찾
아갔다가 창피한 대접을 받고 온 길이었다. 민제인이 김난상에게 가서 통자한즉
직품으로 보든지 연기로 보든지 무엇으로 보든피 진동한동 뛰어나와서 맞아들여
야 할 사람이 방금 머리를 빗는 중이니 문 안에 들어서서 기다리라고 아이종에
게 말을 일러보냈으니 이것은 남에게 말도 못할 창피한 대접이라 민제인이 분하
게 여기어 바로 곧 집으로 돌아왔었다. 민제인이 허자의 묻는 말에 "대감이 아니
면 말도 할 수 없는 분한 일이오. " 하고 김난상에게 창피 받는 것을 이야기하고
"내가 한번 죽지 못한 탓으로 동리 소년에게까지 봉변하고 살게 되니 이런 분하
고 절통한 일이 어디 있겠소. " "지금 대감이나 나에게는 남은 것이 욕뿐이오. "
"지금 욕만 먹소? 후세의 악명은 어떻게 하오. " "대감은 그래도 나보다는 덜할
것이오. " "한번 소인 이름이 붙는 날이면 더하고 덜할 것이 무엇 있소. " "우
리가 소인 소리 듣기는 원통하지 아니하오. " 하고 허자와 민제인은 서로 손 맞
잡고 눈물까지 흘리었었다. 안명세 옥사 때에 민제인이 사기를 고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또 죄인을 두둔해 말하다가 죄로 몰리어서 공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민
제인이 집이 가난한 까닭으로 귀양 간 뒤에 의식이 군간 하여 그 아우 제영이
한걱정으로 지내는데, 허자가 이것을 알고 민제영을 당진 현감으로 제수하게 하
니 그 형을 돌보아주라는 뜻이었다. 이때 마침 허자의 친한 사람이 이기에게 가
서 "연전 옥사를 일으킨 공로로 녹훈까지 된 것은 한 되는 일이로다. " 하고 허
자가 말한 것을 옮기었더니 이기가 속으로 '옳다, 되었다. ' 하고 대사헌 진복창
과 사간 이무강을 불러서 허자를 탄핵하도록 지주하였다. 허자가 대간 탄핵에
몰리어서 일등공신이 삼등으로 깎이고 함경도 홍원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기
는 이것도 맘에 부족하여 사사하도록 가죄하기를 청하려고 계초를 품에 품고 예
궐하여 탑전에서 먼저 다른 일을 아뢰는 중에 갑자기 현기가 나서 앞으로 꼬꾸
라졌다. 대비가 이것을 보고 놀라 여러 내시를 시켜서 빈청으로 내어다 뉘게 하
고 여러 의관을 시켜서 의약으로 구호하게 하였으나 이기는 나이 칠십이 넘은
사람이라 평일의 근력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종시 젊은 사람과 달라서 돌리지 못
하고 집에 나올 사이도 없이 운명하게 되었는데, 죽을 때 정신 혼몽한 중에 "이
해가 나를 죽인다. " 하고 소리를 지르고 이내 성각이 없어졌었다. 이기가 급사
하는 바람에 허자는 다행히 가죄를 면하였으나 얼마 뒤에 구경 배소에서 병들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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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붕, 이기 등이 차례로 죽은 위에 조정은 윤원형의 독판이라 사헌부 대사
헌이니, 사간원 대사간이니 또는 홍문관 부제학이니 서슬 좋은 조정 관원들은
대개는 원형의 앞에서 견마의 충성을 다하는 인물들이었다. 대체 말이나 개의
주인 위하는 충성은 일호 거짓이 없지마는 사람으로서 말 노릇 개 노릇 하는 것
은 충성이 곧 거짓이라 말이나 개만 못한 거짓 충성이 주인의 눈의 밖에 나서
좋지 못하게 신세를 마치는 것은 첩경 있기 쉬운 일이다. 대사헌 진복창은 세상
사람에게 독사 지목을 받아가며 원형의 미워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구축하고
살육하되 항상 원형의 소망에 지나도록 힘을 썼다. 그러나 복창도 원형의 눈의
밖에 나는 날이 있어서 원형의 말이 "내가 남을 해치려고 독사를 기를 사람이
아니다. " 하고 복창의 허물을 잡아 대비께 품하고 삼수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부제학 정언각은 양재 익명서를 큰 공로거리로 생각하여 귀 뒤의 옥관자가 쉽사
