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정이가 능통이에게 말하는 동안 이방은 꺽정이를 살펴보다가 “손님을 오래
밖에 서시게 해서 마안하우. ” 꺽정이가 영특하게 생기고 위엄스러워 보이는
데 이방은 기가 눌리고 마음이 꺾이어서 인사 차리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능통이는 이방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이방더러 “밖에 기
신 손님 한 분을 마저 뫼셔들여야지. ”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방이 손수 계
집아이년의 자던 자리를 걷어치우고 나서 꺽정이를 앉으라고 권할 즈음에, 능통
이가 막봉이를 부축하고 들어와서 꺽정이는 막봉이를 옆에 데리고 앉고 이방은
능통이와 느런히 앉았다. 꺽정이와 막봉이가 이방하고 수인사를 다한 뒤에 능통
이가 이방을 돌아보며 “아랫것들을 어디다가 들어앉힐까? ” 하고 물으니 이방
은 선뜻 “그전 있던 행랑사람이 일전에 나가구 지금 문앞의 행랑이 비었으니
거기 가서 들어앉으라지요. ” 하고 대답하였다. “길두령이 타구 오신 교군두
아주 치웠으면 좋겠는데 어디루 치우랄까?” “헛간에 나뭇짐이 있어서 들여놓
기 어려울걸. 나뭇짐은 부엌으로 옮기구 들여노라구 할까.” “뜯어서 부엌 뒤
같은 데 매달아 두어두 좋지. ” “날이 밝은 뒤에 다시 어떻게 하든지 우선 나
뭇짐을 한옆으루 밀구 헛간 구석에 들여놓으라구 하시다.” 능통이가 이방과 같
이 밖에 나와서 졸개들을 시켜 교군은 헛간에 들여놓게 하고 짐짝은 건넌방에
들여놓게 하고 졸개들까지 행랑방에 들어앉히구 나니 이방이 조사보러 들어갈
때가 되었다. 능통이더러 주인 노릇 하라고 말하고 안방에 들어와서 첩에게 대
강 말을 이르니 그 첩은 미간을 찌푸리며 “전에는 달골 나으리 혼자 오셔서 기
셨으니까 남들이 수상스럽게 보지 않았지만 이번엔 동무에, 하인에 사람이 다섯
이나 되니 남들 보기에 수상하지 않겠세요. 우선 지금 행랑 사람도 없는 때 그
시중을 누가 다 하나요? ” 하고 잔소리를 내놓았다. “내가 어련히 알아 할 것
이니 잔소리 마라. ” “내가 잔소리를 하고 싶어 하나요. 하게 하니까 하지. ”
“말대답을 납신납신하구 버리쟁이 없어 못 쓰겠다. ” “보리장도 간하는 데
쓰나요? ” “한마디라두 져봐라. ” “기집사람이 질 줄을 아나요? 이기기나
하지. ” “쓸떼없는 주둥이 고만 놀리구 세숫물이나 노라구 해. ” “입이란 말
이 촉휘되지 않거든 어쩌다가 입이라도 좀 해보시오. 밤낮 주둥이라니 주둥이가
무어요? ” “입이라니 참말루 어린년이 입을 잘 단속해서 말내지 않게 해. ”
“그것만은 염려 마세요. ” 이방이 소세한 뒤 조반상을 재촉하여 요기하고 안
방에서 나올제 건넌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세 사람은 어쓱비쓱 누워서 모두
잠이 들었었다. 아침때가 지나고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때가 다 된 뒤에 이방이
나왔다. 이방이 나오는 길로 바로 건넌방에 와서 문 열고 들여다보며 “종일 심
심들 하셨지요? ” “찬 없는 밥이나마 나우들 잡수셨소? ” 하고 인사성을 보
인 뒤에 “옷 좀 벗구 건너오리다. ” 하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한동안 안방에서
이방과 첩의 지껄이는 소리가 난 끝에 어린년이가 건넌방에 와서 능통이를 보고
“상주께서 잠깐 안방으로 건너오시랍니다. ” 하고 청하였다. 능통이는 속으로
‘옳지, 오늘 밤에 다른 데루 가라구 말할라는가 부다. ’ 하고 생각하며 꺽정이
더러 “잠깐 건너가 보구 오겠습니다. ” 말하고 어린년이를 앞세우고 안방으로
건너왔다. 능통이가 건너온 뒤 이방의 첩은 어린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고
이방이 능통이와 마주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그 사람네더러 다른 데루
가자구 말씀했소? ” “자네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구 말하려구 아직 말을 아니
했네. ” “대관절 며칠 가량이나 있다 갈 작정이오? ” “길씨의 장독 난 것이
합창되어서 행보하게 되면 곧 청석골루 갈 겔세. ” “장창이 심하면 졸연히 나
을 수 있소? ” “그 동안만 해두 벌써 많이 나았네. 처음에는 운신을 잘못하든
사람이 지금은 자네 보다시피 행보를 제법 하지 않든가. 원기 좋구 나이 젊은
사람이라 우리네와 다르네. 넉넉잡구 한 열흘쯤 더 지나면 완구히 다 나을 겔세.
