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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40)

"잡어가도 즈그 망신이여, 안 그런당가? 곤장을 칠래도 죄목이 있어야고, 죄목을 밝히자먼 즈그 집구석 똥구녁을 뒤집는 꼴이제잉. 양반이라고 부럴 거 한나도 없다아. 집안으 누이동상 못 잊어서 상사벵으로 죽어간 놈 원한 풀어 주는 날 밤으, 큰집 작은집 오래비 누이가 또 붙어 먹었으니, 그거이 무신 양반이냐? 아 이고 꼴 사납다. 빛 좋은 개살구지 머. 껍데기만 번지르르. 차라리 나 같은 상년 은 팔짜대로 천대박고 팔짜대로 막 살응게 거짓말은 안허지, 즈그들은 헐 짓 다 해 처먹고도 누릴 것은 다아 누린당게. 에이, 던지러라."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숨죽이어 하던 말끝이 암팡지게 팽개쳐진다. 그러면서도 옹구네는 속으로 알고 있다. 원뜸의 대갓집에서 이 소문을 들으면 당장에 말 낸 사람을 뒤져내 찾을 것이다...

혼불 2권 (39)

아무래도 큰일은 큰일이었다. 설령 옹구네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그렇게 말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차피 헛소문이라도 한 바퀴 돌 모양 아닌 가. 공연히 평순네의 가슴이 무겁게 두근거렸다. "얌전헌 강아지 부뚜막에 올라앉드라고, 옛말 그른 디 하나도 없당게. 하이고매 원 시상으나. 법도 찾고, 도리 찾고, 효자.열녀 다발로 엮어 나는 집안에 무신 망 신살이여. 이런 년은 아조 내놓고 사는 노무 인생잉게 추접시럴 것도 없고 머 넘부끄럴 것도 없다마느은." 패앵. 코를 풀어 마당에 던지고 치마귀에 손가락을 문지른 옹구네는, 물 건너 열 녀비 쪽으로 길게 눈을 흘긴다. 그러더니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면서 입맛을 다시 고는, 평순네의 귀바퀴 가까이에 말을 불어 넣는다. "내가 오짐 누러 다무락 밑으로..

혼불 2권 (38)

15 가슴애피 "올다래가 피었는가." 하면서 오류골댁이 면화밭으로 나간다. 그네의 삼베 적삼 잔등이가 후줄근히 들 러붙는 것이, 보는 사람도 덥게 한다. 하늘은 아직도 쨍쨍하여 도무지 비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강실이는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훑어 낸다. 그래도 금시 또 땀이 배어난다. 동여 묶은 가슴의 말기는 아예 젖어 있다. 그런 데도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네의 정신이 딴 데 가 있기 때문인가. 소쿠 리에 수북히 담겨 잇는 애호박과 가지를 한 덩이씩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납작납 작하게 썰던 그네는, 감시 칼손을 놓고 허리를 젖힌다. 젖힌 그네의 허리 쪽으로 뒤안에서 건듯 부는 실바람 한 가닥이 스치듯 지나간다. 채반 위에 널어 놓은 호박이 벌써 땡볕에 익어 허옇게 빛을 뒤집고..

혼불 2권 (37)

"... 아가..." 청암부인은 강모를 바라보던 눈길을 옆으로 기울여 베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 다 다시 강모를 바라본다. "왜요? 할머니, 베개가 불편하세요?" 강모는 얼른 베개를 고쳐 주며 물었다. 청암부인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 시 늉을 하더니, 다시 눈짓으로 베개 밑을 가리켰다. "베개 밑에 뭐가 있어요?" 그네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길을 따라 강모는 베개 밑에 손을 넣었다. 베개 밑은 눅눅하였다. 땀 기운이 서린 탓이리라. 강모는 할머니의 겨드 랑이에 손을 넣은 기분이 들었다. 겨울날 찬 바람 속에서 방으로 들어오면 청암 부인은 "이리 온, 할미가 따뜻하게 해 주지." 하면서 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가 할머니의 켜드랑이에 넣어 주었다. "따숩지?" 정말로 그곳은 아늑한..

혼불 2권 (36)

"먹어야 크지." 그런 근심이 늘 가슴에 얹혀 있는 중에도 이기채는 무사히 열다섯을 넘기고, 열 여섯도 넘기고, 작배도 하였다. 열여섯 나이 탓에 죽은 것도 아니었지만, 하도 꿈속같이 어이없는 변고를 당한 포한이 기가 막혀, 청암부인은 아무리 급해도 기채만은 스무 살을 다 채워 치혼하리라, 결심했었다. 안 그래도 어려서부터 남 달리 조심스러운 기채가 성년으로 실해지기도 전에 장가들어 안팎으로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면, 다음 일을 누가 알리야. 그래서 그는 스물하나에 혼인하였다. 그가 율촌으로 혼행을 가던 날 새벽, 인사를 드리러 안방으로 들어왔을 때, 청암 부인은 오직 한 마디만을 했다. "잘 다녀오너라." 이기채는 두 손을 방바닥에 공손히 모으고 절을 한 다음 일어섰다. 그리고 방문 을 나섰다. (잘 ..