리 두서너번 변하여 도리어 승품 재상이 될 것을 꿈꾸고 있었으나 꿈은 꿈대로
떨어지고 관자는 좀처럼 변하지 아니하였다. 아침에 소세하고 망건을 쓸 때 관
자의 연화수조를 들여다보며 쓴입맛을 다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언각이
익명서의 공로만 가지고는 속히 현달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원형의 문하에 드나
들기 시작하여 원형의 집 청지기에게 약간 토심받는 것을 달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정언각이 원형의 집에 와서 원형의 거처하는 방이 조용한 것을
보고 청지기에게 말을 물었다. "대감이 어디 가셨나?“ "작은댁에 가셨어요. " "
곧 오시겠나?” "그걸 알 수가 있나요. " "좀 기다려 볼까? “ "요량대로 하시지
요. " "사랑으로 들어갈까?” "대감이 아니 계신 때는 영의정 대감이 오셔도 사
랑에 들이지 아니 해요. " "그러면 마루에 앉아 기다림세. " 하고 정언각이 한두
시각을 착실히 기다린 뒤에 '에라 쉬' 소리가 나며 원형이 탄 남여가 사랑 뜰
아래에 와서 놓이었다. 원형이 청지기의 좌우 부축으로 마루에 올라을 새 뜰 위
에 내려섰는 정언각을 보고 잠깐 고개를 끄덕이었다. 정언각이 원형의 뒤를 따
라 사랑에 들어와서 장지 밖에 꿇어앉으니 원형이 인삿말도 하기 전에 "영감이
말을 타고 왔소? “ 하고 물었다. "녜, 말을 탔습니다. " "그 말이 장히 눈에 익
기는 한데 뉘 말이든지 생각이 아니 나서 지금 들어오다가 하인들더러 물어보기
까지 하였소. 본래는 영감의 말이 아니지? ” “아니올시다. 전에 임형수 타던
말이랍니다. " "옳지, 임형수 타고 다니던 말이야. 말이 좋더군. " "걸음이 시일해
서 좋아요. 조금 사납기는 하지만 자견으로 다녀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 "우
선 생김생김이 잘생겼어. " "대감께서 세워 보실 의향이 계시다면 바치겠습니다.
" "아니, 나는 말이 소용없소. " 하고 원형이 주는 말은 받지 아니하였으나 주는
뜻은 받아서 언각을 술대접까지 하여 보내었다. 언각이 원형의 돌보아 주는 힘
을 입어서 옥관자를 금관자로 바꾸어 붙이게 되고 얼마 뒤에 경기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언각이 예궐 숙배하고 나와서 원형의 집을 향하여 오는 길에 하인들은
뒤에 따르게 하고 자견하고 앞서 오는데, 언각이 정신 놓고 무엇을 생각하는 중
에 말이 무엇에 놀랐던지 갑자기 뒤를 솟치어서 말 위에서 떨어졌다. 아주 다
떨어지기나 하였더면 낙상할 뿐이었겠지만, 한 발이 동자에 걸리어서 몸이 매어
달리게 된데다가 뒤에 오던 하인들이 무망중에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말이 들고
뛰기 시작하여 언각은 두골이 깨어지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갈리고 찢어져서
즉사하게 되었다. 정언각이 임형수의 말에게 죽었다는 말이 세상에 퍼진 뒤에 "
천도가 무심치 않다. " "보복이 무섭다. " 하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
었다.
제 5장 권세
1
천도가 무심치 아니하여 보복이 영절스러울 것 같으면 윤원형은 백번 천번 급
살을 맞아도 가하건마는, 천도가 나름이 있는지 보복이 원형에게까지 미치지 못
하였다. 원형은 일국의 권세를 한손에 잡고 맘대로 휘둘렀다. 원형의 형 원로는
처음 살육이 난 뒤에 곧 풀리어 돌아와서 돈령도정 벼슬까지 지내었는데 공신에
참예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어서 "소위 공신이란 것들이 도적놈들이다. 남이
죽을동살동 모르고 만들어놓은 일에 공을 앗아다가 일등이니 이등이니 떠벌리고
나섰으니 이것이 도적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 하고 노발대발한 일까지 있었다.
