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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5권 (8)

배를 띄우지 않고 행차를 기다리던 사공이 배에 오르는 양반을 보고는 공연히 입을 삐쭉하였다. 배가 물 깊은 중간에 와서 사공이 삿대를 놓고 노를 저으려고 하는데 뱃고물에 앉은 농군 한 사람이 가로 거칠 것을 보고 "비켜 나우. " 하고 불쾌스럽게 말하니 농부가 일어나서 배 안을 둘러보며 "어디 가 설 데가 있어야지. " 하고 대답하였다. 배에 사람과 짐승을 가뜩 태워서 선창 중간에 앉았는 옷 잘 입는 양반의 앞과 옆 외에는 설 틈이 별로 없었다. "저리 못 가우! " 하고 사공 이 양반 앉았는 곳을 가리키며 소리를 왝 지르니 농군은 "양반님네 옆댕이루 어 떻게 가라우? " 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가라거든 어서 가, 잔말 말구. " " 양반님네 꾸중하면 나는 모르우. " "아따 못두 생겼네. " "..

임꺽정 5권 (7)

막봉이 형제와 동네 사람들은 아직 잠이 깨지 아니하고 손가만 일어나서 오줌 을 누러 밖에 나와서 오줌장군 앞에 돌아섰다가 삽작문 열어젖히는 소리에 고개 를 돌이켜 보니 삽작 안에 들어선 사람이 낯이 설었다. 그러나 손가는 동네 사 람으로만 여겨서 "아직 다들 안 일어났소. " 하고 오줌 누며 말하였다. "이놈아! " 하고 호령하는 소리에 손가가 깜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돌이켜보니 그 사람이 적의를 가진 것은 목자만 언뜻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알지두 못하는 사람더러 이놈 저놈 하는 게 누구야! " 손가가 겉으로는 거센 체하면서도 그 사람이 조그 만 쇠끝을 손에 든 것이 댓가지 재주 가진 도적인 성싶어서 속으로 겁이 났다. 손가가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막봉이 형제를 깨우려고 생각하고 괴춤을 치켜들 며 ..

임꺽정 5권 (6)

땅거미 된 뒤에 여러 장꾼이 한데 몰려서 탑고개를 넘어오는데 고개 마루턱을 넘어섰을 때 벌써 어두컴컴하여 길이 잘 보이지 아니하였다. 여러 사람 중에는 공연히 두런거리는 사람도 있고 두런거리지 말라고 쉬쉬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거지반 길 바닥에 송장이 늘비하려니 믿고 오는 까닭에 앞엣 사람이 무춤만 하여도 뒤의 사람은 송장인가 묻고 겁쟁이가 돌부리만 차고 아이구머니 소리질러도 장력 센 사람이 송장인가 어디 보세 하고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송 장 같은 것도 하나 보지 못하고 고개를 다들 내려왔다. 장꾼들 중에 탑고개 동 네 사람이 하나 끼여 있어서 고개를 내려오며 곧 다른 사람들을 작별하고 동네 로 들어왔다. 그 사람의 안해가 늦은 곡절을 물으니 그 사람은 탑거리서 지체한 까닭을 말하였다. "..

임꺽정 5권 (5)

늙은 도적 오가는 한동안 정신없이 도망하다가 뒤에 쫓는 사람 이 없는 것을 보고 살금살금 돌아와서 언덕 위에 숨어 앉아서 삐끔삐끔 내다보며 세 사람의 의논하는 말을 한마디도 빼지 않고 들으려고 손을 쪽박같이 오그려서 귓바퀴에 대고 있었다. 아주 죽이지 말잔 말과 내버리고 가잔 말에 눈살을 조금 펴다가 송도로 끌고 간단 말에 상을 다시 찌푸렸다. 곽오주가 송도로 끌려가면 필경 죽 게 될 것이라 끌려가기 전에 구해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을까. 늙 은 오가는 고개를 숙이고 꾀를 생각하였다. 쫓아내려가서 아주 죽이지 말자던 사람을 붙들고 이왕이니 아주 살려달라고 빌어볼까. 오가는 곧 쫓아내려갈 것 같이 벌떡 일어섰다가 자기마저 묶어서 끌고 가면 어떻게 하나. 오가는 다시 주저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임꺽정 5권 (4)

일행 세 사람이 골 어귀 가까이 왔을 때 마주 오는 장꾼 하나를 만났다. 손가가 "벌써 장이 파했소? " 하고 물으니 그 장꾼이 "아니오. " 하고 한마디 대답한 뒤에는 다시 말을 묻지 말라는 듯이 외면하고 세 사람 옆을 지나서 가며 흘낏홀 낏 뒤를 돌아보다가 남쪽 새래동 길을 들어가다 말고 돌쳐서서 여보 여보 하고 불렀다. 세 사람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중에 맨 뒤에 있는 막봉이가 자연 말을 묻게 되었다. "왜 그러오? " "댁들 어디루 가우? " “그건 왜 묻소? " "탑고개에 곽오주 나섰습디다. 맨몸 같으면 모르지만 물건짐 지구는 갈 생각 마 우. " "곽오주가 누구요? " "곽오주 성명을 모르는 것 보니까 난데서 오는 이가 분명하오. 이 앞 탑고개에 쇠도리깨 가진 무서운 도둑놈이 나섰습디..

