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24

혼불 7권 (20)

검은 구름이 퍼렇게 물들어 번진 하늘이 나지막하면서도 아득하게 광목필처럼, 거멍굴 근심바우 너머 무산 날맹이 저쪽 어딘가로 음울 스산한 자락을 드리운 아래, 홍술은 임종할 때 모습 그대로, 일흔 남은 머리털을 허이옇게 흐트러 난발하고 서 있었다. 마른 장작같이 여위어 불거진 광대뼈와 훌쭉하니 꺼진 뺨에 북어껍질로 말라붙은 거죽이며, 핏기 가신 입술을 반이나 벌린 입 속에서 적막 음산하게 새어 나오는 검은 어둠. 홍술은 시푸레한 무명옷을 입고 맨발을 벗은 채 발가락을 갈퀴처럼 오그리고, 백단이네 사립문간에 서 있었다. 제멋대로 자라나 어우러진 대나무로 울을 두른 뒤안에서 수와아아 음습한 바람 소리가 밀리며 홍술이를 씻어 내리는데, 백단이는 마침 손에 흰 종이꽃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혼불 7권 (19)

5. 어쩌꼬잉  거멍굴이 한판 뒤집히어 소란스러운 중에도, 문복하러 온 고리배미 아낙 하나가 아까부터 백단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주인 없는 방에서 혼자 무릎을 바짝 가슴에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그네는 뾰족하니 야윈 턱을 제 무릎에 한참이나 얹었다가, 기웃 고개를 틀어 바깥쪽을 내다보기도 하고, 손가락 끝을 튕기며 검정 물들인 무명 치맛자락에 묻은 검불인지 티끌인지를 떨어내기도 하였다 그 행색은 남루하고, 기색은 초조해 보인다. 그렇지만 백단이는 냉큼 들어오지 않았고, 금생이네 성냥간에서 들리는 것인가, 놀란 개 짖는 소리만 숨이 넘어갔다. "언제 외겼소이?" 얼만큼이나 지났을까. 마당에서 구시렁구시렁 궁얼거리는 말수리가 나도니, 만동이와 귀남이는 뒤안으로 돌아가는 기척이고, 벌컥 지게문이 열..

혼불 7권 (18)

벌써 몇 번이나 물은 말이었지만 그때마다 강실이는 눈감은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에미가 남이냐. 니가 살인 죄인이 되었다 허드라도 나는 에미고, 너는 내 새끼지, 에미한테도 말 못허는 그 속이 오죽이나 상했으면 사람이 이 지경이 된단 말이냐.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을 나는 모르고, 그저 니가 약헌가, 약헌가만 했었지. 언제부텀 무슨 일이 생겨서 누구허고 어쨌는지, 이 세상에 나라도 알고 있으면 니가 좀 덜 무섭지 않겄냐. 아가." 오류골댁의 눈물 맺힌 말에, 강실이는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혹시 이 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싶어 오류골댁은 숨을 죽이고 강실이 입시울을 더듬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실이는 들이쉰 숨을 여리고 길게 내뿜을 뿐, 입을 끝내 열지는 않았다..

혼불 7권 (17)

"굴건 제복에 베옷 입은 상주가 거상중에 몽둥이 찜질 같은, 아니할 일 하고 나면,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남의 말도 무서운 것이고, 돌아가신 백모님께 도리도 아닌즉 체통을 잃지 마십시오." 흉억이 무너지는 이기채를 부축하여 사랑 축대로 오르던 기표는, 펀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 한 가닥에 번쩍 눈을 빛냈다. 그리고 마루에 웅크린 뼈다귀 보자기를 쏘아보았다. "형님, 이 투장은 저놈의 소행이 아니올시다." "아니라니?" "다른 놈 짓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산지기 박달이가 대보름날 밤에 제 눈으로 저놈을 산소에서, 산소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지 않어? 저놈 주동이로도 거기 다녀오는 길이라 이실직고했다 허고." "그래도 아닙니다. 무릇 투장이란, 제 발복하고자 제 부모와 조부모 유골을 남의 명당 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