원로의 말이 원형의 귀에 들어 간 뒤 원형이 원로를 보고 "여보 형님, 말조심하
시오. " 하고 말하였더니 원로가 눈썹이 쌍그래지며 "무슨 말을 조심하란 말이
야? “ 하고 뇌까리었다. "공신이 이러니저러니 말한답디다그려. 국가의 공신을
함부로 말해 되겠소. " ”갸륵한 공신들을 누가 무어라고 말해? “ "그렇게 빈정
대실 것도 아니오. " "영감이 작위가 높아지더니 형의 버릇까지 가르치려는가?
” "형님도 딱하오. " “딱하다는 건 무어야? 공신이 흔한 세상에는 윤기도 없
나? 형보고 딱하다니 고현 인사로군. " 하고 원로가 뛰는 바람에 원형은 오만상
을 찡그리었다. 원형과 같이 국사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을 오래 종이품으로 두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고 윤인경 이하 대신들이 대비께 품하여 특지로 원형의 직품
을 돋아주었다. 며칠 동안 원형의 집에는 치하하는 손이 그칠 사이가 없었는데,
그의 형 원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더니 어느 날 밤에 와서 원형을 보고 "
천은이 감축하다. " 하고 해라로 인사하니 원형이 "형제간이라고 직품을 보지 말
란 법이 없으니 남 보는 데서는 해라하지 마시오. 내게 창피하다느니보다 형님
에게 창피하오. " 하고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었다. "대감께 잘못했소. " 하고 원
로는 당장에 말을 고치고 "여보 대감, 대감 소리가 듣기에 어떻소? 좋소? 언짢
소?" 하고 비위에 거슬려 나오는 웃음을 웃으며 원형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원형
이 얼굴을 들고 천정을 치어다보며 "언짢을 것 없지요. " 하고 대답하였다. "좋
지? 좋으면 대감 우애 덕분에 나도 대감 좀 바쳐 봅시다. " "계제가 있는데 그렇
게 쉽게 되나요. " "쉽게 안 되어? ” 하고 원로가 뇌고 나서 도로 해라로 "아무
도 없으니 말이다, 오늘날 너의 참판이니 판서이니 하는 것은 다 어디서 나왔느
냐? 내가 없었더면 지금쯤 윤임이 손에 목숨이 달아났을 것 아니냐? 형도 형 나
름이지, 네가 어째 나를 푸대접하게 되니? 일분 사람의 맘이 있거든 생각 좀 해
보아라. " 하고 소지를 높여 말하니 원형이는 "형님 약주 취했구려. 하인이 듣더
라도 창피하오. 가만가만히나 말하시오. " 하고 손을 흔들었다. "오냐, 나는 창피
도 모른다. 너희들의 오늘날 공명이 대체 뉘 공로냐? 너는 다 알지, 뉘 공로냐?
말 좀 해보아라. " "형님 공로가 많지요. " "공로가 많은 줄 아는 네가 나를 푸대
접한단 말이냐? “ "푸대접이 무슨 푸대접이오? ” "이기, 정순붕 따위를 대신을
시키고 임백령, 허자 따위를 좋은 벼슬을 시키면서 나는 돈령도정으로 썩힐 작
정하는 것이 푸대접 아니고 무엇이냐? “ "그 말씀은 대비전에 여쭐 말씀이고
내게 하실 말씀이 아니오. " "옳다. 대비전에 여쭐 말씀이다. 그러나 대비전에서
도 전과 달라서 내 말을 네 말만큼 알아주시지 않더라. 이렇게 대비전 맘을 돌
린 것은 뉘 짓이냐? ” "그걸 내가 아오. " 분이 상투 끝까지 오른 원로는 "이놈
아, 네가 모르면 누가 아니? “ 하고 원형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게 무슨 행
실이오 "형더러 행실? 잘 배웠다. " 하고 원로가 체면까지도 돌보지 않고 원형의
상투를 감투 껴서 훔켜잡고 앞으로 끄숙이었다. 형제가 일어서서 두발놀이를 시
작하였다. 원로는 원형의 뺨을 치고 원형을 몇 번 걷어차기까지 하였으나, 원형
은 그중에 형 대접한답시고 계집아이 싸우듯이 원로의 팔을 꼬집고 원로의 얼굴
을 할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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