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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19)

"바깥일에 아직은 내가 있으니 너는 위로 어른 모시고 아래로 사람 부리는 일에 빈틈이 없게 해라. 이제 차츰 내 아는 일을 너한테도 가르쳐 줄 것이다만. 너도 모르는 것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묻도록해라."핏기 가신 낯빛이 삼베 상복 누런 빛과 별 다를 바 없는 이기채는 메마른 음성으로 말하였다. 그 음성이 깐깐하면서도 허적하게 들렸던 것은, 정작 마주앉아 가르쳐야 할 '바깥일'을 배울 사람이 제자리에 없는 탓이었으리라. 그 자리에 대신 앉아 시아버지의 빈 마음을 채워야 하는 며느리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우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그 이기채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참담한 일에 부딪쳐, 효원은 지금 이렇게 휘어질 듯 팽팽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모르는 것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물으..

혼불 6권 (18)

19.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내동댁 떡애기 손자가 밟혀 죽은 것이다. 참,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져, 일 당한 사람은 물론이고, 매안의 집집마다 기가 질려 경악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른이 안 계시니 별 희한한 변괴가 다 일어나는고만. 잡귀들이 등천을 허는가아."이기채는 급작스러운 사건에 놀라기도 했지만, 청암부인 별세하신 후에 생긴 일이어서 마음속이 더욱 어수선하고, 불길한 예감마저 드는 것을 떨치기 어려웠다. 수더분한 내동댁은, 가족들이 매안 이씨들 중에는 그래도 수하는 축에 들어서 위아래 안팎으로 아직 궂은 일 별로 안 본 쪽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 사람 사는 집이 으레 그런 것같이, 이 집안에도 위로 시부모 계시고 시조부모 계시며, 나이 어린 ..

혼불 6권 (17)

저 예전, 중원의 한 나라에 이름 높은 고승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 스님의 수행이 남다르게 깊고, 용맹정진 온 정신을 다하여 깨침을 얻고자 수도하던 끝에, 드디어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생불이라 하고 따르며 섬기게 되었다. 그이 이름이 널리 나고 높아지니 온 나라 안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날마다 친견하고자 몰려 오는 무리가 물결을 이루었다. 이에 왕이, 어리석은 백성을 홀리어 삿된 길로 빠지게 하는 혹세무민의 중을 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땅히 구실삼을 핑계가 없는지라 골똘히 생각한 끝에, 신하를 보내어 문제를 내도록 시켰다. 문제는, 그 절의 벽에 붓으로 기다란 선을 한 줄기 그어 놓고 "이 선에 절대로 손대지 말고, 이선이 가늘어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세상을 ..

혼불 6권 (16)

"아가, 저 뒷산에다가는 밤나무를 심어 보아라. 내가 전에 몇 처례 돌아봤다만, 탄금봉 기슭에 제법 쓸 만한 비탈이 있느니라. 내가 생각만 갖고 있었는데 미루다가 그만 날이 가고 말았어...네 시모댁 친정 동네가 밤으로는 아주 이름이 났거든, 그래서 율혼 아니냐. 내가 네 시부한테도 일러는 놓겠다만, 그 사람은 그렇게 몸이 실허지를 못해서 걱정이다. 자기 근력 부지해 주는 것만도 고마워서 이런 저런 일 마음쓰게 허고 싶지가 않어...그러니 차후에라도 그런 의논이 돌거든 내 말을 꼭 새겨 두었다가.... 율촌 쪽에 사람을 보내 연락해서...묘목을 구해다가 심어라. 그것도 큰 공사지.. 한 십 년 지나면 밤 추수를 헐수 있을 게야. 토질이 어쩔란지 잘 모르니 처음에는 그저 시험삼어 한 천여 그루, 사방에다 ..

혼불 6권 (15)

18. 얼룩  달빛은 바람꽃같이 자욱하였다. 큰 바람이 일어날 때, 먼 산의 봉우리 너머 아득한 하늘로 구름처럼 뽀얗게 끼는 기운을, 사람들은 바람꽃이라 불렀다. 이윽고 휘몰아칠 큰 바람이 그렇게 미리 꽃으로 피는 것이다. 천지를 뒤집으며 지붕을 두드리고 토담을 무너뜨리는 바람이 밤새도록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집채를 쥐어뜯으며, 문고리를 비끄러맨 방안조차도 덜컹덜컹 흔들리게 하였다. 위태로움에 긴장한 사람들이 잠을 못 이루고, 뜬눈으로 허옇게 앉아 오직 귀를 칼날처럼 세우게 하는 그런 바람도, 처음에는 황사 구름 같은 하늘의 꽃으로 왔다. 그것은 두려운 조짐이었다. 허리에 찬 밤이 이우는 노적봉 위의 중천에는 얼음거울 같은 달이 빙경이란 말 그대로 차고 맑게 떠 있는데, 아까보다 더 짙은 빙무가 달을 에워..