혼불 2권 (35)

"왜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꿈에 애기를 보면 깨고 나서 근심질 일이 생긴다 고. 애기라는 것이 그만큼 애물이라는 뜻일 게요. 잠시 잠깐도 헛눈 팔면 안되 고, 너무나 애중히 섬겨도 안되고, 강아지나 풀나무 같이 저절로 크는 것도 아니 고." 김씨부인은 마치 아이를 길러 본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지도 했다. "그래도 삼신할머니가 보듬고 키워 주시니 그 힘으로 사람되는 게지, 그게 어디 인력만으로 크겠소?"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삼라만상에 다 지켜 주는 신령이 있지 않은가. 물에 가 면 물귀신이 있고, 산에 가면 산신령이 계시고, 부엌에 가면 조왕신이 집안을 지 킨다. 그뿐인가. 하늘에는 일월성신, 땅에는 지신이 있어 천지의 기운을 조화롭 게 다스린다. 심지어는 닳아빠진 부지깽이조차도 오래 쓰면 넋이..

혼불 2권 (34)

그때 강모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는 효원이 미처 일감을 치우기도 전에 사나운 몸짓으로 물어뜯을 듯이 그네를 덮쳤다. (아니, 이 사람이.) 효원은 무의식중에 그를 밀어냈다. 무슨 거역을 하겠다든가 마땅치 않아서가 아니었다. 너무나 갑작 스럽게 들이닥친 강모의 행동이 일변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당황했기 때문이었 다. 그것은, 평상시의 강모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난폭함에 놀란 탓이었는지도 모 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그네는 알 수 없는 모욕감 에 휩싸였던 것이다. (나야 제 사람이니 언제라도 하란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노 릇이지만.) 효원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힘대로 강모를 밀어내며 바람벽에 등 을 버티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감아쥐었다. "왜 이러시..

혼불 2권 (33)

"새서방님." 전보지를 구겨쥔 채 깜박 잠든 강모는 꿈 속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새서방님." 그 소리는 좀더 가까이 귀밑에서 들린다. 안서방이다. "?" 강모는 말없이 안서방을 돌아본다. 안서방은 조심스럽고 죄송한 몸짓으로 두 손 을 비비고 서서 강모의 기색을 살핀다. "저... 큰마님께서 지달리시는다요." "알았네." "대청에 지시는구만요." "응." "아까막새부텀..." 강모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자, 안서방은 말끝을 흐리면서 재촉을 덧붙인다. 강모는 마지못한 듯 몸을 돌려 안채 쪽으로 발을 옮긴다. 꿈속이라서 그랬을까. 할머니 청암부인은 평소의 정정한 근력으로 허리를 세운 모습이었다. 대청에서 는 무릎에 갓난아이를 안은 그네가 흰 모시옷을 입고 안자 만면에 미소를 머금 은 채 강모를 ..

혼불 2권 (32)

"어머니." 이번에는 이기채가 불렀다. 그네의 입모양이 둥그런 시늉을 했다. "어머님이 강모 찾으시는 거 아닐까요?" 율촌댁이 이기채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이, 강모 찾으십니까?" 이기채가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끄덕이는 시늉이라고 해야 했다. 이기채는 잠시 망연하여 율촌댁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청암부인에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는 그네가 이미 의식을 잃어 버리고 만 뒤였다. 사람의 형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빈 껍데기에 불과하였다.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한들 그것이 무엇이리오. 한낱 나무토막이나 검 불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청암부인은 이따금 몇 차례 아주 한순 간이나마 눈을 뜨기도 하고, 한번은 이기채와 몇 마디 말을 나누기..

혼불 2권 (31)

"오냐. 그래라. 저러신 중에도 정신이 잠깐 드시면 너를 찾으신다. 어디 있느냐고 방안을 둘러보고 자리에 없으니 몹시 서운해허시드라. 이제 어디 가지 말고 할 머님 곁에 있거라. 지금 숨만 붙어 있지 살아계신 분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율촌댁은 애간장이 녹으면서도, 일변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전신에 느껴졌다. 무 엇이라 할까. 청암부인으로부터도 이기채로부터도 버림받은 강모가, 가엾게 떨면 서 자기의 품으로 안겨들어온 것 같은 오랜만의 충만감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도 율촌댁은 이미 의식을 잃어 버린 청암부인한테서 강모를 되찾은 듯한 심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늘 뒷전에서 눈치보며 멈칫거리던 어미 노릇을 이번 에야말로 당당히 해 주고 싶은 간절함을 지그시 눌렀다. 이렇게 참담하여진 아 들이 마치 비..