” “형님두 청석골루 가기루 했소? ” “그래서 내권은 먼저 청석골루 보냈네.
” “달골 괴수가 청석골 졸개 되러 가는구려. 영위계구언정 무위우후란 말을
형님 아시우? ” “그게 무슨 말인가? ” “딸기 주둥이가 될망정 쇠 똥구녁이
되지 말란 말이오. ” “설마 졸개 대접이야 하겠냐마는 임두령 같은 당세 인물
밑에 달구종 노릇이라두 감심하구 하겠네. ” “꺽정이는 참말 인물입디다. 누구
든지 선성을 듣다가 사람을 만나보면 사람이 선성만 못한 수가 많건만 꺽정이는
선성 듣던 것보담 사람이 더 낫습디다. 그 삶이 미천으루 말하며 백정의 자식이
건만 딱 대면하구 보니 백정의 자식으루 하대할 수가 없습디다. ”
“그 인물에다가 힘이 장사요, 검술이 귀신 같은 것을 겸쳐 생각 해 보
게. 내가 말구종 노릇이라두 감심한다는 것이 괴상할 거 없지. ” “길가두 장사
랍디다그려. ” “청석골서 임두령 담 가는 장사라네. ” “그 사람네들 숨겨두
는 것이 여긴 큰일이 아니지만 형님 낯을 보더래두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안 봐
줄 수가 없어서 얼마 동안 숨겨줄 텐데, 이 집에 숨어 있는 동안 아무리 갑갑하
더래두 건넌방에 들어앉아 있어야지 밖에들 나가서는 안 되겠소. ” “그건 내
가 담당할 테니 걱정 말게. ” “그러구 데리구 온 아랫사람들은 집에 두구 나
무나 시킬 텐데 이 집에 둘 수 없으니까 하나는 큰집에 갖다 두겠소. ” “우리
집에서두 머슴 노릇하든 것들이라 나무 같은 건 잘할 것일세. ” “인제 고만
건넌방으루 건너가시우. 나두 곧 건너가리다. ” 능통이가 건너방에 건너올 때
회색이 만면하여 “무슨 좋은 이야기를 듣구 왔나? ” 하고 꺽정이가 물으니 능
통이는 싱글벙글하며 “우리 일 잘 봐주만 허락을 받았습니다. ” 하고 대답하
였다. “자네를 불러다가 생색을 내든가? ” “두 분 칭찬을 입에 침이 없이 하
구, 두 분 같으신 당세 인물을 위급한 때 구해 드리는 것이 자기의 본의라구 말
합디다. ” 능통이의 말을 듣고 꺽정이는 한두 번 고개를 끄떡이고 꺽정이 앉은
옆에 누워 있는 막봉이는 당세 인물 소리가 좋아서 입을 벌리었다. 이방이 건넌
방에 건너와서 같이 앉아 이야기들 하는 중에 어린년이가 방문 앞에 와서 “저
녁 진지가 다 되었는데 어떻게 하오리까? ” 하고 물었다. 어린년이는 상을 들
여올까말까 묻는 것인데 이방은 어떻게 차릴까 묻는 줄로 생각하고 “밥이 다
됐으면 두 겸상으로 차려서 들여오너라. ” 하고 일렀다. “상주께서는 안방에서
잡수실 줄 알고 외상을 차려놨습니다. ” “딴소리 말구 겸상 겸상해서 이리 가