혼불 6권 (14)

"정신채리시오, 작은아씨."강실이는 제 이마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받으며, 이미 혼백이 되어버린 사람인 양 무게도 부피도 감각도 없이, 다만 모든 것이 멀고 멀어 아득할 뿐인 세상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액막이 연이 가물가물 연실을 달고 저 머나먼 밤하늘의 복판으로 허이옇게 날아 올라가듯이. 아아, 나 좀 잡아 주어. 자신의 몸이 지상에서 둥실 떠오르며 저승의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그네는 역력히 느끼었다. 그것은 아찔한 현기증이면서, 두렵고 무서운 허기였다. 어머니, 나 좀 잡아 주어요. 실을 놓친 지상의 어느 손 하나가 허우적이듯 연실 끄트머리 흰 자락을 잡아 보려 하는 것 같다가 그대로 아물아물, 액막이 연 강실이는 날아가고 있었다. 그 실을 놓친 손은 어머니인가, 아니면 제 육신인가. ..

혼불 6권 (13)

그리고 나서는 곡식 넣은 단지를 문종이로 봉하여 왼새끼로 둘러 묶고, 그 위에 널빤지를 얹어 놓았다. 오류골댁 웃목에도 수천댁 웃목에도, 또 누구네 웃목에도 집집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조상단지는 앉아 있었다. 또 어떤 집에서는 안방의 시렁 위에 올려 모시기도 하였다. 무심히 보던 그 단지를 그때부터 눈여기며, 단지 속에 앉으신 조상님의 모습을 혼자 상상해 보는 강실이에게, 오류골댁은 "오늘은 떡을 했으니 조상신한테 드리자."하며, 조신하게 두손으로 떡 접시를 받들어 단지 위에 덮인 널빤지에 놓았다. 그것이 조상신의 밥상인가 보았다. 식혜를 하여도, 찰밥을 쪄도, 아니면 그 무슨 조그만 별미만 하여도 오류골댁은 그렇게 올리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서 무엇 무엇을 조금 하였삽는데, 맛을 먼저 보옵소서."..

혼불 6권 (12)

수천댁은 이번에는 질녀의 조그맣고 발그스름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곡 찔러 주며 웃었다. 본디 자상한 성품은 아닌데다가 대찬 모색이 있는 수천댁이었지만, 강실이한테만큼은 가끔씩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도 해 주고, 댕기 물린 새앙머리를 매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그 앙징스러운 모습을 귀여워하였다."강실아, 너 어디로 시집갈래? 숟가락 한번 잡어 봐라."수천댁은 언제인가 밥상머리에 앉은 강실이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조막만한 강실이는 영문도 모르고 제 숟가락을 들었는데, 어린 마음에 무슨 일인가 싶어 숟가락 잎사귀 바짝 가까이를 쥐었다."하하, 고것 참. 너 어디 담 너머 이우제로 갈래? 어머니 못 잊혀서? 그렇게 뽀짝 곁으로 시집가면 나도 좋지. 이쁜 질녀 오며 가며 복받고 사는 것 구경도 혀고, 느그 어머니는 더..

혼불 6권 (11)

17. 저 대나무 꽃  어지신 산신 할매 금지옥엽 우리 애기 외 굵듯 달 굵듯 모래밭에 수박 굵듯 먹고 자고 무럭무럭 키워 주소 복을랑 석숭에 타고 명일랑 동박식에 타서 균(귀염)자동이 금자동이 누가 봐도 곱게 보고 외 굵듯 달 굵듯 모래밭에 수박 굵듯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무럭 무럭 키워 주소 쥐면 터질세라 불면 날세라 금지옥엽 우리 애기 무병장수하게 하옵소서 누구라도 아기를 낳으면 삼신 할머니한테 정한수 떠놓고 시루떡 올리며 미역국에 흰 밥을 차려서,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 축문을 외운다. 강실이를 낳은 오류골댁도 그랬었다. 아직 몸을 추스리기 어려운 첫이레 때부터 두 이레. 세 이레. 일곱 이레를 다하도록 그네는 칠 일마다 정성스럽게 소반 앞에 꿇어얹아 손을 비비며 빌었다. 그리고 삼신 바가지는 ..

혼불 6권 (10)

16. 시린 그림자  강실이는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빙천의 얼음 같은 달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멀리서 울리는 대보름 풍물 소리는, 아득하게 멀어서 오히려 강실이 서 있는 오류골댁 살구나무 검은 그림자 언저리 사립문간을 적막하게 도려내어, 무슨 깊은 물 가운데로 잠겨들게 하는 것 같았다. 그 물은 소리도 없고 빛도 없어 이승이 아닌 어느 기슭에서도 저만큼 밀려나가 있는 물이었다. 그 묵적의 숨죽인 수면 위에 시린 달빛의 성에가 푸르게 어리고, 그 성에 속에 강실이는 마치 얼어 붙은 흰그림자처럼 서 있는 것이다.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강실이의 얼굴은 이미, 정월 밤의 검푸른 하늘에 뜬 흰 달보다 더 창백하게 얼어 있었다. 아까 날려 보낸 액막이 연은 어디로 날아가 하늘의 수심 까마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