임꺽정 5권 (3)

손가가 온 뒤 며칠 동안 에 하루 한번 술대접을 안 받은 날도 없으나, 저녁 한 끼 죽을 안 먹은 날도 없었다. 손가가 내처 묵기 미안하여 남은 사기를 마저 팔고 가는 길에 다시 올까 하고 떠나려고 생각하던 차에 막봉이가 마침 돌아왔다. 막봉이는 엄장과 몸집이 선봉이, 작은봉이보다 배나 크고 둥근 눈과 가로 찢어진 입이 삼봉이와도 달 라서 사형제 중에 가장 거물스러웠다. 나이는 불과 스물하나밖에 안 되었건만 삼십 가까운 손가와 연 상약해 보이었다. 삼사 년 만에 만나는 손가가 막봉이의 더 노창한 것을 보고 인삿말 끝에 "인제 아주 노총각이 되었네그려. " 하고 말하 니 막봉이는 씽긋 웃는 웃음으로 말대답을 대신하였다. 손가가 온 까닭을 대강 아비에게 듣고 알았건만 막봉이는 손가를 보고 "어째 왔소? " ..

임꺽정 5권 (2)

손가 형제가 본래 광주 분원 사람인데 형은 사기를 구울 줄까지 아는 사람이 고, 아우는 사기짐 지고 다니는 도붓장수로 이골난 사람이다. 형제 같이 송도로 이사 오기는 아는 사람의 연줄도 있거니와 장사 자리가 좋을 줄 믿고 온 것인데 송도 와서 수삼 년 장사를 하는 동안에 형제가 다 딸 하나씩 낳아서 식구가 늘 뿐이지 장삿속은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여 고향으로 도로 갈까말까 하던 중에 형이 서흥 사기막 사람 하나를 친하여 그 사람의 주선으로 서흥 가서 사기를 굽 게 되어서 아우의 식구까지 끌고 다시 이사를 가던 길이었다. 형이 죽고 보면 서흥 이사는 파의할 수밖에 없는 사세라 작은 손가가 형수와 의논하고 우선 송 도로 돌아가서 형의 상처를 치료하기로 작정한 뒤 탑고개 동네에 가서 승교바탕 과 사람을 얻어가..

임꺽정 5권 (1)

제 3장 길막봉이 곽오주가 탑고개 쇠도리깨 도적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을 때 송도 사기장 수 손가 형제가 서흥 사기막으로 이사 가느라고 식구들을 데리고 청석골을 지나 가게 되었다. 손가 형제의 식구가 어른 아이 모두 일곱인데 어른 넷, 아이 셋이 었다. 큰 손가는 다섯 살 먹은 아들을 업고 형제의 안해 두 동서는 각각 자기의 젖먹이 딸들을 업고 작은 손가는 이삿짐을 졌었다. 청석골 골짜기길을 걸어 나 갈 때 두 동서가 가만가만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 “형님, 후미진 길이 어째 무시무시하오. ” "이런 데니까 대낮에도 도적이 나지. " "쇠도리깨 가진 도적이 무슨 고개에서 난다지요? “ "탑고개 라네. " "우리가 탑고개를 지나가나요? " ”그럼. " "탑고개를 비키고 다른 길로 못 갈까요? " "다른..

임꺽정 4권 (29,完)

어느 날 다 저녁때 오주가 산더미 같은 나뭇짐을 지고 정첨지 집 못미처 있는 우물 옆을 지나오는데 물동이를 내려놓고 섰는 여편네들과 쌀을 씻고 앉았는 여 편네들이 참새같이 지저굴거리던 중에 여편네 하나가 내달아서 “곽서방 마침 잘 오는구려. 여보 나뭇짐 버티어놓고 두루박 좀 건져주오. " 하고 오주를 붙잡 았다. “여보 귀찮소. " “이녁 주인네 집 두루박을 내가 얻어가지고 왔다가 우 물에 빠뜨렸소. 좀 건져내오. " “빠뜨린 사람이 건지구려. " “내가 건져낼 수 있으면 이렇게 청할라구. 여보, 그러지 말고 좀 건져주구려. " “성가시어 못살겠 네. 내가 나뭇짐 갖다 두구 바지랑대 가지구 오리다. " “바지랑대 저기 있소. " 오주가 그 여편네에게 붙잡혀서 나뭇짐을 버티어놓고 바지랑대로 두레박줄을 건지..

임꺽정 4권 (28)

오주가 영문을 목라서 주춤하고 서자, 장모가 쫓아내려와서 삽작 밖으로 같이 나왔다. 부정하다고 집안에 못 들어서게 한 것을 안 뒤에 오주는 밖에 서서 이야기하는데 일기 좋아 장사 잘 지낸 것부터 대강 이야기하고 나서 “어린것 말 좀 할라구 급히 왔소. "하고 장모를 바라보니 “어린것이 어미의 한세상 났던 표적인데. "하고 장모는 손등으로 눈을 이리 씻고 저리 씻고 하였다. “죽기 전에 그런 말 합디다. 그런 말이 없더라도 잘 길러야 할텐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자네가 형세가 있으니 유모를 대나, 어떻게 하나?” “아무리 생각해두 장모가 좀 길러주어야겠소. "“내가 젖도 없이 어떻게 기르나?” “젖을 얻어먹여서라두 길러주시우. 내가 버는 일 년 사경은 모두의 젖값으로 데밀 테요. " “차차 의논해서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