져오너라. ” 어린년이가 녜 대답하고 간 뒤, 한참 만에 겸상 둘을 들여와서 꺽
정이는 막봉이와 같이 먹고 능통이는 이방과 같이 먹는데 아침, 점심에 없던 반
찬이 많아서 상이 어두웠다. 이튿날 아침 셋 겸상은 도로 전날 아침, 점심과 같
이 초조하여 능통이는 꺽정이와 막봉이에게 반찬을 사양하느라고 싱거운 밥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상의 밥그릇 반찬그릇을 부시다시피 하여 내보낸 뒤
에 능통이가 꺽정이를 보고 “밥을 좀 잘 얻어먹을라면 안주인에게 인심을 사두
어야겠습니다. ” 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빙그레 웃으며 “무얼루 사나? ” 하고
물었다. “짐 속에 있는 은붙이 두 가지만 선사루 쓰십시다. ” “자네 맘대루
끄내다 주게. ” 능통이가 짐짝을 풀고 금은붙이 중에서 은투호, 삼각, 은가락지
한 벌을 꺼내가지고 안방에 건너와서 손님이 선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방의
첩을 내어주니, 이방의 첩은 투호도 만져보고 가락지도 끼워 보며 입이 한껏 벌
어졌다. 이방이 첩으로 들여앉힐 때 예물로 은가락지를 해주어서 은가락지는 끼
워 보기까지 하였으나 은투호는 남 찬 것도 본 일이 없는 터이라 이방의 첩이
투호를 들고 “이것이 차는 노리개지요? ” 하고 물으니 능통이가 “그게 대국
서 나온 노리개라네. ” 하고 가르쳐 주었다. “이런 걸 받았다구 야단치지 않을
까요? ” “안 주는 걸 달랬나. 야단칠 까닭이 있나. 만일 야단치거든 내게루 미
루게. ” “나리만 믿고 받아두겠습니다. ” “염려 말구 받아두게. ” 이날 점
심에는 은투호, 은가락지의 보람이 나서 반찬 가짓수가 아침보다 현수히 많았다.
능통이가 반찬을 가리키며 “염량이 어떻습니까? ” 하고 웃으니 꺽정이와 막봉
이도 다같이 웃었다. 세 사람이 점심밥을 먹기 시작하였을 때 밖에서 지껄지껄
하는 소리가 나는데 이방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읍이 가깝지 않은 까닭에 일없
는 날이라야 저녁 때 나와서 자고 가는 이방이 의외에 낮에 나와서 능통이가 대
단 괴상히 생각하는 중에 이방이 건넌방으로 들어와서 앉지도 않고 “서울 포교
들이 읍에 왔소. 집뒤짐하러 나다닐지 모르니 안방 다락에 들어가서 숨어들 기
시는 게 좋겠소. 지금 다락 안을 대강 치우라구 일렀소. 나는 곧 다시 가야겠으
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저녁 때 나와 하리다. ” 말하고 불불이 도로 나갔다.
점심들을 얼른 다 먹은 뒤에 짐짝을 가지고 안방 다락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다락이 한 간이 넓어서 세간 나부랑이가 있건만 세사람이 앉고 누울 틈은 넉넉
히 남아 있었다. 다락으로 옮겨올 때 능통이가 꺽정이와 막봉이를 이방의 첩과
인시시키어서 서로를 보았는데 다락에 들어앉은 뒤에 이방의 첩이 와서 들여다
보며 “참말 깔으실 자리를 잊었구먼. ” 하고 기직자리를 들여주고 얼마 동안
뒤에 또 와서 들여다보며 “더우시지들 않으세요? ” 하고 미선 두어 자루를 들
어주었다. 이방의 첩이 다정하게 구는 것을 세 사람은 다 은붙이의 보람으로 생
각하고 서로 보고 싱글 거리었다. 그 소문은 별것이 아니라 안성 있던 포도청
종사관이 죽산와 앉아서 지휘하여 포도부장, 포도군사들이 죽산을 중심삼고 양
지, 음성, 진천 등지로 나다니며 청석골 괴수들의 종적을 수탐하는데 의심쩍은
일이 없어도 기광을 부리느라고 집뒤짐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이방이
이야기를 대강 다 한 뒤에 “요새 메칠 동안 아무리 갑갑하더래두 다락 속에들
숨어 기셔야겠소. ” 하고 말하니 “다락 속에 같혀 있자면 좀 답답하겠네. ”
능통이는 걱정스럽게 말하고 “자구 먹구, 먹구 자구 팔자 좋지. ” 꺽정이는 뱃
속 편하게 말하고 막봉이는 지난 고생을 돌쳐 생각하고 “칼 안 쓰구, 착고 안
치구, 땅방울 안 차는 것만 해두 옥에 갇힌 것버덤 저 위 낫겠지. ” 하고 말하
였다. 이튿날 포도군사 서넛이 진천 장교를 앞세우고 이방의 작은집까지 왔었으
나 이방 다니는 사람의 집에 설마 적당을 숨겨두랴 생각하였던지 이방의 첩과
안방 세간만 들여다보고 그대로들 돌아나갔다. 이방의 첩이 간이 달랑달랑하던
것을 겨우 진정한 뒤에 다락에 와서 들여다보는데 다른 때같이 다락문을 열지
못하고 빠끔하게 틈을 벌리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능통이는 앉아서 벙어리 시
늉을 내고 꺽정이는 다락 천정을 치어다보고 번듯이 누워있었다. 능통이와 막봉
이가 연해 서로 빙글거리고 꺽정이가 이따금 하품을 하는 것이 모두 생사관두의
위경을 당한 사람들 같지 아니하였다.
그 이튿날도 포도군사들이 진천을 떠나가지 아니하여 세 사람이 다락 속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는데, 새벽에 이방이 나간 뒤로 자주자주 와서 다락문을 열어
보던 이방의 첩이 마침 능통이와 막봉이는 낮잠을 들고 꺽정이 혼자 눈뜨고 누
워서 배를 문지를 때 다락문을 고이 열고 들여다보다가 꺽정이더러 “속이 거북
하신가요? ” 하고 물어서 “아니오. ” 하고 꺽정이는 일어 앉아 대답하였다.
“소주 한 잔 드릴까요? ” “속이 더부룩한데 소주 한잔 먹었으면 좋겠소. ”
“그럼 잠깐 내려오세요. 자는 사람들 틈에서 잡숫느니 건넌방에 가서 잡숫고
오시지요. ” 이방의 첩이 눈치가 다른 것을 짐작 못하지 않으면서 꺽정이가 짐
짓 “내려가두 좋겠소? ” 하고 물으니 이방의 첩은 “삽작문을 닫아 걸었으니
염려 말고 내려오세요. ” 하고 대답하여 꺽정이가 계집의 눈치를 십분 수상하
게 여기면서 건넌방에 건너와서 앉았는데, 이방의 첩이 앙가발이 술상을 들고
들어와서 꺽정이 앞에 놓고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소주 그릇을 들며 “술을 쳐드
려야지. ” 하고 상긋 웃었다. 꺽정이가 속으로 ‘이년이 여우구나. 한번 혼뜨검
을 내줄까. ’ 생각하다가 ‘염량빠른 기집년의 노염을 샀다가 의외의 해를 볼
는지 모르니 어루만져 두리라. ’ 고쳐 생각하고 “친구 없이 먹는 술은 술치는
사람의 손맛으루 먹소. ” 하고 허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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